14화 천 길 낭떠러지의 잔도(3)
서백은 유소운을 돌아보며 물었다.
“잔도가 끝나면 촉도관행 길과 합쳐집니까?”
“그래. 잔도에서 나온 뒤 한 시진쯤 가면 촉도관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거기부터 촉도관까지는 외길이지.”
유소운이 대답하자 서백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먼저라니?”
왕이삼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제가 먼저 가서 그자를 잡겠습니다.”
왕이삼이 영문을 몰라서 유소운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두 분은 천천히 따라오십시오.”
그 말에 왕이삼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이 녀석, 검법과 외공뿐 아니라 경공도 자신 있는 모양이군.’
경공을 써서 일행보다 먼저 달려가겠다고 선언한 서백.
왕이삼은 이제 서백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색이 선배 무림인인데 해 보지 않고 포기할 수야 없는 일.
‘좋다. 내 숨이 턱까지 올라오는 한이 있더라도 꼭 쫓아가고 만다!’
왕이삼은 호언장담하며 생각했다.
무공과 검법은 재능과 실력의 영역이다. 하수는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고수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경공은 얘기가 다르다.
초식을 피하거나 물 위를 달리는 것은 경공 중에서 정확히는 운신법에 속한다. 운신법은 고수를 따라갈 수 없다.
반면 지금처럼 적을 추격하는 것은 속도도 중요하지만 오래 달리기에 더 가깝다.
지치지 않고 얼마나 오래 달리느냐가 핵심인 추격전.
왕이삼은 끈기라면 자신 있었다.
한번 시비가 붙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늘어져서 미친개라고 불리던 과거가 있는 왕이삼.
‘탈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따라가 주마!’
“그럼 가 보겠습니다.”
후우우우.
서백이 호흡을 내뱉으며 석가심결을 시전했다.
타타타탓.
먼저 가겠다는 서백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한 걸음만 삐끗해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잔도를 서백은 빠른 속도로 주파했다.
“우리도 따라가지. 후배한테 뒤질 순 없잖아?”
“좋소.”
왕이삼과 유소운도 서백을 쫓아 잔도를 달렸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
왕이삼은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두 다리가 후들거려서 땅바닥에 털퍼덕 누워 버리고 말았다.
* * *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한 숲속.
그곳에 마차 네 대가 서 있었다.
어디선가 인영 하나가 나타나서 마차를 향해 다가왔다.
순간 한 자루의 비수가 날아와 인영의 목에 박혔다.
휙. 팍.
목에 깊숙이 비수가 박혔지만 인영은 움찔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곧이어 비수를 던진 사파인이 건너편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시체를 앞세웠군.”
사실이었다.
인영은 목에 비수가 박히기 전부터 죽어 있던 시체였다. 뒤에서 또 다른 인영이 시체를 붙잡고 방패로 쓴 것이었다.
인영이 시체를 아무렇게나 버리며 앞으로 나왔다.
“암기를 쓰시는군요. 칼받이를 준비하길 잘했습니다.”
시체를 칼받이로 쓴 인영은 바로 서백이었다.
“그놈은 뭐냐? 네가 죽였냐?”
사파인의 물음에 서백은 어깨를 으쓱하며 반문했다.
“숲속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당신이 죽인 것 아닙니까?”
“나는 아니다. 뭐, 누가 죽였든 상관없지.”
“그렇죠. 조금 있으면 시체가 한 구 더 생길 테니까요.”
“네놈이 이렇게 빨리…….”
“쫓아올 줄은 몰랐습니까?”
“그 젊은 놈이랑 네놈 둘 중에서 하나가 오리라고는 생각했지. 다른 놈들은 어디 있냐?”
“저 먼저 왔습니다. 당신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그 말에 사파인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씨익 웃었다.
“네놈 혼자라고? 겁대가리가 없는 놈이군.”
“아직 젊으니 겁이라도 없어야죠.”
“하하하! 우문현답이군. 근데 늙은이가 왜 겁이 많은 줄 아냐?”
“왜입니까?”
“겁이 없는 놈들은 늙지도 못하고 일찍 죽거든.”
사파인이 검지를 들어 서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호흡은 거칠고 전신은 땀범벅이 되었구나. 그게 너 같은 애송이의 단점이다. 억지로 나를 추격하긴 했지만 호흡이 엉망이라 목숨이 떨어지는 거지.”
그 말에 오히려 서백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땀이 난 건 장점입니다.”
“뭐야?”
“살겁을 펼치기 전에 몸을 푼 셈이죠. 적당한 운동은 근육이 잘 움직이게 해 주니까요.”
이번에는 서백이 검지를 들어 사파인을 가리켰다.
“반면 당신은 습기 찬 숲에 오랫동안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근육이 잔뜩 오그라들었을 테니 갑자기 움직이면 제 실력을 못 낼 겁니다.”
“…하하하! 그놈의 세 치 혀 길기도 하구나!”
사파인이 한바탕 크게 웃어제끼더니 반격했다.
“그럼 그 거친 호흡은 어떡하고?”
“…….”
“경공으로 급하게 달려온 바람에 네놈 호흡은 엉망진창으로 흩어졌다.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이나 해라. 내가 뒤에서 목을 베어 주마, 하하하하!”
“호흡이 거친 건 확실히 문제군요.”
서백이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기 시작했다.
흐으읍. 후우우우우.
다음 순간 사파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거친 호흡으로 숨을 헐떡이던 서백. 그런데 단 한 번의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을 가라앉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장면.
“네놈, 그 내공심결은 대체… 문파가 어디냐?”
“원래 소속은 밝히지 않지만 당신은 곧 죽을 것이니 이번만큼은 말씀드리죠.”
“…….”
“저는 석가장 출신입니다. 방금 본 것은 석가장의 독문무공인 석가심결입니다.”
“석가… 심결?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사파인이 고개를 저으며 서백의 말을 부정했다.
“네놈의 내공심결은… 맞아! 서장 구륜사 놈이 네놈과 비슷한 내공심결을 운용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서장이라. 석가장은 중원의 서쪽 끄트머리에 있으니 그렇게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그럼.”
스윽.
서백이 등에 멘 검을 들며 말했다.
“죽을 준비는 되셨습니까?”
“내공심결 하나는 인정해 주지. 하지만…….”
스윽.
사파인이 기이하게 휘어진 쌍낫을 양손에 들었다.
“무림에는 이런 말이 있지.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
그 말을 듣고 서백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웃기니까 웃었습니다. 그건 서로 수준이 비슷해서 도토리 키 재기 할 때나 쓰는 말이죠.”
“…….”
조금도 허세로 느껴지지 않는 말.
“시작하시죠. 선수를 양보하겠습니다.”
“사양하지 않으마… 하아앗!”
갑자기 사파인이 양손을 활짝 펼쳤다. 쌍낫이 허공으로 떨어지는 찰나, 사파인은 서백을 향해 양손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양손 소매에서 가느다란 비수가 발사됐다.
파파파팍.
비수들이 서백의 전신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비수가 온몸에 꽂혀서 고슴도치 꼴이 될 위기.
하지만 서백은 냉소했다.
‘역시 그랬군.’
쌍낫은 속임수였다.
그러나 술책은 사파인만 부린 게 아니었다.
선수를 양보하겠다는 서백의 말 또한 속임수!
‘석가검법에 양보란 단어는 없지.’
사파인이 쌍낫을 독문병기인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걸 서백은 간파하고 있었다. 서백은 사파인의 술책을 역으로 받아쳐서 그의 진짜 독문무공을 끌어낸 것이었다.
여덟 개의 비수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들 때.
서백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번쩍.
어둠 속도 대낮처럼 환하게 보는 석가심결의 비법.
지금 서백의 두 눈에는 여덟 개의 비수가 느릿느릿 허공을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사각(死角).’
여덟 개의 비수가 사방의 방위를 점하면서 날아왔지만, 서백의 두 눈은 비수들이 노리지 못하고 있는 빈틈을 포착했다.
그 사각으로 서백이 몸을 날렸다.
탓.
다음 순간, 사파인의 코앞에 서백의 신형이 나타났다.
“뭐…….”
사파인의 얼굴이 경악해서 일그러지는 찰나.
서백이 검을 휘둘렀다.
* * *
탈진해서 쓰러진 왕이삼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길을 걷고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걸었을 때, 왕이삼은 그늘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는 유소운을 발견했다.
“왜 여기 있는 거냐? 서백 녀석은?”
“나도 모르오. 얼마나 빠른지 도저히 못 따라가겠더군.”
“…….”
허탈해진 왕이삼은 고개를 떨궜다.
그는 오늘 교훈 하나를 깨달았다. 포기가 빠르면 몸이 편하다.
잠시 후, 둘은 일어서서 다시 길을 떠났다.
“경공이 그렇게 빠르다니, 정말 놀랐소.”
“그 녀석이 놀라운 게 하나둘이 아니지.”
“경공만 봐도 내공이 얼마나 심후할지 상상이 안 되더군.”
“내공?”
유소운의 말에 왕이삼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서백 녀석은 내공이 아니라 외공이 대단한데?”
“아니오. 내공도 분명 심후할 거요. 그렇게 외공과 내공을 두루 겸비한 자는 지금까지 한 명밖에 못 봤소.”
“그게 누군가?”
“이름난 악인인데… 그런 자가 있소.”
매사에 시원시원하던 유소운이 말을 꺼렸다. 왕이삼은 뭔가 개인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더 묻지 않았다.
둘은 잔도를 벗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숲길을 걸었다.
곧이어 둘은 서백을 발견했다.
“저기 있군.”
숲길에는 마차 네 대가 줄을 이어 서 있고, 당나귀들은 한가로이 길가의 풀을 뜯고 있었다.
서백은 마차에 걸터앉아 있었다.
“오셨습니까?”
“너, 이 녀석… 괜찮냐?”
“네. 마차 네 대 모두 상태가 양호합니다.”
“그게 아니라 네가 괜찮냐고? 그 사파 놈은?”
“저기 있습니다.”
왕이삼과 유소운은 서백이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숲길 한쪽에 사파인이 숨을 거둔 채 쓰러져 있었다.
상대의 목을 일검에 뎅겅뎅겅 베어 버리던 서백.
뜻밖에도 사파인은 목이 멀쩡했다.
대신 가슴팍이 움푹 꺼져 있었다. 생선가시처럼 안으로 꺾인 갈비뼈들이 심장과 주요 장기를 찔러서 죽은 것이었다.
“목을 베지 않았네?”
“네. 검자루로 쳤습니다.”
후려쳐서 죽였다는 뜻.
“왜 이번에는 목을 베지 않고…….”
“괜히 핏물이 숲에 떨어져서 망자가 되살아나면 귀찮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을 베지 않고 죽였습니다.”
“…….”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독문무공인 검법을 쓰지 않아도 손쉽게 사파인을 죽이다니. 그로서는 서백의 무공 수위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근데 저 시체는 뭐지?”
유소운이 다른 시체를 가리키며 물었다.
“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
“사파인이 죽인 건가?”
“그자도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뭐야? 그럼 누가?”
셋은 시체 앞에 서서 머리를 맞대고 살폈다.
“비수가 목을 파고들었군.”
“그건 사파인이 한 겁니다. 제가 시체를 칼받이로 썼거든요.”
“아, 그렇군.”
서백과 유소운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왕이삼은 왠지 기가 눌렸다.
시체를 눈앞에 두고 사인(死因)을 조목조목 따지는 둘. 지금까지 자신도 나름 잔뼈 굵은 도검수라고 생각했는데, 무림의 진짜 전문가는 따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살수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시체는 대개 두 가지 이유로 죽은 것이지.”
“암기와 독공 말입니까?”
“맞다.”
아는 것이 나오자 왕이삼이 얼른 끼어들며 말했다.
“암기와 독공이라고? 이 근처는 사천당문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 말에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 놈들, 얼마나 사람을 죽였는지 곳곳에 시체가 즐비해 있군.”
“이렇게 사람을 죽여 놓으니 숲속에서 망자가 출현할 수밖에요.”
“내 말이.”
“그럼 이동하죠.”
유소운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길을 따라 이삼일을 가면 바로 촉도관이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요.”
셋은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을 가는 중에 서백은 뒤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숲속에서 발견해서 사파인의 비수 칼받이로 쓴 시체.
서백은 시체의 정체가 궁금했다.
‘대체 누구지?’
시체는 정체모를 암기나 독공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천당문의 짓일 가능성도 높았다.
문제는 시체가 죽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
현재 사천당문의 가장 큰일은 촉도관행의 폭약 운송일 것이다. 그런데 무림인을 급히 암살할 일이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사천당문의 장원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무언가 놓친 게 있다.’
서백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시체에 얽힌 비밀이 무엇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서백이 오지 않자 왕이삼이 불렀다.
“후배, 뭐 하나?”
“갑니다.”
서백은 고개를 저어서 잡념을 지운 뒤 횅하니 몸을 돌려 일행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