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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3화 (13/123)

13화 천길 낭떠러지의 잔도(2)

지금 서백 일행이 가고 있는 잔도는 하필 경사가 진 오르막길이었다.

그냥 놔두면 마차가 아래로 굴러 내려가는 길.

그런 판에 사파인이 당나귀들을 죽이자 힘을 잃은 마차가 서백을 깔아뭉길 기세로 굴러왔다.

쿠르르르르.

서백은 땅에 누워서 뒤로 데굴데굴 구르며 바퀴에 깔리는 것을 피했다.

이어서 몸을 일으킨 서백은 두 손으로 마차를 잡았다.

터엉.

당나귀 두 마리가 끌어야 움직이는 무거운 마차.

그 마차가 서백의 두 손에 정지했다.

하지만 위기는 계속됐다. 숨이 끊긴 당나귀 한 마리가 잔도 옆으로 쓰러진 것이다.

그 바람에 마차가 기우뚱하며 검에 올렸던 바퀴가 빠졌다. 덜컹.

순간 뒤에서 청년이 달려들어 합세했다.

사천당문의 시험에 합격한 무림인 중 가장 나이가 젊은 축에 속하는 서백과 청년.

둘이 힘을 합치자 바퀴 하나가 허공에 붕 떴는데도 불구하고 마차는 꿈쩍도 않고 정지했다.

끼기기긱…….

마차가 기운 바람에 궤짝에 덮어둔 검은 천이 미끄러져서 아래로 떨어졌다. 날짐승처럼 펄럭거리며 떨어지는 검은 천은 한참을 지나도 계속 보였다.

절벽 밑이 까마득하게 깊다는 뜻.

사파인은 앞서 지나간 마차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랴! 아니, 당나귀는 이랴가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이랴!”

사파인이 검을 휘두르며 위협하자 당나귀들은 정신없이 잔도를 달려나갔다.

망자 앞에서도 꿈쩍 않던 당나귀들.

그러나 다른 당나귀 두 마리가 사파인의 일검에 죽는 것을 보자 겁을 집어먹은 것이었다.

왕이삼이 그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미친 새끼! 저 사파 놈 잡아!”

왕이삼은 허리춤에서 박도를 든 뒤 마차를 뛰어넘어 사파인을 추격하려고 했다.

그때 서백이 외쳤다.

“잠깐!”

“왜 그러냐? 당장 저놈을 도륙해야…….”

“마차에서 물러나십시오.”

“…….”

왕이삼이 서백의 경고에 움찔해서 발을 멈췄다.

서백은 마차 주변에 검은 가루가 휘날리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고개를 기울여서 마차를 살핀 서백은 이를 악물었다.

‘예상이 맞았군.’

마차에 실린 궤짝 하나가 쩍 벌어져서 틈새로 폭약이 새어나오는 중이었다.

사파인이 어느새 검질을 해놓은 것이었다.

‘일행의 맨 뒤에 있을 때부터 이미 술책을 부려놨군.’

당나귀들이 멀리 가버렸는지 어느새 사파인은 길을 다시 돌아와 있었다.

그가 품에서 화섭자를 꺼냈다.

“경치 한 번 끝내주네. 여기서 죽으면 다들 우화등선할 테니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하하하하!”

사파인이 화섭자를 훅 불어서 불씨를 돋운 다음 그대로 궤짝을 향해 던졌다.

툭. 화섭자가 궤짝 위에 떨어졌다.

“모두 도망치십시오!”

서백은 한 손을 내려서 바닥에 둔 검을 잡아 등에 멨다.

이어서 청년과 시선을 교환했다. 둘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차를 절벽으로 떠밀었다.

덜커덩.

오른쪽 열의 바퀴들이 잔도에서 이탈하자 마차는 기우뚱하며 크게 기울었다.

왕이삼이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마차가 폭발합니다.”

“……!”

뒤쪽에 있느라 무슨 상황인지 모르던 왕이삼과 무림인들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백을 비롯한 무림인들은 몸을 돌려서 도주했다.

왕이삼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폭발 안 하는데?”

“아니, 할 겁니다.”

서백의 대답은 단호했다.

사파인이 불씨가 남아 있는 화섭자를 던졌으니 폭약이 흩뿌려지면 결국 불이 붙을 터.

서백의 예상은 정확했다.

옆으로 기울던 마차가 균형을 잃고 절벽으로 떨어졌다. 곧이어 궤짝 틈새에서 폭약이 확 쏟아졌다.

사파인이 던진 화섭자가 그 검은 가루 속에 파묻혔다.

치지지직… 콰아아아앙!

마차가 폭발했다.

굉음이 귀청을 찢어발길 것처럼 세차게 지나갔다. 이어서 광풍이 검은 먼지를 대동하고 몰아쳤다.

휘이이이이!

무림인 하나가 광풍에 발을 헛디뎌서 절벽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악!

그런데 무림인이 손을 휘두르다가 왕이삼의 바짓자락을 잡았다. 그 바람에 왕이삼마저 몸을 못 가누고 균형을 잃었다.

“후, 후배… 나 좀…….”

그때 마차가 다시 한번 폭발했다. 다른 궤짝들까지 불길이 옮겨붙은 것이다.

안 그래도 균형을 못 잡고 있는데 재차 광풍에 휩싸이자 왕이삼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서백이 그제야 왕이삼을 발견하고 외쳤다.

“선배님!”

하지만 때는 늦었다. 왕이삼은 그대로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순간 청년이 등에 멘 혁낭을 겨드랑이 사이로 빼면서 뒤집었다. 그러자 혁낭에서 얇은 밧줄 꾸러미가 나왔다.

청년이 왕이삼을 향해 밧줄을 던졌다.

밧줄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왕이삼에게 날아갔다.

“그걸 잡아!”

허공으로 추락하던 왕이삼은 그 말을 듣자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밧줄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을 빗나갔다…….

그때 서백이 잔도를 박차고 몸을 날렸다.

휙.

서백은 용틀임하듯이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밧줄을 손목에 휘감았다. 이어서 다른 손을 왕이삼에게 뻗었다.

“선배님!”

탁. 서백과 왕이삼이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와 동시에 청년이 몸을 회전하며 밧줄을 자신의 몸통에 감았다. 그리고 기합을 넣으며 한쪽 발을 바닥에 박았다.

떠엉.

단단한 암벽으로 된 잔도에 발자국이 박힐 만큼 강맹한 진각.

밧줄이 팽팽히 당겨지자 서백과 왕이삼은 추락을 멈추고 절벽 중간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왕이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무심코 밑을 내려봤다.

까마득한 절벽 밑이 어디가 바닥인지 모를 정도.

여기서 떨어졌다면 뼈가 가루가 되었으리라!

“살았군… 고맙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위쪽에서 재차 굉음이 들리는 게 아닌가?

쿠르르릉.

“또 폭발하는 건가?”

서백이 재빨리 위를 살핀 뒤 대답했다.

“이번에는 산사태군요.”

“……!”

엄청난 폭발이 암벽을 뒤흔든 탓에 집채만 한 바윗덩이가 금이 가면서 무너져 내린 것이다.

바윗덩이는 하필 서백과 왕이삼을 지탱하고 있는 청년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서백은 폐 속 가득히 숨을 들이마신 뒤 급격히 내쉬었다.

후우우우.

석가심결 시전.

서백은 양손을 끌어당겨서 왕이삼을 잡은 손목에 밧줄을 칭칭 감았다. 그런 다음 자유로워진 다른 손으로 등에 멘 검을 들었다.

이어서 한 손으로 검을 암벽에 꽂았다.

써어억.

수천 년 동안 비바람에도 끄떡없던 암벽에 두부 썰듯이 검이 꽂혔다.

청년이 위를 올려다보고 바윗덩이를 알아차린 찰나, 서백이 그에게 일갈했다.

“이쪽으로!”

바윗덩이가 전신을 깔아뭉개는 순간, 청년이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본 왕이삼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지금 자신과 서백은 청년의 밧줄에 목숨을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밧줄을 쥔 자가 아래로 몸을 던진다고? 세 명이 속절없이 추락할 게 아닌가!

“대체 뭐하는 짓…….”

그때 서백이 손목을 뒤집으면서 밧줄을 튕겼다.

그러자 밧줄 중간이 암벽에 꽂힌 검자루에 정확하게 감겼다.

콰아아앙.

바윗덩이가 잔도에 떨어졌을 때, 서백과 청년은 각각 밧줄의 반대편을 잡고 매달렸다.

밧줄은 절묘하게 중간이 검자루에 걸쳐졌다. 세 명의 목숨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암벽에 꽂힌 검자루가 유일!

바윗덩이 잔해는 셋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서 떨어졌다. 다행이 아무도 잔해에 맞지 않았다.

왕이삼은 그야말로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합을 맞추다니……!’

만약 조금만 호흡이 맞지 않았다면 세 명 모두 저승길로 행차할 뻔하지 않았는가?

무림에 잔뼈가 굵은 도검수 왕이삼은 새삼 깨달았다.

천외천(天外天).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무림에 고수는 많다. 하지만 얼마나 대단한 고수라도 그보다 더한 고수가 반드시 있다!

산사태가 가라앉자 서백과 청년은 눈빛을 교환했다.

청년은 밧줄에 몸을 매단 채 시계추처럼 암벽을 차며 좌우로 왕복했다. 그러면서 얻은 추진력으로 몸을 날려서 잔도에 착지했다.

그는 두 발을 바닥에 단단히 박은 뒤 서백과 왕이삼을 끌어올렸다. 서백은 암벽에서 검을 뽑은 뒤 절벽을 밟고 올라갔다.

서백과 왕이삼의 몸무게가 고스란히 실린 밧줄.

그러나 청년은 우물에서 두레박 푸듯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밧줄을 당겼다.

잠시 후, 서백과 왕이삼은 잔도에 올라왔다.

죽다 살아난 왕이삼은 서백에게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또 한 번 목숨을 건졌어.”

“선배님답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그만 하시죠.”

왕이삼은 청년에게도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이 빚은 꼭 갚지.”

“그 말 믿겠소.”

청년 빙긋 웃으며 대답한 뒤 밧줄을 감았다.

짐이나 마차를 끌 때 쓰는 굵은 동앗줄이 아니라 삼베를 꼬아 만든 가는 밧줄.

‘저런 걸 왜 들고 다니지?’

왕이삼은 의문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까.

청년은 얼굴이 희고 곱상해서 글공부만 한 백면서생 같았다. 하지만 두 명을 가볍게 끌어올린 걸 보면 외공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서백이 말했다.

“원래 화살에 연결해서 쓰는 줄이군요.”

“잘 아는군.”

청년이 밧줄을 혁낭에 넣는데 마침 활과 활통이 보였다. 왕이삼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궁수 출신인가?”

“출신이 아니라 지금도 궁수요.”

“궁수라면 과거를 본 뒤 관에서 벼슬을 하는 게 보통일 텐데.”

“과거에 몇 번 떨어지고 떠돌아다니다가 지금은 무림맹 일을 하고 있소.”

“무림맹이라면 소속된 문파가……?”

“문파는 따로 없소.”

밧줄을 다 넣은 청년이 혁낭을 죄면서 말했다.

“그냥 활 좀 쏘고 필요하면 도검도 쓰는 궁수요.”

“나는 도검수 왕이삼이네. 이쪽은…….”

“서백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나는 유소운이오.”

* * *

폭발의 여파로 생긴 검은 먼지 구름이 잔도 중간을 막고 있었다.

그나마 마차가 떨어지면서 폭발하느라 잔도가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무림인이 건너기는 충분한 정도. 만약 잔도 위에서 폭발했다면 길이 통째로 무너졌으리라.

서백, 왕이삼, 유소운은 밧줄을 타고 올라오느라 사파인이 가버린 쪽에 와 있었다.

잔도로 온 무림인 중 한 명은 추락했고 뒤에서 따라오던 세 명은 폭발을 피해 살아남았다.

서백은 먼지 구름 너머에 있는 무림인들에게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우리는 괜찮다.”

“이제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

서백이 묻자 대답이 없었다. 셋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먼저 구덩이가 파인 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구덩이를 건너서 사파 놈을 추격할 거다.”

마차는 몽땅 사파인이 끌고갔으니, 무림인들이 구덩이를 건너는 데 큰 문제는 없으리라.

“알겠습니다.”

“너희는 어쩔 작정이냐?”

“우리는 잔도를 따라 그자를 추격하겠습니다.”

“좋다. 양쪽에서 포위해서 놈을 쫓자! 그럼…….”

얘기가 끝나자 발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멀어졌다. 무림인 셋이 몸을 돌려 길을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리도 출발하죠.”

서백이 몸을 돌리는데 왕이삼이 말을 걸었다.

“우리도 길을 돌아가는 게 어떠냐? 여기 잔도는 아무래도 위험하고…….”

“너무 멀리 돌아갑니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늦습니다.”

“왜? 그놈이 촉도관에 입성하기 전까지만 잡으면…….”

“안 됩니다.”

서백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사천당문의 마차는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아무나 마차를 끌고 촉도관에 도착하면 보수를 받을 수 있죠.”

“그건 미처 생각 못 했군.”

“만약 그자가 선두에 출발했던 무림인들과 합류한다면 반드시 술책을 부릴 겁니다. 우리를 제거하면 자기들이 마차를 독차지할 수 있으니까요.”

“……!”

“우리가 없다면 한 사람당 보수가 늘어나는 셈이니 서로 손을 잡을 겁니다. 그전에 잡아야 합니다.”

말을 끝내며 서백은 생각했다.

‘그들이 서로 손을 잡든 말든 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일부러 고생길을 선택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

서백은 싸늘한 눈빛으로 결심했다.

‘다른 무림인들과 합류하기 전에 놈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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