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질풍무사-10화 (10/123)

10화 촉도관으로 가는 길(3)

숲속에서 망자들이 소리를 질렀다.

키에에에엑. 꾸웨에에엑.

사람의 목소리도 짐승의 울부짖음도 아닌 괴성.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하던 숲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눈앞에 보이는 망자만 수십 구였다. 그렇다면 숲속의 어둠 너머에 망자가 더 있다는 뜻.

그 증거로 칠흑 같은 어둠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대며 마차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어둠 속을 살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다.

대충 봐도 수백이 넘는 숫자!

왕이삼은 도검삼림의 위기에서 목숨을 구해 살아난 경험이 몇 번 있었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기 어려운 백병전에서 밤낮을 싸우다 보면 어느 순간 한 쪽 숫자가 무너지게 마련이다.

팽팽하던 싸움도 한 번 쪽수가 밀리면 저울추가 급격히 기운다. 그때까지 버티면 살아남는 것.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것은 산 사람이 아니라 망자들.

망자는 목을 베어도 팔다리를 잘라도 쉽게 죽지 않고 덤벼든다. 망자 하나를 완전히 쓰러뜨리려면 세 명이 달려들어서 도검을 난도질해야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몰려드는 망자들은 족히 수백 구를 넘었으니…….

‘여기서 죽는구나.’

왕이삼은 박도를 움켜쥐며 생각했다.

그때였다. 서백이 왕이삼을 향해 손가락 세 개를 활짝 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왕이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망자를 피하는 세 가지 방법.

호흡, 피, 표정.

서백을 보자 어느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미 호흡을 멈추기 시작한 것.

‘이럴 때가 아니다.’

흐읍! 왕이삼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멈췄다.

터벅 터벅 터벅.

수백이 넘는 망자떼가 서백과 왕이삼을 향해 몰려왔다.

왕이삼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으나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막기 힘들었다.

곧이어 망자들이 하나둘 숲에서 걸어 나왔다. 숲속에 난 좁은 길은 금세 망자들로 가득 찼다.

왕이삼도 무림인인 이상 숨을 참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반면 표정 변화를 없앤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고개와 두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걷던 망자들이 서서히 얼굴을 치켜들었다. 썩어서 부패한 시체들의 몰골이 눈앞에 드러났다.

푸르딩딩하게 불어터진 얼굴.

눈알이 통째로 사라져서 뻥 뚫린 구멍.

그 구멍과 활짝 벌린 입에서 촉수를 꿈틀거리는 혈선충.

쐐애애액.

망자 하나가 왕이삼의 코앞에서 냄새를 맡았다.

킁킁킁.

턱뼈가 빠지도록 입을 크게 벌린 채 군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

오랜 가뭄으로 물을 못 마신 들개가 저렇게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린다. 갈증을 느끼는 것이다.

단지 들개는 물을 마시길 원하지만 망자는 산 사람의 피를 마시려는 게 다를 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한 망자가 얼굴을 바싹 들이대자 왕이삼은 구토가 나왔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억지로 참았다.

왕이삼이 끝까지 무표정을 유지하자 다행스럽게도 망자들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에에에엑.

망자들은 서백과 왕이삼을 놔두고 마차 뒤쪽으로 걸어갔다. 먼저 망자에게 물어뜯긴 장우명이 쓰러져 있는 곳이었다.

피 냄새를 맡은 것이리라.

왕이삼은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서백 녀석 얘기가 맞았다!’

망자를 피하는 세 가지 방법.

서백이 당부한 말은 사실이었다. 망자는 서백과 왕이삼을 코앞에 두고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망자에게 물어뜯겨서 피를 흘리고 있는 장우명이 다른 망자들의 시선을 끌어 주는 미끼가 되어 주고 있었다.

망자들이 장우명 쪽으로 움직이자 서백과 왕이삼은 자연히 망자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왕이삼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안도했다.

‘살았다.’

그때 서백과 시선이 마주쳤다.

서백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표정.’

‘……!’

흠칫 놀란 왕이삼은 바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살았다고 생각한 찰나 무심결에 안도하는 표정을 지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이 왕이삼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망자는 없었다.

망자들은 아직 숨줄이 붙어 있는 장우명에게 달려들어서 뜯어먹기 시작했다.

꾸웨에에엑. 철퍽철퍽철퍽.

“아아아악… 으아악…….”

산 채로 망자들에게 잡아먹히는 장우명을 보자 왕이삼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방금 장우명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나섰을 때 서백이 막지 않았더라면 자신마저 잡아먹혔을 터.

서백은 냉담한 눈빛으로 장우명의 최후를 지켜봤다.

‘죽으면서 미끼는 되어 주는군.’

멍청한 파락호에게 빌어 줄 명복의 말 따위는 없었다.

‘당신의 자만심이 스스로를 죽였다.’

서백은 휙 몸을 돌린 뒤 왕이삼에게 검지를 눕혀서 앞을 가리켰다. 둘은 눈빛으로 대화했다.

‘가시죠?’

‘괜찮을까?’

서백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이삼도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각자 마차의 당나귀 고삐를 쥐고 걷기 시작했다.

숲에서 나온 망자가 어찌나 많은지 아직도 길에는 망자들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망자들은 호흡을 멈추고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서백과 왕이삼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망자들은 마차를 지나쳐서 장우명 쪽으로 몰려갔다.

곧이어 서백과 왕이삼은 망자떼 속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둘은 한 걸음 한 걸음 망자판에서 벗어났다.

잠시 후. 망자들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서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안전합니다.”

“푸하! 하아하아하아…….”

왕이삼은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몰아쉬었다.

그런데 서백은 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조용히 숨을 쉬는 게 아닌가?

서백과 꽤 친해진 왕이삼도 이때만큼은 소름이 돋았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군.’

중원 무림은 은거 고수가 즐비한 곳이다. 또한 언제 어떤 명문정파에서 신진 고수가 출현할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서백의 무공 수위와 냉철한 판단력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망자 창궐만 아니라면 중원 무림이 저 녀석의 강호출행에 한바탕 난리가 날 텐데.’

왕이삼은 새삼 아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또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웅은 난세에 나오는 법이니까.

“고맙네. 자네 덕분에 살았군.”

왕이삼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 빚은 절대 잊지 않겠네.”

“선배님답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얼음장처럼 냉담하던 서백은 한두 마디 농담도 던지던 원래 서백으로 돌아와 있었다.

“빚은 저도 졌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뭐? 무슨 빚?”

왕이삼은 서백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궁금했다.

“장우명을 촉도관에 무사히 데려가서 은원보 두 개를 벌겠다는 게 선배님 계획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망자떼에게 장우명을 던져 준 셈이니, 선배님한테 은원보 두 개를 빚진 셈이죠.”

망자판에서 탈출하느라 잔뜩 굳어 있던 왕이삼은 그 말을 듣자 긴장이 풀려서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그걸 미처 몰랐군.”

“대신 사천당문의 마차 한 대를 얻었으니 각자 은원보 두 개를 챙길 수 있게 됐습니다. 이걸로 퉁치는 게 어떻습니까?”

“좋다! 파락호 놈보다 당나귀를 끌고 가는 게 훨씬 쉬우니 잘됐군.”

서백과 왕이삼은 서로를 보며 씨익 웃었다.

둘은 마차 한 대씩을 몰고 다시 어두운 숲길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칠흑 같은 암흑 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어두운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밤이 끝나고 새벽이 된 것이었다.

왕이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해가 뜨니까 살 만하군.”

“아직 두 밤은 더 가야 합니다.”

“그러게. 고생길이 환하군.”

서백은 등에 멘 혁낭에서 물통을 꺼냈다. 사슴의 위장에다 가죽을 기워서 만든 것으로, 이 물통에 물을 담아 놓으면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물통을 기울여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고 단 물을 삼키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물 좀 드시겠습니까?”

“좋지.”

서백이 물통을 건네자 왕이삼도 시원하게 들이켰다.

“물맛 한번 시원하다! 이제야 살 것 같군.”

서백이 혁낭에서 큼지막한 육포 두 조각을 꺼낸 뒤 왕이삼에게 하나를 건넸다.

“이건 또 뭔가?”

“사슴고기를 훈제해서 말린 육포입니다. 드시죠.”

“허어, 단단히 준비를 했군.”

“중원은 넓으니까요.”

둘은 사슴고기 육포를 입에 넣고 씹었다.

육포는 처음에는 딱딱하고 거칠었지만 한참을 씹자 부드러워지면서 고기맛이 진하게 났다. 말리기 전에 상하지 않도록 뿌린 굵은 소금이 입속에서 짭짤하게 돌았다.

둘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길을 갔다.

그런데 왕이삼도 자기 혁낭에서 작은 물통을 꺼냈다.

“아껴둔 건데 아무래도 안 되겠군.”

그가 수통을 들어 한 모금을 들이켰다.

“크으, 이 맛이지!”

“설마 물통에 든 게 술입니까?”

“왜 아니겠나.”

“기가 막히는군요. 물통에 물이 아니라 술을 넣고 다니시니 주통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서백이 혀를 차자 왕이삼이 반문했다.

“허어, 술도 물일세. 목이 탈 때 마시면 갈증을 덜어 주니까.”

“생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군요.”

“그뿐인가? 술은 상처에 뿌리면 소독이 되니까 비상약으로도 쓸 수 있지.”

“선배나 위장을 많이 소독하시죠. 저는 금창약이 있으니 사양하겠습니다.”

“자네가 부족한 게 그거야. 세상을 오래 살아야 술의 진가를 아는 법.”

“술이 꽤 독주인가 봅니다. 한 모금 마시더니 술술 말이 나오시는군요.”

“독할수록 진짜배기 술이지. 이백도 독주를 마실수록 시를 술술 읊었다고 하지 않는가.”

왕이삼은 이백을 언급하더니 술기운이 올랐는지 시를 읊기 시작했다.

“꽃 속에 술단지 마주 놓고, 짝 없이 혼자 술잔 드네.”

그러자 뜻밖에도 서백이 다음 수를 바로 따라 읊는 것이었다.

“밝은 달님 잔 속에 맞이하니,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어라.”

왕이삼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아는가?”

“네. 달이 밝은 밤이면 스승님이 사모님께 읊어드리던 시입니다. 사모님이 이백의 시를 좋아하셨죠.”

“이백의 월하독작을 즐겨 읊으셨다니 좋은 스승과 사모로군! 잠깐.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이…….”

“네, 같습니다. 이백(李白)과 서백(西白).”

“대시인과 이름이 같다니, 중원 무림에 한 획을 그을 이름이군! 좋은 이름이야!”

“실은 서백이란 이름은 사모님이 지어준 것입니다.”

서백답지 않게 목소리에 어딘가 짙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술기운이 돈 왕이삼은 눈치채지 못하고 시끄럽게 시를 읊었다.

서백은 처음 석가장에 왔을 때를 생각했다. 사모님이 이름을 지어 주시던 때를.

-서쪽에서 왔으니 성은 서(西)로 하렴.

-부모를 모르니 이름은 백(白)으로 하고.

-서백(西白). 어때, 마음에 드니?

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사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 시인 이백과 같다는 것을.

어쩌면 사모님은 이백을 생각하며 서백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닐까?

서백은 그게 못내 궁금했다. 그러나 물어볼 사모님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

“똑똑히 기억하게! 술이 최고의 시인을 만들었듯이, 최고의 무사가 되기 위해서는 술맛을 알아야 된다는 것을!”

“명심하겠습니다.”

“자고로 술이란…….”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지축을 흔들며 지나갔다.

마차가 요란하게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굉음이 어찌나 큰지 귀가 멍하고 골이 흔들려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폭발이 일어났군요.”

“폭발?”

왕이삼이 영문을 몰라서 멍하니 중얼거릴 때, 서백은 뒤로 고개를 돌려 마차를 봤다.

‘사천당문… 그랬었군!’

서백은 마차에 실린 물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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