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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4화 (4/123)

4화 강호출행(3)

서백의 말에 의혈방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망자를 색출해서 나오는 대로 목을 벨 것이다.

그 말에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망자로 감염된 채 숨어 있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서백의 통보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망자 확인이 끝나기 전까지 아무도 관가를 나가지 마십시오. 만약 나가는 자가 있다면 망자인 것으로 간주하고 경고 없이 목을 베겠습니다.”

“……!”

서백의 비정한 말에 방도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약관도 안 돼 보이는 소년.

하지만 의혈방도 중 누구 하나 서백의 말을 반박하며 나서지 못했다. 서백의 검법이 어느 정도인지 눈앞에서 목격했으니까.

결국 방도들은 쭈뼛거리며 길게 줄을 섰다.

그 뒤로 마을 사람들도 확인을 받기 위해 줄을 이었다.

진석평에게 시달렸던 마을 사람들은 재차 검사를 받자니 피곤이 몰려왔다. 그런데 몸은 피곤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벼웠다.

관리와 군사들이 사라진 틈을 타서 마을의 주인 행세를 하던 의혈방.

뻔뻔하게 재물을 빼앗던 그들이 갑자기 나타난 소년에게 꼼짝 못 하는 꼴을 보자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통쾌했던 것이다.

망자 확인은 생각보다 금세 끝났다.

진석평처럼 재물을 걷는다며 사람들을 윽박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망자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망자 확인이 끝나자 서백이 말했다.

“진석평이 한중으로 갈 계획이었으니 우리는 운남 쪽으로 갑시다.”

그 말에 사람들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서 한중은 북쪽, 운남은 남쪽에 있다. 한중은 망자가 창궐했으니 반대편으로 가는 게 안전하리라.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출발합시다.”

이제 서백이 말을 꺼내면 모두가 따랐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의혈방도들까지.

방도들은 방주가 죽은 이상 망자떼를 피해서 목숨부터 구하자고 생각했다.

의혈방에서는 진석평이 최고 고수였는데, 그 진석평을 서백은 일검에 베어 버렸다. 그러니 방도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서백에게 반발하지 못했다.

일이백 명 되는 피난 행렬을 이끄는 자가 약관도 안 된 소년.

앞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들으면 헛소리 집어치우라며 웃어넘길 일이었다.

* * *

마을을 떠난 지 삼일 후.

피난 행렬은 강주란 마을에 도착했다.

강주는 사람들이 이미 피난 간 뒤라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북쪽에서 망자떼가 내려온다는 소문이 일찍 알려진 것 같았다.

잠시 쉬는 동안 서백은 생각했다.

‘피난 행렬과 함께하는 것은 여기까지겠군.’

중원으로 가려면 이쯤에서 동쪽으로 향해야 했다.

서백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의혈방이 걷은 재물을 돌려준 뒤 말했다.

“망자 창궐은 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압니다. 중원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안전할 겁니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출발하십시오.”

그 말에 사람들은 안도하며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의혈방도들이었다.

방주가 죽자 구심점이 사라져서 한데 뭉치지 못하고 있으나 언제 다시 이빨을 드러낼지 모르는 일.

서백은 그들이 딴 생각을 못하도록 엄포를 놓았다.

“피난 중에 재물을 빼앗는 자가 있으면 훗날 석가장이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묻겠습니다.”

의혈방도들은 서백의 말을 듣자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피했다.

실은 서백의 말은 허세였다. 망자떼가 몰려온 바람에 석가장은 사라져서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백은 오히려 그 점을 노렸다.

정체불명의 존재가 주는 압박감.

언제 어떻게 보복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재차 사람들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의혈방도들을 억누를 것이다.

마을 사람들 중 흰 수염이 가득한 노인이 서백에게 말을 걸었다.

“운남에 내 일가친척이 있네. 같이 가지 않겠나?”

“저는 따로 갈 곳이 있습니다.”

서백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쉽군. 가려는 곳이 어디인가?”

“소림사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다.

소림사가 있는 하남 지역은 중원의 한복판이다.

망자가 창궐한 수도와 지척인 곳, 하남.

그런데 거기로 가겠다고? 제 발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말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천운을 빌겠네…….”

서백의 말에 기가 질렸는지 노인은 더 이상 동행을 권하지 않았다.

다음날. 사람들은 서백에게 고개를 숙여서 감사를 표한 뒤 길을 떠났다. 의혈방도 사기가 꺾인 얼굴로 몇몇씩 패를 지어서 흩어졌다.

서백도 길을 떠날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중원으로 나간다고?”

고개를 돌리자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인이었다.

“나는 왕이삼이라고 하네. 발 가는 대로 떠돌고 있지.”

“서백이라고 합니다.”

둘은 통성명을 했다.

사실 제대로 인사만 나누지 않았을 뿐, 며칠 간 이동하는 중에 서백은 왕이삼과 몇 번씩 눈길을 마주쳐서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무엇입니까?”

“중원으로 나갈 거면 겹겹이 쌓인 첩첩산중을 넘어야 하지. 혼자 갈 셈인가?”

“일행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니 할 수 없지요.”

“나랑 동행하는 건 어떤가?”

“좋습니다.”

서백이 주저 없이 수락하자 왕이삼은 오히려 말문이 막혀서 헛웃음을 지었다.

“얘기도 안 들어 보고 결정하는 건가? 내가 누군지 알고?”

“도검수 일을 오래 하셨으니 무림 일에 해박하시리라 생각해서 결정했습니다.”

그 말에 왕이삼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내가 도검수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등에 멘 박도를 보고 알았습니다. 검자루가 낡고 잔뜩 손때가 묻어 있더군요.”

“아니, 박도가 낡은 것이랑 도검수가 무슨 상관인가?”

“며칠 전 검을 손질하시는 걸 우연히 봤습니다. 천에 기름을 먹인 뒤 검날을 녹슬지 않도록 닦으셨죠. 검날은 서슬이 퍼렇게 날카로운데 검자루는 낡았다? 오랫동안 사용한 병기란 뜻이죠.”

“호오, 그래서?”

“실력은 있는데 소속된 문파가 없어서 떠돌아다닌다면 도검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와하하하! 그 말이 맞군!”

서백의 추측이 통렬하자 왕이삼은 멍하니 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뒤에 그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나이도 어린데 망자에 대한 지식도 그렇고 눈썰미 한 번 대단하군.”

그런데 왕이삼은 말을 꺼내자마자 아차 싶었다.

진석평을 벨 때 선보인 검법과 망자에 대한 지식 등, 서백은 무엇 하나 자신보다 나으면 나았지 뒤지는 게 없었다.

명문정파는 고지식할 만큼 배분을 따진다. 하지만 무림의 밑바닥에서 선배 대접을 받는 경우는 하나밖에 없다.

상대보다 실력이 뛰어날 것!

그런 판에 대뜸 나이 얘기를 꺼냈으니 행여 서백이 기분 상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뜻밖에도 서백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약관도 안 됐으니 왕이삼 선배님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

서백이 그렇게 말하자 왕이삼은 민망해져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그런데 나는 그냥 중원으로 나갈 생각이 아니네.”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말한 진짜 제안은 이걸세.”

왕이삼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는 사천당문의 일을 맡아서 한 밑천 챙길 생각이네. 같이 가지 않겠나?”

* * *

서백은 왕이삼의 설명을 들었다.

망자가 창궐하는 바람에 중원과 사천을 오가는 표국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사천당문이 급하게 물건을 옮길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사천당문은 방문을 내걸고 무림인을 모집했다.

예전 같으면 금세 인원이 모였겠지만 마을마다 피난 행렬이 줄을 잇는 탓에 소문은 더디게 퍼졌다.

사천을 떠돌아다니던 왕이삼의 귀에 마침 그 정보가 들어왔다.

얘기를 들은 서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천당문의 일을 해서 얻을 이득은?’

돈은 필요 없었다. 지금 중원은 은자가 있어도 원하는 걸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돈의 가치는 그만큼 떨어져 있었다.

음식도 충분했다. 겨울 동안 사냥한 사슴고기를 훈제해서 육포를 만들었으니까.

말은? 만약 말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물론 말 한 필로 가기에 하남은 너무 멀다.

하지만 평소에는 말을 끌고 걷다가 망자 창궐 지역을 돌파할 때만 탄다면 한 필로도 충분하리라.

문제는 의뢰인이 사천당문이라는 것.

서백은 스승이 강조하던 말이 기억났다.

-사천당문은 사특한 독사 같은 놈들이니 가까이 하지 마라.

동시에 스승은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독사를 길들일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사천당문의 일을 맡는다고 시간 낭비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중원으로 가려면 어차피 사천당문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을 통과해야 하니까.

최소한 말 한 필과 지도 등을 얻을 수 있는 기회.

서백은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선배님과 함께 사천당문의 일을 맡으러 가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서백은 왕이삼과 동행이 되어 사천당문을 향해 떠났다.

길을 가는 중에 왕이삼이 물었다.

“그런데 혹시 내가 의혈방 같은 녹림도면 어떡하려고 동행을 하는 건가?”

서백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망자만 아니면 됩니다.”

“…와하하하! 이거야말로 우문현답이군!”

왕이삼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목을 길게 빼보였다.

“봤지? 내 목에 검흔 따위는 없으니까 괜히 검으로 베지 말게.”

“검흔은 없지만 때가 끼었군요. 목간 좀 하셔야겠습니다.”

“허! 한 마디를 지지 않는군.”

나이가 서른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둘은 말싸움하듯이 대화하며 길을 떠났다.

* * *

이동 중에 망자떼와는 마주치지 않았다.

간혹 망자 하나둘이 길가를 떠돌아다니는 것은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서백과 왕이삼은 망자의 목을 벴다. 그리고 불태워서 마무리를 한 뒤 길을 떠났다.

며칠 후. 둘은 드디어 사천당문에 도착했다.

망자의 목을 베고도 무표정했던 서백조차 사천당문의 장원을 보고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대단한 곳이군요.”

“괜히 무림의 오대세가 중 하나겠는가.”

사천당문의 장원을 집이라고 한다면 석가장은 구석진 곳에 있는 골방에 불과했다.

우물 안 개구리는 평생 하늘이 둥글고 좁은 줄 안다. 서백은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 같았다고 느꼈다. 우물을 나와서 본 세상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고 거대했다.

장원 부지는 동서남북의 길이가 동일한 정사각형이었다.

장원의 담장이 얼마나 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대문까지 가는 데만 한참이 걸리리라.

특히 담장이 까마득하게 높았다.

서백은 눈대중으로 담장의 높이를 짐작했다.

‘이 장쯤 되겠군.’

이 장은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은 담장이었다. 일류 수준의 경공을 습득한 무림인이라면 쉽게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담장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것.

암기와 독공으로 악명 높은 사천당문의 장원.

어떤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을지 모르는데 무작정 사천당문의 담장을 넘을 간 큰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곧이어 장원의 대문에 도착했다. 대문은 이미 수많은 무림인들이 모여들어서 혼잡했다.

왕이삼이 그 광경을 보고 말했다.

“사천당문에 도착했으니 망자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여기라고 안전하다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서백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진석평은 망자에게 물리지 않고 망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목을 베고 혈선충을 심은 망자가 있다는 뜻이죠.”

“……!”

“어쩌면 저 무림인들 속에 그 망자가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놈이 살아 있는 한 사천에서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그렇군.”

왕이삼은 서백의 말을 들은 뒤 다시 무림인들을 보자 등골이 오싹했다. 저들 중에 망자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니……!

그때 사천당문의 총관이 무림인들을 향해 말했다.

“당문 일을 하러 온 자들은 모두 자격 시험을 받으시오!”

사천당문은 자격 심사를 통해서 일을 맡길 무림인을 선별하고 있었다.

서백과 왕이삼은 시험 신청을 하기 위해 장원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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