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강호출행(2)
진석평의 목에 새빨간 금이 그어졌다.
금은 점점 길게 이어지더니 목둘레를 빙 돌아서 연결됐다.
피슛.
새빨간 금의 틈새로 핏물이 새어나왔다.
곧이어 진석평의 목이 금을 따라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우뚱 하고 기울더니 땅으로 떨어졌다.
털퍽.
서백은 검을 비스듬히 든 채 태연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사람들은 경악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의혈방도는 눈앞에서 보고도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의혈방주이자 박도의 달인 진석평.
사십 중반의 나이지만 그의 박도술은 젊은 의혈방도도 쩔쩔맬 만큼 빠르고 거칠었다.
그 진석평이 약관도 안 된 소년의 검에 속절없이 목이 떨어질 줄이야…….
진석평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웅덩이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관가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에 휩싸였다.
방도 하나가 정신을 차리고 서백에게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감히 방주님을……!”
방도가 박도를 머리 위로 치켜드는 짧은 찰나, 서백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느리군.’
‘의혈방.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는 변방의 군소 방파.’
‘쾌(快)도 중(重)도 아닌 어설픈 도법. 아니,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이건 무공도 뭣도 아니다. 그저 살상력을 높이려고 묵직한 박도를 휘두르는 것일 뿐.’
방도의 박도술은 형편없었지만 서백은 방심하지 않았다.
스승이 입만 열면 강조하던 경고 때문이었다.
-적에게 아량을 베풀지 마라. 자신의 무공 수위를 숨기고 급습을 노리는 승냥이들이 지천에 깔린 게 중원이다.
휙.
서백은 검을 수평으로 들어 방도의 목을 겨냥했다.
그대로 달려들었다간 박도를 휘두르기 전에 자신의 목이 검끝에 꿰일 것이다.
스스로 자처한 죽음이니 아쉬울 것은 없을 터.
하늘이 도왔는지 방도는 마침 발을 헛디디며 볼썽사납게 땅에 뒹굴었다. 그 덕분에 자기 발로 검에 뛰어들어 죽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도는 자신의 천운을 깨닫지 못할 만큼 무공 수위가 보잘것없었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도 모르고 욕을 뱉으며 일어났다.
“이런 젠장!”
그러나 무모한 방도도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어느새 서백의 검끝이 방도의 목젖에 바싹 닿아 있었던 것이다.
“저놈을 잡아라!”
방도들이 박도를 들고 서백의 주위를 둘러쌌다.
하지만 방금 서백의 쾌검을 목격한 터라 방도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 하나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서백은 방도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방금 검으로 사람 목을 벤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서백의 눈빛은 무표정했다.
그건 약관도 안 된 소년의 눈빛이 아니었다.
피칠갑의 도검삼림에서 살아온 무림인의 눈빛!
변방의 녹림에 불과한 의혈방도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몸속에 깊이 새겨진 본능이 그들의 발을 붙들었다.
-지금 움직이면 죽는다!
맨 처음 달려들었던 방도가 그나마 용기가 있는지 침묵을 깨고 소리쳤다.
“네놈은 뭐냐? 왜 방주님을 해친 거지?”
“이자는 세 가지 이유로 죽어 마땅합니다.”
“뭐라고?”
“하나. 피난길을 연다는 핑계를 대며 마을 사람들의 재물을 갈취했습니다.”
방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변명할 말이 없었다. 방주가 명령했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의혈방도들 모두가 공범인 셈이니까.
“둘. 망자에게 물린 상처를 확인한다는 핑계를 대며 여인의 옷을 벗기고 음심을 채웠습니다.”
“…….”
방도들은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돌렸다.
서백의 말은 하나같이 앞뒤가 맞아서 도무지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이 서백의 말에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도적질을 일삼는 녹림의 무리. 지금까지 갖고 싶으면 빼앗고 여인을 보면 겁탈하고 반항하면 죽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먼저 나서는 자가 없는 것은 서백의 검법과 기세에 압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용기 있는 방도가 서백을 물고 늘어졌다.
“여기는 관가다! 우리 의혈방이 잘못이 있다면 법도로 풀어야지, 무작정 사람의 목을 베는 법이 어디 있냐?”
그 말에 다른 방도들도 맞장구를 쳤다.
“맞는 말이다!”
“죄를 알았으면 당장 무릎을 꿇어라!”
여기저기서 방도들의 항의가 들려왔다.
그러나 서백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셋. 이자가 죽어 마땅한 마지막 이유는.”
서백이 입을 열자 소란을 떨던 방도들의 목소리가 쥐 죽은 듯이 지워졌다. 마치 천둥벼락이 치자 빗소리가 묻히는 것처럼.
서백의 목소리는 분명 나지막한데 바로 옆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귓가에 똑똑히 들렸다.
“이자가 망자이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방도가 멍하니 있다가 곧 반박했다.
“무슨 헛소리냐? 방주님은 줄곧 우리랑 함께 다녔는데…….”
“두 눈이 있으면 보십시오.”
서백이 검을 들어서 땅에 떨어진 진석평의 목을 반 바퀴 굴렸다.
그러자 목이 잘린 단면에서 무언가가 시뻘건 핏물을 뒤집어쓴 채 꿈틀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어발처럼 꿈틀대는 것은 수십 개의 촉수다발이었다.
“으아아악!”
방도가 경악해서 뒷걸음질 치다가 뒤로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진석평의 잘린 목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짐승이 울부짖는 굉음을 토했다.
꾸웨에에엑!
이어서 진석평의 입과 두 귓구멍에서도 기다란 촉수다발이 뿜어져 나와서 좌우로 꿈틀거렸다.
쐐애애애액!
망자다! 누군가가 소리치자 사람들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네, 망자입니다.”
서백이 검으로 촉수다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혈선충이라고 합니다. 망자에게 물려서 감염되는 이유가 저것 때문입니다. 상처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온 혈선충이 뇌를 파먹고, 산 사람을 망자로 만드는 겁니다.”
서백의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망자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셀 수 없었다.
하지만 직접 망자를 봤다는 사람은 드물었다. 망자를 봤거나 창궐한 지역에 있던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특히 망자의 몸속에 혈선충이라는 게 있으며, 그 혈선충이 산 사람의 몸속을 파고들어서 감염시킨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서백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땅에 주저앉은 방도에게 물었다.
“며칠 전에 의혈방이 면양을 지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 그건 왜?”
“알다시피 면양은 이미 망자가 창궐했습니다. 이자는 면양에서 망자에게 감염되었을 겁니다.”
“그럴 리가 없어! 방주님은 며칠 동안 멀쩡했다고! 아무도 물어뜯지 않았단 말이다!”
방도가 반쯤 정신이 나가서 소리쳤지만 서백은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했다.
“망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 사람만 보면 무작정 달려들어 물어뜯는 혈귀(血鬼).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는 망자는 바로 혈귀입니다.”
말을 하면서 서백은 품에서 굵은 대나무통을 꺼냈다.
“둘, 평소에는 산 사람인 척 가장하다가 기회를 틈타 혈선충을 감염시키는 망자. 이게 진짜 망자입니다. 의혈방주였던 이자처럼.”
“……!”
“두 번째 망자는 겉으로 봐서 산 사람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며칠간 함께 있었다니 잘 아시겠죠.”
그 말에 의혈방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방주가 얼마든지 자신들을 망자로 감염시킬 수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망자가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누군가가 끼어들어서 물었다.
“네 말대로 의혈방주는 겉으로 봐서는 산 사람이었다. 그런데 너는 그가 망자인 걸 어떻게 알았지?”
의문을 제시한 자는 도검수 왕이삼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럴싸한 질문이었다.
“이자의 목에 빙 둘러서 검흔이 있었습니다.”
“검흔? 목은 지금 네가 벤 게 아니냐?”
“아니, 이미 목을 한 번 베어 낸 흔적이 있습니다.”
서백이 검을 들어 재차 진석평의 목을 굴렸다.
사람들은 고개를 길게 빼고 진석평의 목을 살폈다.
사실이었다. 잘린 목의 단면 위쪽에 희미하지만 붉은 선을 그은 것처럼 길게 검흔이 나 있었다.
“혈선충은 상처를 통해서만 감염되는 게 아닙니다. 망자가 산 사람의 목을 벤 뒤 직접 혈선충을 넣기도 합니다.”
헉! 서백의 말이 끔찍했는지 누군가가 숨을 삼켰다.
서백은 검으로 진석평이 목에 두르고 있던 두터운 천을 가리켰다.
“더운 날씨도 아닌데 이자가 목에 천을 두른 것을 보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천이 목에서 벗겨지자 검흔이 있는 것을 보고 망자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말에 방도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방주님이 언제부터 목에 천을 둘렀지?”
“면양을 지나온 뒤부터잖아!”
“그럼 그게 망자로 감염된 걸 숨기려고…….”
사람들은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서백의 말은 하나같이 정확해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마치 송나라 때의 명판관 포청천을 보는 것 같았다. 기괴한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할 때마다 포청천이 내린 판결이 이와 같았으리라.
서백이 방도에게 물었다.
“의혈방은 피난 행렬을 이끌고 어디로 갈 계획이었습니까?”
“광원을 거쳐서 한중으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제가 그쪽에서 왔는데 이미 망자가 창궐했습니다.”
“……!”
“최대한 사람을 많이 모아서 한중으로 갈 생각이었군요. 그래서 며칠 동안 망자인 걸 숨긴 겁니다.”
의혈방도들은 재차 소름이 돋았다.
방주가 욕심이 크지 않았다면 자신들은 이미 망자가 됐을지 모른다는 말이 아닌가?
그때 방도 하나가 검지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 저거… 저것 좀…….”
사람들은 그의 검지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경악했다.
진석평의 목에서 나온 촉수다발이 문어발처럼 움직여서 땅을 기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쐐애애액… 쐐애애액…….
어느새 진석평의 목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몸통까지 이동해 있었다.
혈선충 다발이 문어발처럼 진석평의 다리를 휘감으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망자는 혈선충의 심맥을 가르지 않는 이상 죽지 않습니다.”
퐁. 서백이 대나무통 마개를 열었다.
“목을 베어도 다시 몸통에 붙이면 혈선충이 목을 이어 붙여서 되살아납니다.”
평소 들었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
그러나 서백의 말대로 진석평의 목은 다리를 다 올라간 뒤 몸통을 타고 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혈선충의 심맥을 파괴하지 못해도 망자를 죽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촤아악. 서백이 대나무통을 휘둘러서 기름을 진석평의 목과 몸통에 뿌렸다.
“태워 버리면 그만입니다.”
이어서 품에서 꺼낸 화섭자를 대고 불었다.
훅. 화르르르.
진석평의 목과 몸통이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꾸웨에에엑!
망자가 찢어져라 입을 벌리고 비명을 토했다.
죽었다가 되살아난 망자도 화마(火魔)를 당해내지는 못했다. 얼마 안 있어 망자의 비명은 사그라들었고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망자의 목과 몸통이 숯덩이로 변해 가자 사람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서백이 진석평의 목을 베고 불태운 것은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안 되는 잠시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옥 구경을 하고 돌아온 것처럼 등골이 오싹했다.
그런데 서백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이자가 하던 망자 색출은 눈속임이었을 겁니다. 자기 자신이 망자였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방도가 묻자 서백이 대답했다.
“지금부터 망자 색출을 하겠습니다. 모두 일렬로 서서 제게 목을 보여 주십시오.”
“목을 보여 달라고?”
“네.”
서백이 예의 무표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목에 검흔이 있는 자는 바로 목을 베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