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강호출행(1)
석가장을 떠난 지 오 일째 되는 날, 서백은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동안 길을 오면서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간혹 인가를 발견해도 사람은 없었다.
집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망자떼를 피해서.
마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이 다닌 지 오래되었는지 길에 흙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길 양옆에 집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귀신이 나올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마을 중앙에 난 길을 따라가자 관가가 나왔다.
황제의 임명을 받은 관리가 세금을 걷고 치안을 안정시키는 관가.
그러나 관가 주위에 경비 서는 군사가 한 명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대문마저 박살난 채 활짝 열려 있었다.
망자떼가 마을로 접근한다는 소문이 퍼진 것일까?
소문이 진짜든 거짓이든 상관없었다. 한번 소문이 돌면 사람들은 물론 관리까지 겁을 집어먹고 야반도주를 한다.
이것이 중원의 현실.
그런데 대문 안쪽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서백은 대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두 무리였다. 허리에 도검을 차거나 장창을 든 무림인 십여 명. 나머지는 무공을 할 줄 모르는 보통 사람들.
무림인들은 관가 본관 앞에서 둥글게 진을 치고 있었다. 자신들이 텅 빈 관가의 새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은 의혈방이라는 흑도 방파였다.
말이 좋아서 방파지, 망자가 창궐하기 전에는 도적질로 먹고사는 녹림이었다. 그런데 관리와 군사들이 뺑소니를 치자 산에서 내려와 마을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은 의혈방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반항하면 목이 떨어질 테니까.
의혈방의 방주는 진석평이란 자였다. 그는 박도의 달인으로, 얼굴에 비스듬하게 검상이 나서 흉포한 인상을 주었다.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진석평이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망자한테 감염된 자를 색출해야 되니 빨리 줄을 서라!”
진석평이 윽박지르자 사람들이 그의 앞에 일렬로 줄을 섰다.
망자에게 물려서 상처가 생기면 감염된다. 감염된 자는 망자로 변해서 사람들을 공격한다. 즉 망자는 한 번 생기면 겉잡을 수 없이 번진다.
현재 중원은 안전한 곳이 없었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피난 가려면 무림인의 힘을 빌리는 것이 필수 조건.
소수 인원이라면 몸을 숨기고 망자 창궐 지역을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다. 하지만 그것도 경공이 뛰어난 무림인의 경우일 뿐.
평생 검 한 번 안 휘둘러 본 사람들이 망자떼와 마주친다면 무슨 수로 상대한다는 말인가?
결국 사람들은 의혈방이 피난길을 열어 주기를 바라며 진석평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들이 녹림이라 할지라도…….
서백은 관가 상황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석가장에서 중원으로 가려면 한중을 넘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한중 쪽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망자가 창궐했을 터였다. 석가장에 들이닥친 망자떼가 거기서 왔으니까.
그렇다면 사천을 거쳐서 빙 돌아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천에서 중원으로 가려면 겹겹이 쌓인 산맥을 넘어야 한다. 수십 일이 넘는 긴 여정이 되리라. 혼자서 가기는 무리였다.
‘여기서부터 사람들과 동행하자.’
서백은 옆에 있던 의혈방 방도에게 말을 걸었다.
“줄을 서면 함께 길을 갈 수 있습니까?”
“그래. 망자밥이 되기 싫으면 우리 의혈방을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갈 길이 머니 그래야겠습니다.”
“어디서 온 거냐?”
“하산한 뒤 면양을 거쳐서 왔습니다.”
면양은 마을에서 북쪽으로 가면 나오는 제법 큰 도시였다.
“면양? 너 혼자서 면양을 지나왔다고?”
“네.”
잠깐 어리둥절하던 방도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웃기지 마라! 며칠 전에 면양을 지나왔는데 망자판이 돼 있었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딴 마을을 착각한 거겠지.”
그런데 방도가 비웃는데도 서백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망자판이 된 지 오래라 산 사람이 없더군요.”
“…….”
서백이 태연하게 받아치자 머쓱해진 쪽은 방도였다. 그는 삐뚜름한 시선으로 서백을 위아래로 훑어 봤다.
나이는 열여섯쯤 되었을까.
약관도 안 돼 보이는 소년은 먼 길을 왔는지 행색이 보잘것없었다.
그런데 소년의 복장이 괴상했다.
“손목과 발목에 그건 뭐냐?”
“짐승 가죽으로 만든 토시와 각반입니다.”
“토시와 각반? 그런 걸 덧대봤자 추운 건 똑같은데 뭐 하러…….”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방도는 서백의 등을 보고 말을 삼켰다. 처음엔 너무 커서 몰라봤지만 서백이 등에 멘 것은 분명 검이었다.
검신과 검자루를 합쳐서, 족히 칠 척은 되어 보이는 검.
특히 검날의 폭이 어른 손바닥보다 넓었다.
날카로운 검끝과 양날만 제외한다면 말을 벨 때 쓰는 참마도로 착각할 만한 대검이었다.
“등에 멘 거 네 검 아니지?”
“제 검입니다.”
“웃기고 있네. 그 검이 네 거면 내 검은 무신 관우의 칠십이근 청룡언월도다!”
방도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서백이 망자가 창궐한 틈을 타서 검을 훔친 것으로 생각했다.
“방주님한테 그 검을 드리면서 간청해라. 피난 행렬에 끼워 주실 거다.”
그 말에 서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물을 모으고 있군.’
서백의 짐작이 옳았다.
의혈방은 피난길을 열어 준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에게 금품과 쇠붙이를 걷고 있었다. 지금까지 마을 세 곳을 돌았는데 수입이 제법 짭짤했다.
“이 검은 스승님께 받은 거라서 안 됩니다.”
“아, 그러셔?”
방도가 콧방귀를 뀌었다.
“다들 그랬지.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입니다, 아끼는 애병이라서 드릴 수 없습니다, 등등. 근데 어쨌는지 아냐? 결국 방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했지. 피난민 행렬에 끼워 주면 뭐든지 바치겠다면서 말야.”
“그렇군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자 서백은 몸을 돌린 뒤 성큼성큼 걸어서 줄의 맨 끝으로 갔다.
방도가 동료들에게 고갯짓으로 서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들었냐? 스승한테 받은 검이란다.”
“하여간에 무림 놈들. 녹이면 다 똑같은 쇳물인데 끔찍이도 아낀다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나이도 어린데 망자 때문에 맛이 간 거 보면 모르냐? 한기를 막으려고 손목 발목에 가죽을 둘렀댄다!”
“하하하하!”
의혈방 패거리는 오랜만에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중에 웃음기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서백을 보는 자가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인의 이름은 왕이삼.
그는 의혈방도 마을 사람도 아니었다.
며칠 전 우연히 마을을 들렀다가 막 떠나려던 참에 의혈방이 들이닥쳤을 뿐.
왕이삼은 돈을 받고 무공을 빌려 주는 도검수였다.
소속 없이 떠돌아다니는 용병 신세인 도검수.
설상가상으로 망자가 창궐하는 바람에 그는 중원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그런 만큼 망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의혈방이 서백을 비웃을 때 왕이삼은 의혈방을 비웃었다.
‘저 소년이 정신이 나갔다고? 뭘 모르는 소리.’
손목과 발목은 망자에게 물리기 쉬운 곳이다.
망자는 목을 베어도 쉽게 죽지 않는다. 검을 휘둘러도 계속 달려드는 망자를 상대하다 보면 손목을 물어뜯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망자를 쓰러뜨렸다고 방심하다가 죽지 않고 기어온 망자에게 발목을 물리는 것을 왕이삼은 몇 번씩 봐 왔다.
‘저 피풍의는 철저한 망자 대비책이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이 망자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게다가 짙은 푸른색 피풍의는 목덜미에 짐승의 가죽이 덧대어져 있었다.
망자에게 가장 물리기 쉬운 곳, 바로 목!
망자떼를 상대할 때 특히 목을 조심해야 한다. 의혈방 방주 진석평도 두터운 천을 둘러서 목을 보호하고 있지 않은가.
‘상전을 보면 부하를 알 수 있다는데, 의혈방은 졸개들이 두목만 못하군.’
이 망자판에서 소년과 의혈방 중 어느 쪽이 오래 살아남을까?
‘돈을 걸라면 무조건 소년 쪽이지.’
왕이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그도 소년이 등에 멘 대검은 괴상해 보였다.
망자는 생각보다 빠르다. 무거운 대검을 휘두르다가는 망자떼에게 포위되기 딱 좋다.
‘차라리 검을 의혈방에게 내주고 행렬에 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쓰지도 못할 검보다는 목숨이 더 소중하지 않은가?
왕이삼은 소년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
한편, 서백은 줄에 서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진석평은 여전히 거만한 자세로 사람들을 윽박질렀다.
“다음 나와! 시간 없다!”
몸집이 비대하고 턱과 입꼬리에 길게 수염을 기른 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가 손에 든 주머니를 열자 안에 은자 스무 개가 있었다.
“이런 시국에 사람들을 돕다니 의혈방이야말로 진정한 협객이오. 얼마 안 되지만 이 은자를 써 주시오.”
은자 스무 개를 선뜻 내놓는 걸 보면 마을에서 제법 부자로 꼽히던 자 같았다.
그런데 진석평이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
“그 두 배를 주면 생각해 보지.”
“마흔 개 말이오?”
부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싫으면 관두고.”
“그렇게 많이는 없소.”
“없다고? 목숨보다 은자가 더 귀한가 보군.”
잠시 망설이던 부자가 곧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알았소. 마흔 개를 내겠소.”
“생각해 보니 마흔 개로는 안 되겠어. 여든 개를 내놓으면 행렬에 넣어 주겠다.”
“뭐라고? 방금 마흔 개라고 하지 않았소?”
“내 이럴 줄 알았지. 금세 마흔 개를 내놓겠다고 한 걸 보니 숨겨 둔 은자가 더 있을 줄 알았다. 백 개 정도 되려나?”
“……!”
진석평에게 정곡을 찔린 부자가 입을 딱 벌렸다.
“의혈방의 도움을 받고 싶으면 갖고 있는 은자를 모두 넘겨라.”
“그, 그렇게는…….”
“어차피 망자한테 물리면 은자 따위 아무 소용없잖아? 싫으면 관두라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묵하던 부자가 잠시 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다들 잘 봤겠지? 의혈방 앞에서 욕심을 부렸다간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진석평은 기세등등해서 소리쳤고 부자는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서백은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다음!”
이번에는 젊은 여인이 할머니를 부축하며 나왔다.
초라한 행색의 여인과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보자 진석평은 눈쌀을 찌푸렸다.
“너희는 뭘 넘길 거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저랑 할머니만 남았어요. 가진 건 없지만 제발…….”
“가진 게 없다고? 땡전 한 푼도?”
“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석평은 대놓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상처는 뭐지?”
진석평이 여인의 어깨에 있는 핏자국을 가리켰다. 여인은 어깨 말고도 몸 곳곳에 핏물이 묻어 있었다.
“망자를 피해서 도망치다가 언덕에서 구르는 바람에…….”
“망자에게 물린 상처는 아니고?”
“아닙니다! 망자에게 물린 적 없어요.”
진석평의 추궁에 여인이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그 말을 믿으라고? 옷을 벗어봐라.”
“네?”
“귓구멍이 막혔나? 옷을 벗어야 물린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거 아냐.”
“지금… 여기서요……?”
“그럼 망자에게 물렸을지 모르는데 끼워 달란 말이냐? 그러다 망자로 변하면 누가 책임질 건데?”
진석평의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냉혹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망자에게 물린 자를 받아주었다가 마을 사람들이 몽땅 감염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중원에 떠돌고 있었다.
여인은 주위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속곳은 봐줄 테니 입고 있어라, 흐흐흐.”
진석평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의혈방 무리도 킬킬거리며 여인의 몸을 구경했다.
눈처럼 흰 여인의 맨살이 드러났다. 곳곳에 핏자국이 있었지만 다행이 망자에게 물린 잇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멀쩡한 것 같군.”
“감사합니다…….”
“단 너만 허락한다. 할망구는 안 돼. 어차피 늙어서 죽을 날만 남은 것 같으니까.”
“그럴 수는 없어요!”
“듣기 싫다. 다음!”
진석평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여인이 진석평에게 달려들어서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진 것이다.
“방주님!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놔라, 이년아!”
진석평은 손을 휘둘러서 여인을 밀쳤다.
그런데 여인이 옷자락을 붙잡는 바람에 진석평의 상의가 찢어지고 목에 두르고 있던 천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년이……! 둘 다 쫓아내! 이년도 할망구도 몽땅!”
“존명!”
방도들이 나와서 울부짖는 여인과 할머니를 밖으로 끌어냈다.
진석평은 떨어진 천을 주워서 다시 목에 감더니 사나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했다.
서백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다음!”
서백 차례였다.
서백이 진석평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이 나오자 진석평은 의외였는지 위아래로 한 번 서백을 훑어 본 다음 말했다.
“너는 뭘 넘길 거냐?”
“뭐가 좋을 것 같습니까?”
서백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이상하게도 관가 구석구석까지 울려퍼졌다.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던 진석평은 서백이 등에 멘 검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호오, 그 검 네 거냐?”
“그렇습니다.”
“검을 넘기면 행렬에 받아주마.”
그런데 서백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뭐라고?”
“이 검은 스승님께 받은 겁니다. 남한테 줄 수 없습니다.”
“…….”
진석평은 뜻밖이었는지 멍하니 서백을 쳐다보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하! 스승이 준 검이라서 안 된단 말이지? 좋다. 망자판에서 혼자 뒹굴다 죽든 말든 알아서 해라, 하하하하!”
그런데 서백은 몸을 돌리지 않고 진석평이 웃음을 그칠 때까지 서 있었다.
“뭐냐? 볼일 다 봤으면 썩 꺼져!”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거참 귀찮게 하…….”
진석평은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팟. 휘이이잉.
한 줄기 섬광이 번쩍이더니 질풍이 휘몰아치며 사람들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은 곧 경악하고 말았다.
서백이 일검에 진석평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