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서(序)
숲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장각은 불안한 눈빛으로 좌우를 살피며 생각했다.
‘빌어먹을! 내 이럴 줄 알았지.’
소림사가 무사를 고용한다는 말을 듣고 생각 없이 덥석 나섰던 것이 실수였다.
소림사의 일이 요새 밖으로 나가야 하는 임무인 줄 알았다면 장각은 도검 하나 제대로 못 다루는 무지렁이 흉내를 냈을 것이다.
요새 밖은 망자가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애초에 소림사가 소속 문파 없는 무사를 고용한 것도 중원에 망자가 창궐해서 사람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소림사 같은 명문정파가 장각 같은 삼류무사를 거들떠볼 이유가 없었다.
죽마고우인 심평도 처음에는 소림사와 연줄이 생겼다며 좋아하다가 요새 밖을 정찰한다는 말을 듣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몇 년 전.
흑랑성에서 망자가 창궐하기 시작한 날.
무림맹의 일을 맡아서 흑랑성에 갔던 장각과 심평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망을 쳤다.
이후 망자라면 치를 떨었다. 흑랑성 방향으로는 소변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한밤중에 요새 밖으로 나가서 망자가 도사리고 있는 숲속을 정찰하게 될 줄이야…….
장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심평이 속삭이며 말했다.
“그거 아냐? 오늘 정찰, 매를 찾는 거란다.”
“매? 무슨 매?”
“매도 모르냐? 날아다니는 매 말야.”
“목숨 걸고 요새에서 나왔는데 한다는 일이 고작 매사냥이라고?”
“사냥이 아니라 전서응을 찾는 임무다, 전서응!”
장각은 그제야 심평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전서응.
먼 거리에 서찰을 보낼 때 쓰는 매.
전서응은 전서구보다 여러 면에서 유용하다.
먼 거리로 서찰을 보낼 때 비둘기인 전서구는 중간에서 몇 번씩 교체해야 하지만 매는 중원 대륙을 한 번에 횡단할 수 있었다.
또한 맹금류인 매는 중간에서 다른 짐승에게 잡혀서 죽을 가능성이 적었다.
반면 매는 육식을 해서 기르는 게 힘들다.
게다가 비둘기보다 귀소본능이 약하기 때문에 반드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전서응 한 마리를 기르려면 장각과 심평 같은 삼류무사의 몸값은 수십 명분을 합쳐도 모자랐다.
그런 전서응을 연락책으로 썼다는 것은?
“서찰 전달이 긴급하다는 뜻이군.”
“서찰에 적힌 내용도 중요하다는 뜻이지.”
불문인 소림사는 살생을 금해서 육식을 하는 매를 기를 수 없었다. 소림사의 전서응을 훈련시키는 곳은 소실봉 산자락 아래에 있는 마을에 있었다.
요새 밖을 정찰하는 이유가 매 한 마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자 장각과 심평은 입이 씁쓸했다.
“매 찾다가 사람 잡겠군.”
“내 말이.”
선두에 선 소림승이 둘의 대화를 들었는지 말했다.
“중요한 서찰을 지닌 전서응이오. 방장님께 반드시 전해드려야 하오.”
“우리도 반대하는 건 아니오. 단지 중요한 전서응을 찾는데 고작 세 명이 한 조라는 게 좀…….”
“십팔나한의 다른 사형사제는 모두 이미 맡은 임무가 있소.”
“뭐 그렇긴 하지만…….”
요새가 인원 부족에 시달리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장각과 심평은 더는 불평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소림승의 법명은 진연.
그는 소림사 신진고수들의 집합소라는 십팔나한 중의 한 명이었다.
진연은 새외에서 활약하다가 중원 무림이 위험에 처하자 소림사로 막 복귀한 참이었다. 삼류무사 장각과 심평이 감히 불만을 터뜨릴 상대가 아니었다.
어느새 숲이 끝나고 마을이 나왔다.
거리는 집집마다 불이 꺼져 있는 것도 모자라 오랫동안 인적이 없었는지 흙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장각은 등골이 오싹해져서 말했다.
“소름 끼치는 마을이군.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겠어.”
“누가 아니래냐.”
심평이 맞장구를 치더니 진연에게 물었다.
“스님, 이 마을에 정말 전서응이 있소?”
“그렇소. 전서응도 기르고 소림사의 잡일을 해 주던 마을이오.”
“하지만 사람도 없는 곳에 전서응이 돌아왔을 리가 없지 않소? 다른 곳으로 가 버렸겠지.”
“소림사의 전서응이오. 들짐승에 잡혀 먹힐지언정 자기 집을 놔두고 떠나지는 않소.”
“…….”
진연의 대답은 확고했다.
장각과 심평은 슬쩍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전서응을 찾기 전에 마을을 떠나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빨리 찾아서 떠납시다. 이거 원 불길해서.”
셋은 발소리를 죽이며 이동했다.
몇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하지만 횃불을 밝힐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망자가 반응해서 튀어나오면 낭패니까.
얼마나 마을 골목을 돌고 돌았을까.
마침내 진연은 전서응을 기르는 집을 찾아냈다.
“여기가 맞소?”
“그렇소.”
“혹시 망자가 있으면…….”
“그럼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몸을 사리는 장각과 심평을 놔두고 진연은 거침없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내공이 깊은 진연의 귀에 날짐승의 날개짓 소리가 들렸다.
푸르르륵.
진연은 소리가 난 창고의 문을 열었다.
창고 구석의 그늘진 곳에 커다란 매 한 마리가 날개를 모은 채 앉아 있었다.
진연이 다가가자 매는 날개짓을 했지만 날아오르지는 못했다. 피가 흥건한 걸로 보아 날개를 다친 것 같았다.
그래도 발목에는 서찰이 안전하게 묶여 있었다.
“장하구나.”
진연은 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품에 안고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자 진연을 기다리고 있던 장각과 심평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매를 찾았군.”
“갑시다.”
셋은 황급히 길을 되돌아갔다.
그런데 마을을 막 떠나려는 찰나, 선두에 선 진연이 발을 멈췄다.
“왜 그러시오?”
장각이 묻자 진연은 검지를 세워서 입에 댔다.
그런 다음 검지를 접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적이 나타났다는 수신호.
순간 어둠 속에서 망자 하나가 뛰쳐나와 진연에게 달려들었다.
진연은 왼손에 매를 안은 채 칠 척 길이의 봉을 오른손에 들고 빙그르 돌렸다.
살생을 금지하는 소림사는 도검 같은 날붙이 병장기를 쓰지 않고 주로 봉법을 수련한다.
그런데 지금 진연의 봉은 끝이 창처럼 날카롭게 깎여 있었다. 망자를 퇴치하기 위해서 소림 방장이 살계를 열도록 허락한 것이다.
퍽. 날카로운 봉 끝이 망자의 목을 관통했다.
소림 봉법의 전광석화 같은 수법.
그러나 봉에 목이 꿰인 망자는 죽지 않고 고개를 홱 치켜들며 괴성을 토했다.
키에에엑!
망자. 죽은 시체가 되살아난 것.
이미 한 번 죽은 시체가 목이 관통되었다고 해서 죽을 리 없었다.
“시작이군.”
장각이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진연이 소림 각법의 수법으로 망자의 배를 찼다.
뒤로 날아간 망자는 땅바닥을 뒹굴며 쓰러졌다.
그러나 잠깐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바로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셋을 향해 다가왔다.
저벅 저벅 저벅…….
장각과 심평은 주위를 돌아보다가 기겁하고 말았다.
망자들이 동서남북 네 방위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셋은 마을에 도사리고 있던 망자떼에게 어느새 포위된 것이었다.
“젠장할! 요새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닌데.”
“내 말이.”
장각과 심평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을 때.
진연은 재빨리 시선을 돌려 망자떼의 포위망에서 가장 숫자가 적은 곳을 찾았다.
돌파할 지점을 찾자 진연은 봉을 들어서 방향을 가리켰다.
“셋을 세면 이쪽으로 달리시오. 하나, 둘…….”
셋!
진연이 앞으로 뛰쳐나가자 장각과 심평도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퍼퍼퍽.
진연은 앞을 가로막는 망자들을 향해 무차별로 봉을 찔렀다. 마치 촉나라의 명장 조자룡이 헌 창을 휘두르는 것처럼.
“으아아아아!”
장각과 심평도 진연의 좌우에서 달리며 마구 박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목이 꿰이고 잘려도 망자들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몰려왔다.
망자들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셋을 물어뜯으려고 덤볐다. 그것도 모자라 팔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래도 미친 듯이 봉과 박도를 휘두르자 포위망이 무너졌다. 셋은 망자떼를 뚫고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헉헉, 망자 놈들 왜 저렇게 빠르지?”
“밤이 되면 더 빨라지는 거 몰랐냐? 헉헉.”
장각과 심평은 발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진연이 고개를 저으며 둘을 독려했다.
“지금 숨 돌릴 때가 아니오. 다시 포위되면 끝장이니까.”
그러더니 품에 안고 있던 매를 장각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매를 부탁하겠소.”
“왜 매를 우리한테…….”
장각은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그러자 진연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옷깃을 내렸다.
장각과 심평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진연의 목덜미가 망자한테 물어뜯겨서 살점이 뜯겨나가고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이 아닌가?
“보다시피 나는 망자에게 물렸소. 시간이 지나면 저들처럼 망자가 될 것이오.”
“스님…….”
십여 구의 망자들을 소림 봉법으로 쓰러뜨리며 돌파구를 열었던 진연.
몸을 돌보지 않은 진연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포위망을 뚫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장각과 심평은 미안한 마음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망자들을 막겠으니 이 매를 방장님께 전해 주시오.”
“맹세하오. 반드시 전하겠소.”
“그럼 가시오.”
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매를 건네받은 장각과 심평은 몸을 돌려서 달리기 시작했다.
진연은 봉을 든 채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망자떼가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엄숙한 표정이던 진연이 갑자기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소림 봉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척.
삼십 평생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고 수련한 봉법.
이제 그 진면목을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진연이 두 눈을 부릅뜨며 일갈했다.
“와라!”
* * *
한 시진 뒤, 숭산 소실봉에 위치한 소림사 방장실.
현재 방장실에는 소림사 방장인 무혜 대사와 무림명숙 몇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방장님, 전서응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자 소림승 진문이 품에 매를 안고 방장실로 들어왔다.
“진연 사제가 마을에서 전서응을 찾았습니다.”
“그럼 진연이 안 오고 왜 네가?”
“전서응을 무사들에게 건네고 진연은 그만…….”
진문이 말을 삼키자 방장 무혜가 길게 한숨을 쉬면서 ‘아미타불’을 읊조렸다.
그는 왼쪽 눈이 실명했는지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쪽 남은 오른 눈에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안광은 그의 내공이 절정의 경지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무혜는 진문에게서 매를 건네받은 뒤 발목에 묶인 서찰을 살폈다.
비바람에 젖거나 찢어지지 않도록 가죽을 둘러서 단단히 고정한 서찰.
그 질긴 가죽을 무혜는 검지와 엄지만 써서 찢어 버리고 안에 든 서찰을 꺼냈다.
무림명숙들이 서찰 내용이 궁금한지 다가왔다.
그중에 은사모를 쓴 젊은 서생이 있었다.
그는 제갈세가의 일공자 제갈성이었다. 그런데 오른쪽 소매가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른팔이 절단돼서 없는 것 같았다.
제갈성이 무혜에게 물었다.
“뭐라고 써 있습니까?”
“사천에 있는 석가장에서 망자 퇴치 비법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비법을 기록한 서책을 지닌 자가 지금 소림사로 오고 있습니다.”
무림명숙들이 깜짝 놀라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석가장이라면 설마…….”
“맞습니다. 중원 무림이 서장 구륜사에 대항하기 위해서 은밀히 준비했던 곳이지요.”
무혜가 명숙들을 지나치더니 방장실에 있는 창문을 활짝 열고 밖을 바라봤다.
중원 땅은 망자가 창궐했지만 새벽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저 하늘 너머, 사천 석가장에서 희망이 오고 있었다.
“그자가 올 때까지 소림사를 지킵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