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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경기를 생각하면 지나친 겸손이라고 많은 분들이 생각하실 거 같아요.”]
[“세상사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요.”]
도진의 말에 아나운서가 대본이 적힌 종이로 입을 가리고 꺄르르 웃었다.
-저게 웃긴 말인가? 내 주변 여자들은 저런 표정 절대 안 짓던데.
-웃긴 게 아니라 재밌는 거임. 얼굴이 재밌잖아.
-나도 얼굴은 재밌게 생겼는데.
-미소 짓게 만드는 거랑 실소 나오게 생긴 거랑은 다른 거야.
터진 웃음을 수습한 아나운서는 가벼운 스몰토크 이후 경기 내용에 대한 인터뷰로 넘어갔다.
[“오늘 경기에서 마법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을 많이 보여 주셨어요. 창술사인 헥스 선수를 상대로 적극적인 접근전을 펼치셨는데요. 정말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아무래도 도진 선수의 트레이드 마크. 고속 영창 덕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사실 고속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죠. 거의 시전 시간이 제로에 가깝게 보였으니까요. 그것도 C급 장비를 착용하신 상태에서 보여 준 모습이라 지켜보고 계셨던 분들의 놀라움이 더 크셨을 거 같아요.”]
빠른 템포로 흘러나오는 칭찬 세례에 도진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였다.
[“방금 경기와 지금 인터뷰를 보고 계신 수많은 마법사 유저분들이 정말 궁금한 부분일 질문을 좀 드릴게요. C급 장비 세팅으로 그런 속도의 마법 시전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음… 아무래도 기초가 탄탄해서겠죠? 주력 주문의 숙련도, 레벨, 스탯, 특성. 이런 기본적인 스펙이 높으면 장비 세팅이 조금 떨어져도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한 거죠. 물론 이런 게 다 갖춰진 상태에서 좋은 장비를 입으면 그만큼 시너지가 더 나지만요.”]
[“앗… 수능 만점자 인터뷰 같은 답변이네요. 많은 분들이 실망하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거 같아요.”]
[“어쩌겠어요. 옷걸이가 중요한 건 현실만이 아니거든요. 장비를 걸치는 건 결국 본체니까 본체 스펙 자체가 높아야죠. 옷이 날개라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옷걸이라고 하잖아요.”]
[“냉혹한 현실이네요…….”]
-하… 가상현실에서도 현실에서도 불량 옷걸이인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지?
-포기하면 편해.
-아니, 무슨 답변이 저래? 팁 공유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ㅉㅉ 결국 높은 스탯, 특별한 특성 얻는 방법은 입꾹닫이네. 이기적인 새끼.
-저 새끼는 뭐라는 거냐? 방법은 이미 옛날부터 공개하고 있었는데.
-무슨 방법?
-진이 쌓은 업적이 곧 진의 상태창이잖아. 도진 채널에 올라온 영상들만큼 개쩌는 업적을 잔뜩 세우면 언젠가 너희도 저렇게 될 수 있어.
-이게 맞는 말이지 ㅋㅋ 뚝딱 하고 갑자기 강해지는 팁이 어디 있음? 도진도 처음에는 우리랑 똑같은 상태창 가지고 시작한 유저였는데 스스로 저기까지 올라간 거잖아.
-유저 레벨은 계속 오르고, 특성도 더 많이 갖게 되겠지. 결국 누구나 도진만큼 강해질 거다. 하지만 우리가 그만큼 따라가면 도진은 그보다 더 앞서나가겠지.
첫 경기와 첫 승자 인터뷰가 끝이 났다.
이후 다음 경기가 진행됐다.
하지만 도진이 워낙 강렬한 충격을 선사한 탓에 다음 경기들은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참가자들의 뛰어난 실력과 화려한 장면에 감탄해야 할 1티어 그룹 경기인데, 시청자들 눈에는 전부 시시하게 느껴졌다.
2, 3티어 그룹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쪽은 참가한 방송인의 팬들이 응원을 보내는 정도의 관심에 그쳤다.
다만 4티어 그룹은 달랐다. 이쪽은 실력이 아닌 개그력으로 승부를 보는 그룹이었기에, 도진의 경기 이상의 충격을 사람들에게 선사했다.
-내가 뭘 본 거지?
-저 여자는 뭔데 자폭을 하는 거임?
그중 제일 큰 충격을 선사한 사람은 놀랍게도 도진과 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스트리머 ‘크아앙’.
과거 도진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그녀는 4티어 그룹 첫 번째 경기에서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 ‘자폭 마법’을 선보였다.
도진에게 배운 뒤로 몬스터를 상대로는 그럭저럭 게임을 즐길 정도는 된 그녀였으나 사람을 상대로 하는 PvP에서는 과도한 긴장으로 실수를 해 버린 것이었다.
-근데 왜 자폭한 쪽이 이긴 건데?
-시발 ㅋㅋ 캐스팅하다 자폭한 것도 레전든데 마법사 상대로 마방을 1도 안 챙겨서 자폭에 휘말려서 죽은 건 더 레전드네 ㅋㅋㅋ
-…놀랍게도 저 자폭 법사 도진 제자임.
-개소리하지 마.
-진짜임. 예전에 도진이랑 합방으로 이것저것 배우긴 했어 ㅋㅋ (도메인 링크)
그런데 놀랍게도 승자는 크아앙이었다.
자폭을 하긴 했어도 크아앙은 마법 방어력이 높은 데다 본인의 마법이 터진 거라 죽을 정도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반면 마법사를 상대로 마법 방어력을 전혀 챙기지 않고, 무지성으로 달려들던 상대는 크아앙의 자폭에 휘말려 폭사한 것.
이 장면은 순간적이나마 로트라넷 인기글 1위를 차지하며, 기존 1위를 지키고 있던 도진의 경기 영상을 밀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청출어람을 이런 식으로 이루어 낸 크아앙… 별로 자랑스럽진 않습니다.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스트리머…….
-도진이 올린 코리안 게이머의 위상을 크아앙이 다 깎아먹네;
이에 시청자들의 놀림을 견디다 못한 크아앙이 ‘이기면 잘한 거야!’라는 명언을 남기며 콜로세움 L의 첫날이 끝이 났다.
다음 날은 도진의 경기가 없었다. 하지만 도진과 동료로 유명한 탄토와 테레사의 경기가 있어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뜨거웠다.
[“지금은 도진 선수의 동료로 유명하지만, 탄토 선수는 예전부터 실력파 도적으로 유명했거든요! 경기 시작과 동시에 탄토 선수 은신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상대는 은신 감지에 뛰어난 레인저 클래스! 하비야 선수, 덫 작업에- 앗! 탄토 선수 시작부터 기습을 겁니다!”]
탄토의 상대는 같은 일본 국적의 활잡이였다.
[“어차피 들킬 거라면 은신 보너스를 살려 선공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보입니다! 거리를 벌리려는 하비야 선수. 이런 식의 이동기 교환은- 아앗! 탄토 선수, 하비야 선수의 이동 경로를 예측해 미리 단검을 던졌습니다! 그림처럼 꽂혔어요!”]
탄토는 별다른 고전 없이 상대를 제압했다.
하지만 테레사는 첫 번째로 만난 상대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역시 PvE랑 PvP는 다르구나.
-도진 파티 탱커가 겨우 이 정도? ㅋ 도진 파티 탱커가 겨우 이 정도? ㅋ 도진 파티 탱커가 겨우 이 정도? ㅋ 파티장 수준 알 만하죠?
-어휴, 위에 병신 같은 새끼들은 왜 사냐? 저 정도면 선방했구만.
-크라우스 상대로 저 정도 버틸 수 있는 탱커가 몇이나 될 거 같냐? 애초에 정령 기사가 근접 클래스 상대로 개사기잖아.
-근접 상대로? ㅋㅋ 크라우스는 그냥 대놓고 사기야. 사실상 도진만 없으면 강력한 우승 후보지.
-도진이 있든 없든 크라우스는 우승 후보야. 크라우스가 방송을 거의 안 해서 그렇지 예전부터 본 사람들은 앎. 이 새끼가 찐 사기라는 거.
테레사를 패배시킨 상대는 정령 기사 크라우스.
테레사와 20분을 싸우면서도 시종일관 몰아붙이며 유효타를 한 번도 허용치 않는 모습을 보인 그는 순식간에 안티 도진들의 희망으로 급부상했다.
-이제 믿을 건 크라우스뿐이다.
-도진이 대단한 거 인정 ㅇㅇ 근데 크라우스가 좀 더 대단해 보임.
-도진은 촐싹거리면서 피하지만, 크라우스는 그냥 다 받아내 버림. 공격력이 서로 비등하다고 칠 때 크라우스가 이기는 게 맞지 않나?
-크라우스 님, 제발 도퀴벌레 새끼들 콧대 좀 사정없이 뭉개 주세요 ㅠㅠㅠ
그들이 원하는 건 그저 도진의 패배.
그것 하나였다.
-진짜 열정들 대단하다.
-쟤들은 진을 왜 저렇게 싫어하는 거야?
-이유가 있겠음? 아, 있긴 하겠네. 그냥 자기 인생 돌아보면 한숨 나오니까 저러는 거지.
안티들의 극성은 갈수록 고조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극성은 대회 진행 측면에서 플러스 요인이 됐다.
도진vs크라우스 구도에 불이 지펴지며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집중된 것.
그러는 사이.
도진과 크라우스 두 사람 모두 1승을 추가하면서, 다음 대진 상대로 서로를 만나게 됐다.
그리고 다가온 둘의 경기 당일.
[“연일 더욱 열기를 더해 가는 콜로세움 L! 해설을 맡은 지연우 인사드립니다!”]
목청이 터져라 소리치는 해설자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동시 시청자 수가 믿기지 않습니다! 공식 중계 채널에만 150만 명이 넘는 분들이 보고 계신데요! 지금도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 첫 번째 경기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죠!”]
[“네, 그렇습니다. 오늘 첫 경기. 도진 선수와 크라우스 선수의 대결이 진행될 예정인데요. 벌써 대회가 8강에 접어들면서 경기 룰도 3전 2선승제로 바뀐 만큼 엄청난 접전이 예상됩니다!”]
[“이미 더 유명해질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도진 선수. 이건 말할 필요도 없죠.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크라우스 선수, 심상치 않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오며 정말 압도적인 면모를 보였어요.”]
[“정말 지금까지 왜 크게 알려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대단했죠.”]
해설자와 캐스터만큼이나 시청자도 들끓고 있었다.
-대회 첫 경기 보고 시시하게 도진 독주로 끝날 줄 알았더니 이런 개꿀잼 매치가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ㄷㄷ
-미친 새끼들아; 치킨 좀 그만 시켜! 배달이 안 오잖아!
-무슨 월드컵 하냐 ㅋㅋ 치킨 배달이 왜 안- 아니, 시발 우리 동네 치킨집 왜 배달 막아 뒀냐?
-크라우스! 크라우스! 크라우스! 크라우스!
-오늘은 도진 개같이 패배하는 날~! 오늘은 도진 개같이 패배하는 날~! 오늘은 도진 개같이 패배하는 날~!
-진짜 쟤들 왜 저러냐.
-냅둬. 저게 삶의 이유인 새끼들이야.
-근데 도진 안티 거르고 크라우스 씹간지라 응원하고 싶긴 함 ㅋㅋ
-도진이랑은 다른 맛이 있지. 직전 경기에서는 한 걸음도 안 움직이고 상대 압살해 버렸잖아.
-정령이랑 합체하는 게 ㄹㅇ 개사기 그 자체야.
-히든 클래스겠지? 기사랑 정령사 섞여 있는 거 보면.
점점 뜨거워지는 열기 속에 해설자의 외침이 터졌다.
[“오늘 주목할 점 중 하나죠. 지금까지 경기 모두 C급 장비를 착용하고 치른 도진 선수. 오늘도 같은 선택을 할지.”]
[“1티어 그룹에 속한 32명의 선수 누구 하나 부족함 없는 실력을 지녔지만, 그중에서도 크라우스 선수는 도진 선수 못지않은 강자라 평가 받고 있는 만큼 오늘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모든 분들의 궁금증. 지금 해결됩니다! 선수 스펙이 공개됩니다!”]
크라우스
티어: 1
레벨: 190
착용 장비: Lv.190 A
[“크라우스 선수는 변함없는 모습입니다. 지금까지와 다른 건 상대 선수인 도진 선수와 레벨대 차이가 없는 만큼 레벨 페널티로 인한 장비 등급 하향 조정이 없다는 것뿐이군요.”]
[“그럼 도진 선수는 어떨지-”]
말을 하던 캐스터의 눈이 커졌다.
도진
티어: 1
레벨: 190+
착용 장비: Lv.170 C
[“변함없습니다! 도진 선수, 상대가 누구든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티끌만 한 변동도 없이 그대로입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같은 190레벨대 선수를 상대로 하는 만큼 도진 선수가 자처하는 장비 페널티의 격차가 훨씬 더 커졌다고 봐도 될 텐데요! 정말 괜찮나요!”]
-진성 또라이에게는 빠꾸란 없다.
-사실 여기서 슬쩍 장비 등급 올려서 끼면 가오 상하긴 함 ㅋㅋ
-지금 가오가 문제냐? 여기서 지면 감당해야 할 조롱이 얼만데
-상금도 다 날리는 거임 ㅋㅋ
-어차피 질 거 알고 장비 핑계 대려는 거지~ 역겹다, 역겨워~
-도진 입장에서 상금 3억은 별관심도 없을 듯. 버는 돈이 얼만데.
-경기 시작한다. 채팅할 시간에 숨 참고 경기나 봐라 ㅋㅋ
무대에 오른 도진과 크라우스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카운트가 시작됐다.
도진은 조용히 눈앞의 크라우스를 보며 생각했다.
‘크라우스… 이런 데서 만날 줄이야.’
황금을 녹여 만든 듯한 금발을 지닌 미청년 크라우스는 도진이 기억하는 최상위권 랭커 중 한 명.
미래에는 정령왕의 계약자로 유명해지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미 계약했을지도.’
LOST에서 정령왕이라는 게 ‘아주 강력한 정령’의 등급 같은 거지만… 대단한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설령 이미 저쪽이 그만한 정령과 계약한 상태라 해도 도진은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직 숨겨 둔 밑천이 있다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그 밑천 모두, 미래에서 보고 왔으니까.
[“…3, 2, 1- 경기 시작합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크라우스에게서 물보라가 일어나며 거대한 물의 거인이 나타났다.
크라우스의 전매특허인 정령과의 합체였다.
마치 물의 거인을 갑주 삼아 입은 듯한 모습.
지금까지 대회에서 보였던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규모였다.
크라우스의 동작에 맞춰 물의 거인이 검을 내지른다.
‘역시.’
그걸 본 도진은 씨익 웃었다.
그런 도진 뒤로, 수십 개의 번개 구체가 일제히 생성됐다.
약 1초 뒤.
[“격돌! 격돌했습니다!”]
경기장은 자욱한 수증기에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