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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계절, 캘리포니아에 일어난 산불처럼 빠르게 번진 논란거리는 당연히 도진의 귀에도 들어갔다.
“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벤트전 때문에 불타고 있다는 말씀인 거죠, 팀장님?”
[“네… 도진 씨한테는 정말 죄송하다고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도진 씨 입장에서는 저희 부탁 때문에 수락한 일인데, 괜한 논란에 휩싸이게 해 드린 점 정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평소보다 훨씬 더 정중한 말과 태도로 전해오는 사과에 도진은 당황했다.
꼭 터울이 많이 지는 큰누나 같은 느낌을 주던 그녀가 이렇게 심각하게 사과를 하니 괜히 덩달아 심각해질 것만 같았다.
“심각한 상황인가요?”
방금 전까지 게임만 하다가 지인(테레사)의 메시지를 받고 나온 참인 도진은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옆에 있던 천지현이 조용히 태블릿을 건네줬다. 여러 개로 분리된 인터넷 창에 현재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떠 있었다.
[“좋지 않은 상황인 건 확실하죠. 하지만 수습하겠습니다. 적어도 도진 씨 개인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게끔… 아니, 이건 말이 안 되네요. 이미 피해를 입으신 상태인데. 음. 최소한 여기서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게 수습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아니, 팀장님이 잘못하신 것도 아닌데 그렇게 계속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뇨, 저희 잘못이죠. 이번 이벤트에 참가를 부탁드린 것도 저희고, 참가하는 방식을 정한 것도 저희인데요.”]
“그렇긴 하지만, 그걸 듣고 정한 게 저잖아요. 저도 동의한 사안인데… 그러면 제 책임도 있는 거죠.”
말하며, 눈으로 태블릿 화면을 훑어본 도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불편한 사람들이 많다고 해야 할지…….’
매사에 불편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세상이다.
‘그런데 또 하는 말들을 보면 맞는 말이긴 해.’
하지만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억지를 쓰는 거면 그냥 무시하겠지만, 사안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저쪽 의견도 맞는 말이었다.
-이벤트전에 상금이 걸린 건 아니지만, 이렇게 진행되면 ‘도진’의 이름값 때문에 결승전보다 이벤트전이 더 큰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음. 그러면 결국 열심히 싸워서 우승을 차지한 사람은 도진 띄워주기 위한 재료로 소모되는 꼴밖에 더 됨?
지금 보고 있는 댓글에 도진은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닙니다. 도진 씨는 저희를 믿고 진행을 맡겨 주신 건데… 전적으로 저희 책임이죠.”]
도진은 쓰게 웃었다.
“이런 식으로는 대화가 끝나질 않겠네요. 그럼 이 이야기는 대충 반씩 잘못한 걸로 넘어가고, 수습을 어떻게 할지로 넘어가죠.”
[“반씩이 아니고- 하아… 네, 알겠습니다.”]
여기서 고집 싸움을 해 봐야 득 될 게 없다는 생각에, 김영희는 본론을 꺼냈다.
[“곧 글이 올라갈 겁니다. 입장 발표를 곁들인 사과문이 되겠죠. 변명 없이 고개를 푹 숙일 겁니다. 미숙한 진행으로, 우정 참여를 약속해 준 도진 씨한테 피해를 끼친 부분도 사과를 할 거고요. 도진 씨는 개인 일정으로 바빠 이번 이벤트 진행 내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정리를 하는 게 최선일 거 같습니다.”]
“음… 그걸로 충분할까요?”
[“한번 논란에 불씨가 붙은 이상 완전히 불이 꺼지진 힘들겠죠. 그래도 그간 구축한 도진 씨의 이미지가 워낙 좋은 데다 딱히 이런 데 노출되는 걸 즐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에-”]
“팀장님, 잠시만요.”
도진은 김영희의 긴 설명을 끊었다.
사람 말을 이런 식으로 끊는 게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막 떠오른 좋은 생각이 흩어질 거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게 이벤트전 자체가 아니라 이벤트전이 각 티어 1위랑 붙게 되어 있는 거 때문이잖아요?”
[“네? 아, 네. 그렇죠.”]
“결승전이랑 우승자한테 쏠려야 할 스포트라이트가 정식 참가자도 아닌 저한테 쏠릴 게 뻔하다. 그걸 노린 거 아니냐. 다른 참가자는 전부 마지막 이벤트전을 위한 들러리냐. 뭐, 이런 소리잖아요, 결국.”
보고 있는 태블릿 화면에 적힌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는 도진의 말에 김영희가 긍정했다.
[“…정확해요. 사실 반박하기 힘들 정도로 맞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럼 사과도 사과지만,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벤트전을 그런 식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김영희는 도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짐작해 봤다.
[“혹시 개인적인 일정이 바빠서 그때밖에 시간이 없었다, 이런 거면…….”]
“아뇨. 그런 건 당연히 안 되죠. 웬만한 변명을 듣자마자 한 귀로 흘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상대로 그런 어설픈 사유를 들이밀어 봐야 역효과만 나지 않겠어요?”
도진은 지금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으며 논란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제가 말은, 변명은 듣지 않겠다고 귀 닫고 있는 사람들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주면 되는 거 아니냐는 거예요.”
[“죄송해요. 이유를 만들어 준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드네요.”]
도진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쓴웃음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올릴 글 내용 좀 수정하죠. 제가 이벤트전이 아니고 정식으로 참가하기로 했다는 내용 넣어서요. 제 채널에 제 입장도 같이 올리면 좋겠네요. 죄송했고, 생각이 짧았다. 잡혀 있던 개인 일정 포기하고 정식으로 참가하겠다. 이렇게요.”
[“예? 아, 물론 도진 씨가 정식으로 참가해 주시면 좋긴 하지만… 아니, 그게 최선이긴 하겠네요. ‘이제 와서’라는 말이야 나오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사실 차마 상황이 이렇게 꼬여 버린 와중에 정식 참가를 해 달란 말이 나오지 않아 못 했던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도진이 먼저 말을 꺼내 주니, 김영희는 당황스러운 한편으로 고맙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도진 씨가 정식으로 대회에 참가하는 거랑 납득할 만한 이유가 만들어지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그건 직접 보여 드릴게요. 일단 그 전에, 대회 규칙을 좀 고쳐야 할 거 같은데요.”
자신이 참가하기로 마음먹은 도진은 세부적인 룰의 조정을 요청했다.
주최 측에서 등급별로 대회용 장비를 준비해 줄 것.
레벨 차이 등으로 인한 페널티성 장비 등급 조정 외에, 참가자가 원하면 더 낮은 레벨, 더 낮은 등급의 장비를 착용할 수 있게끔 해 줄 것 등이었다.
[“굳이 왜 이런 룰로… 설마 도진 씨……?”]
“네. 전 상대가 누구든 C급 장비만 착용하고 싸울게요. 그렇게 준비해 주세요.”
* * *
도진의 정식 참가가 발표됐다.
이에 공격하는 외부의 적들과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던 도진의 팬들은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꺄아아악! 욕해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보니 그들은 다크나이트였던 게 아닐까……?
-존멋이다. 깔끔하게 사과한 것도 그렇고, 별말 덧붙이지도 않고 증명하러 나오는 것도 그러해고.
하지만 이미 욕을 하던 사람들은 모든 걸 아니꼽게 봤다.
‘이제 와서’, ‘이럴 거면’ 같은 말이 덧붙은 수많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도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이 나오는지 굳이 찾아보지도 않았다.
다만 대회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이번 라엘 그룹배 LOST PvP 대회! 제1회 콜로세움 L의 해설을 맡은 지연우, 인사드립니다!”]
[“캐스터를 맡은 한미연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대회가 시작됐다.
[“이번 대회, 정말 시작하기 전부터 반응이 뜨거웠죠?”]
[“네, LOST 최고의 유명인이 아닐까 생각되는 분의 참가 소식으로 많은 분들이 정말 큰 기대와 관심을 가져 주고 계세요.”]
해설자를 맡은 젊은 남자와 캐스터를 맡은 젊은 여자의 밝은 목소리와 함께 대회가 시작됐다.
[“정말 공교로운 일이죠? 대진표가 이렇게 드라마틱할 수가 없습니다. 대회 일정 발표 직후 뜨겁게 달아오른 이슈의 주인공들이 개막전부터 맞붙게 되었습니다!”]
정말 공교로운 일이었다.
신이란 존재가 수작을 부린 건지.
무작위로 뽑힌 대진표 내에서 도진인 개막전에 서게 됐다.
그리고 그 상대는 블러드 소울 전 프로게이머 출신 스트리머 ‘헥스’였다.
도진을 상대로 자신의 승률이 절반은 넘는다는 발언을 한 헥스 말이다.
이런 스토리로 얽힌 상대가 개막전에서 만났으니, 당연히 시청자 반응은 활화산보다 더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헥스으으으으으! 무조건 이겨라! PvP 유저의 자존심을 보여 줘!
-기껏해야 몬스터 좀 때려잡으면서 실력 운운하는 새끼들 콧대 꺾어 버려!
-헥스! 헥스! 헥스! 헥스! 헥스! 헥스! 헥스!
-제발 개막전부터 개박살! 하나님 시발 제발요!
대전 참가자의 스펙이 화면에 출력됐다.
헥스
티어: 1
레벨: 180+
착용 장비: Lv.180 A+ (S급 장비 1부위 착용)
[“살인적인 난이도로 유명했던 게임, 블러드 소울에서 프로게이머로 활동했던 네임드 유저였죠. 헥스입니다!”]
[“제가 캐스터로 처음 인터뷰를 했던 선수가 헥스 선수였거든요. 오늘 멋진 경기 보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헥스 다음은 도진이었다.
도진
티어: 1
레벨: 190+
착용 장비: Lv.170 C
[“다음은 도진입니다! LOST를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유저- 어어, 잠시만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착용 장비가 조금 이상한데요. 레벨 차이에 따른 착용 장비 조정은 이미 헥스 선수가 S급 장비를 한 개 착용하면서 완료된 게 아니었나요?”]
[“170레벨 C급 장비라뇨? 이건 레벨 페널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심각한 페널티가 아닐까요?”]
[“아! 도진 선수 본인이 장비 등급 하향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레벨, 등급 전부 도진 선수 자의로 선택한 부분이군요!”]
도진의 스펙이 뜨자 해설자, 캐스터는 물론이고 시청자들 반응이 폭발했다.
-저 정도면 자신감을 넘어서 오만함 아님?
-미친 ㅋㅋ 어이가 없네.
-장비 레벨, 등급 둘 다 한 계단만 차이 나도 성능 차이가 미친 듯이 벌어지는데 저걸 자처했다고?
-어이가 없네 ㅋㅋ 레벨 차이가 뭐 20~30씩 나는 것도 아니고. 저러면 법사 딜이 들어가긴 함?
-거기다 마법사잖아. 캐스팅 속도 잔뜩 땡긴 거 아니면 PvP에서 마법사가 뭐 할 수 있는 게 있나?
도진은 모두에게 직접 보여 줄 생각이었다.
현재 자신이 PvP 대회 같은 데 나가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왜 자신이 치를 이벤트전이 마지막 순서로 빠지는 게 좋았는지를 말이다.
방법은 본격적인 양민학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