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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토마기아 녹색위 마법사 엘로운 그릴드.
그는 평소처럼 자신의 순번에 맞춰 서고 구역 앞을 지키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대체할 샌드위치와 만성 피로를 잊게 해 줄 독한 커피, 따끈따끈한 최신 학회 자료를 함께 챙겨 온 엘로운은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세팅부터 했다.
“흐음… 어제 순번이 누구더라? 자리를 썼으면 정리를 해야지…….”
깔끔한 성격을 지닌 마법사는 고급스런 원목 책상에 묻은 얼룩을 닦아 내고, 그 자리에 자신이 가져온 것들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음, 완벽해.”
만족스럽게 오와 열을 맞춘 엘로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뜨거운 커피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때 거짓말처럼 남자 하나가 엘로운 앞에 나타났다.
요란한 번쩍임도 없었다.
그냥 갑자기, 원래 거기에 있었다는 듯이 나타났다.
“우와악!”
밖에 나가면 엘토마기아의 녹색위 마법사라며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닌다 해도, 결국 책상물림은 생각지도 못한 돌발상황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잠시 굳어 있던 엘로운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아아악!”
방금과 달리 이번 건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들고 있던 뜨거운 커피가 쏟아지며 턱부터 목 그리고 로브자락 안의 가슴까지 적셨다.
그 뜨거움에 몸부림치던 엘로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런 걸로 엄살 부릴 때가 아니다.
엘로운의 비상한 머리가 맹렬히 회전한다.
‘마법진도 없는 데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어!’
엘토마기아의 마탑은 온갖 결계가 펼쳐져 있다.
그중에는 당연하게도 공간이동을 방해하는 종류도 섞여 있었다.
이미 안전이 확보되어 있는 루트. 즉, 기존에 설치되어 있는 마법진을 사용하는 게 아니면 모든 공간이동의 결과는 중증 장애 혹은 사망으로 귀결된다.
그럼 뭐야 이 새끼는? 그 결계를 뚫고 공간이동을 한 건가? 그거야말로 개소리지. 이 마탑에 깔린 결계 마법이 누구 건데!
“괜찮아요?”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된 게 그대로 드러나는 책상물림 마법사에게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 도진이 물었다.
그러면서 도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왕 보내 줄 거면 마법진 위치로 보내 주지.’
그러면서 옅은 냉기를 쏘아 열기에 고통받는 마법사의 고통을 덜어줬다.
“너, 넌 뭐야!”
그러나 그런 배려에도 엘로운은 꽥 소리부터 질렀다.
여기로 들어오는 길을 지키는 마법사가 몇이고, 방어 마법진이 몇 개인데.
아! 여기서 갑자기 짠 나타났으니 바깥이랑은 상관이 없겠군.
하지만 당장 여기만 해도 허락받지 않은 자가 들어오면 공격 마법이 비처럼 쏟아져야 정상이잖아.
혼란으로 눈이 빙글빙글 도는 엘로운에게 도진이 자신의 증표를 보여 줬다.
“그쪽이 놀랄 만한 상황인 건 맞는데, 그… 적당히 진정 좀 하죠? 나까지 정신없어질 거 같아서. 일단 저도 엘토마기아 마법삽니다. 당신이 애타게 보고 있는 방향에서 불덩이가 안 쏟아지는 거 보면 알잖아요?”
침입자를 배제하기 위한 공격 마법진이 설치된 방향을 힐끗대던 엘로운은 흠칫 놀라며 도진에게 시선을 돌려놓았다.
맞다. 저거 엘토마기아의 증표다. 그런데 모양이 조금 다른 거 같기도- 잠깐, 저거 색이 왜 저래?
“위조……?”
“하아.”
도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스승님한테 받은 반투명 두루마리라도 내밀었다가는 어리바리한 마법사 하나 심장마비로 보내게 생겼네.
답답함에 도진은 그냥 알아서 들어가서 알아서 찾을까를 고민했다. 더럽게 넓은 서고를 직접 뒤지는 게 이 모자란 마법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빠를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그러고 싶은데…….’
그러면 잡음이-
고민하는 도진에게 진짜 잡음이 일었다.
콰앙- 하고 문이 열린 것이었다.
여기로 들어오는 방향의 문이다.
그곳에는 도진의 눈에 익은 노인 하나가 있었다.
“오오……!”
엘토마기아의 자색위 중 한 명인 미구엘 그레이스였다.
마법사답지도 못하고, 노인답지도 못한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며 나타난 미구엘은 도진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운이 좋았다. 이 서고 구역의 전권을 맡은 게 자신이어서. 작은 공간의 일렁임조차 놓치지 않고 바로 이상현상 경보가 울리는 수정구가 자기 손 안에 있어서.
‘내기에서 져서 맡은 직책이라 귀찮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천운이었군.’
미구엘은 크흠, 하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도진에게 인사를 하려 했다.
“서, 서고장님! 이, 이자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거기다 가지고 있는 증표가-”
엘로운이 꽥 소리만 안 질렀어도 그랬을 것이었다.
미구엘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에잇, 시끄럽다! 지금 누구 앞인 줄 알고 그렇게 추태를 보이는 게냐!”
그런 미구엘에게 도진이 묵례를 했다.
슬쩍 엘로운을 보니, 자색위의 호통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모습이다.
‘난 그냥 책만 몇 권 빼 가면 그만인데…….’
이게 무슨 난리람.
도진은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를 느꼈다.
거기에 피로를 더하려는 듯 일전에 만났던 자색위 할아버지들 중 한 명이 활짝 웃으며 다가온다.
“이거 참, 뭐라 해야 할지. 일단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군요. 정말이지 시온 님께서 안 보인 순간에는 얼마나 눈앞이 캄캄해지던지. 아,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이미 소리는 차단해 두었으니까요.”
잠시 엘로운에게 갔던 도진의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저야 뭐…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할 수 있어서 한 거고요.”
“허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들은 소수이지 않습니까? 해야 할 일을 하는 자, 어려운 일을 해낼 재주를 가진 자. 둘 다 얼마 없는데 양쪽 모두 부합한다면 그것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미구엘은 진심이었다.
도진은 이미 증명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자신들이 못한 일을 해냄으로써.
마법사는 대부분 능력지상주의자들이다.
일곱 자색위 중 알버트 다음가는 능력지상주의자인 미구엘의 눈에 도진은 ‘진짜’였다.
‘아아, 아니지. 그분께서 고른 인재를 고작 내 판단 기준으로 판단해선 안 되지.’
무엇보다 눈앞의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에 걸쳐 있는 마법사는 시온 님의 첫 번째 제자.
그것만으로 이미 능력은 증명된 셈이다.
‘시온 그레이스의 제자.’
곱씹는 미구엘의 가슴에 부러움이 일었다.
하나 질투까지 번지진 않는다.
질투심? 그런 불경함을 품는 자가 있다면 미구엘 본인이 단죄할 것이었다.
시온 그레이스는, 미구엘을 포함한 일곱 명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나저나 여기는 무슨 일로…….”
조심스럽게 묻는 미구엘에게 도진이 시온이 준 걸 내밀었다.
“아, 다른 게 아니라 필요한 게 좀 있어서요. 8성 마법서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여기로 보내더라고요.”
“허허, 시온 님께서요?”
미구엘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8성 마법서가 필요하다고? 내가 8성 마법사 소리를 들었던 게 언제였더라? 마흔은 넘었던 거 같은데.
그런데 벌써부터 8성 마법서라니.
미구엘은 도진이 준 두루마리를 대충 확인했다.
「줘.」
“허허.”
만드는 데 들인 마법의 격은 저 하늘 위에 있으면서, 적힌 건 겨우 이런 거다.
그랜드 마스터의 마법 직인은 볼 것도 없이 시온 님의 것이다.
“원하는 만큼 가져가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후에 차라도 한 잔 어떠십니까?”
미구엘은 은근슬쩍 여기에 온 본론을 꺼냈다.
다른 마스터들이 일정에 쫓겨, 직책에 묶여 다들 여기저기로 흩어졌음에도 꿋꿋하게 여기서 버티고 있던 이유가 다 이거였다.
미구엘은 ‘시온 그레이스의 제자’와 ‘시온이 돌아온 과정’이 너무나 궁금했다.
‘이 할아버지, 눈이 돌아갔는데?’
문제는 도진은 전혀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괜히 잡혀 있다가는 다른 자색위들까지 싹 다 와서 붙잡고 늘어지겠어. 빨리 튀어야지.’
지금 할 일이 태산이다.
이런 데다 낭비할 시간은 없다.
해서, 도진은 엘토마기아에서 무조건 통하는 마법의 치트키를 썼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천천히 차도 마시고, 대화도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어려울 거 같네요.”
“어, 어째서?”
“스승님이 시킨 일을 해야 해서요.”
이건 진실이었다.
친구 영혼 옮기는 데 도움 되는 걸 찾으면 가져오라고 했고, 퀘스트도 떴다.
퀘스트 떴으면 시킨 거지.
“허… 시온 님께서요?”
미구엘은 더 궁금해 미치겠다는 눈을 했다.
하지만 도진은 바로 질문을 차단해 버렸다.
“예. 다만 무슨 일인지는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미구엘은 반박하지 못했다.
없긴 하지만, 만일 제 자식이라 해도 시온 님에 대해 멋대로 떠들고 다닌다면 당장 호적에서 파 버릴 것이었다.
그건 말하는 상대가 자신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잖아요? 이번 일에 스승님 개인적인 사연이 얽혀 있다는 건. 그렇다 보니 이번 일과 관련해서는 그냥 조용히 넘어갔으면 하시는 거 같습니다.”
미구엘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은근히 더 캐내려고 드는 순간 불경하게도 시온 그레이스의 개인적인 사정을 파고드는 천인공노할 놈이 되고 만다.
미구엘은 침통한 눈으로 말했다.
“…후우, 나이를 먹어도 어리석음을 줄지를 않는군요. 마법과 지식에만 눈이 멀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했을 뿐. 시온 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미구엘의 자책에 도진은 그저 심각한 눈을 하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 할아버지 그때 눈물 흘리던 할아버지 같은데. 감정이 풍부한가?’
심하게 자책하는 모습에 살짝 양심이 찔렸다.
“계속 비슷한 실수를 하는 거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시온 님께서는 워낙 위대하시니… 그분께서도 감정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시라는 걸 잊게 됩니다.”
하물며 이번에 시온 님이 사라지셨던 것도 ‘사람다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걸 잊다니. 마법사란 얼마나 어리석고, 그중 자신은 얼마나 더 어리석은 존재인가.
‘마법에 눈이 먼 것보다 차라리 앞을 못 보는 장님이 차라리 낫겠군.’
실시간 자아성찰을 이어 가는 미구엘.
도진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미친 광신자 소굴이군. 역시.’
빨리 도망가야지.
“그럼 저는 필요한 걸 챙겨서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물론입니다. 늙은이가 괜한 시간을 더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니.”
한 걸음 물러난 미구엘은 엄한 눈으로 옆을 봤다.
그곳에는 돌아가는 상황을 알지 못해 온몸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엘로운이 있었다.
“무엇을 하느냐. 사서라는 녀석이. 필요하신 게 어디에 있는지 빠르게 안내하지 않고.”
“예, 예?”
미구엘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상하게 굵은 구릿빛 목 근육이 꿈틀댄다.
“예, 옛! 지금 즉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엘로운은 힘차게 대답했다.
여기서 ‘원칙상 그날의 담당 사서는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같은 소리를 했다가는 물리적으로 척추가 접힐 것만 같았다.
도진은 엘로운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휴우. 직접 안내한다고 안 해서 다행이네.’
단순히 넓다를 넘어 광활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거 같은 서고 구역을 도진은 몇 시간이나 돌아봤다.
그동안 안내를 맡게 된 엘로운은 자색위인 미구엘이 극진히 대하는 도진이 누구인지에 대한 지독한 궁금증과 지독한 긴장감을 견디느라 혼을 빼야 했다.
도진이 마음에 드는 8성 마법 스킬북을 잔뜩 챙겨서 떠난 후 겨우 자리에 쓰러지듯 앉은 엘로운은 한 입도 못 먹은 샌드위치를 보며 말했다.
“시발, 도대체 누구지?”
이날 저녁 미구엘에게서 내려온 함구령은 엘로운의 궁금증을 더욱 폭발시켰으나 애석하게도 그걸 해결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