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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도진과 앤을 제외한 모두가 사라졌다.
자신의 공방을 독립 차원으로 분리하고, 공간 통제권을 쥐자마자 귀찮은 것들을 다 치워 버린 것이었다.
“…….”
도진 입장에서도 호기심에 눈이 멀어 가는 노마법사들은 분명 귀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탑주 걱정으로 가득 차서는 처량하게 쭈그리고 앉아 오매불망 탑주만 기다리다 바로 강제 퇴장을 당하는 걸 보니 측은지심이 들었다.
【시온 넌 진짜…….】
이젠 사람이 아니라 에고 스피어가 되어 버린 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시온의 인간성을 갖다 버린 만행에 창날을 좌우로 저으며 질린 목소리를 낸다.
【제자도 들였다고 하고 해서 조금 나아졌나 했더니…….】
“흥. 걱정을 했다 한들 이미 무사한 걸 확인했으면 됐지. 그보다 급한 건 이 녀석이다.”
시온은 콧방귀를 뀌며 도진을 가리켰다.
“저요?”
“그래. 고쳐야 할 게 아니냐.”
그리 말하며 시온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도진이 힘없이 들려서 휙 날아갔다.
어억, 하고 날아간 도진은 그대로 대형 유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에 초록색 용액이 가득 차 있었다.
흡! 본능적으로 숨을 참는 도진에게 시온이 말했다.
“걱정 말거라. 특수한 용액이라 숨쉬는 데 지장은 없으니. 실험에 쓸 생물을 오래 살려 두려고 만든 것이라 회복력을 돋우는 효과도 아주 좋다.”
그러고는 용액에 대해 마법은 연속해서 시전한다.
“리제니안은 원래부터가 정령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정령력을 지니진 않았지만, 마나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졌다는 측면에서. 거기다 너는 더욱 순수한 마나에 더 가까운 편이라 회복이 아주 빠를 거다.”
쿵쿵. 자신도 말을 하고 싶었던 도진은 투명한 유리벽을 쳐봤으나 시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신성력을 써서 회복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낫다. 원상태로 돌리는 것뿐만 아니라 회로를 더욱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이니. 다른 마법사들 같으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받고 싶을 비전 강화 마법이다.”
앗, 스승님의 크나큰 뜻을 몰라봤다.
도진은 얌전히 자신을 둥둥 띄우는 액체의 부력에 몸을 맡겼다.
‘얼마나 걸리는지는 묻고 싶은데.’
숨은 쉴 수 있는데 말은 못 하나? 생각하려는데 위에서 뭔가가 휘리릭 내려와서 입을 틀어막았다.
깜짝 놀라서 확인해 보니 호스 달린 마스크였다.
웁웁! 도진이 괴롭게 꿈틀거렸다.
“몸에 좋은 약이다.”
더럽게 쓴 액체가 강제로 주입됐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고통이 길진 않았다.
마취 효과가 있는지 중간부터는 뭐가 들어오는지 느껴지지도 않았던 것.
‘시발…….’
결국 실험에 지친 쥐처럼 축 늘어진 도진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밀린 메시지나 확인하기로 했다.
그러자 테레사와 탄토에게서 온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시간 순으로 먼저 온 것들은 사태 파악하고 놀라서 보낸 것들이고, 다음은 걱정하며 보낸 것들, 그다음은 자신들도 균열 막는 데 열중한다는 내용 그리고 최근 거는 돌아오면 바로 연락하는 내용들이다.
음, 마지막에 메시지가 아주 호들갑으로 점철된 걸 보니 아주 난리가 난 모양이다. 하긴 돌아오자마자 봤던 그 메시지들이 월드 메시지로 떴으면 그럴 만했다.
‘밖에도 아주 난리났겠는데.’
도진은 자신이 사라진 뒤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가 궁금해졌다.
급히 글을 쓰고 가긴 했지만, 그게 얼마만큼의 효과를 발휘했을지.
그리고 로스타니아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도 궁금했다.
‘어차피 한동안 이러고 있어야 할 거 같으니 정보 서칭이나 하자.’
역시 LOST 소식은 로트라넷이지.
도진은 서서히 회복되는 육체가 주는 나른함을 느끼며 로트라넷에 접속했다.
‘어…….’
그리고 놀랐다.
도진이 상상한 것 이상의 광란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 파티가 균열 보스 잡는 장면(인류 유산 보존용)
-그날, 우리는 모두 용사였다
-진느님 귀환 기원 1,101일차
-월드 메지시 뜬 지가 언젠데 아직도 소식이 없냐? 이건 라엘이 도진을 감금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라엘 엔터 입구 시위 갈 사람? 일단 난 아님~
-난 이제부터 이런 이벤트 열리면 무조건 다 던지고 참가하기로 했다.
-도진 이 나쁜 새끼, 이 재밌는 걸 지 혼자 하던 거임? 아직도 흥분돼서 이틀째 잠도 못 자고 있다.
-우리 이제 뭐 함? 우리 이제 뭐 함? 우리 이제 뭐 함? 우리 이제 뭐 함? 우리 이제 뭐 함?
-아; 재앙 금단증세 오진다 진짜. 빨리 재앙 달라고! 우리가 막을 거라고!
인간들이 미쳐 있었다.
끔찍한 난이도의 재앙에 짓눌리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월드 메시지와 함께 모든 위기가 물러가는 미친 연출에서 비롯된 극한의 뽕맛을 본 유저들은 단체로 미쳐 있었다.
‘…뭐야? 이렇게 대규모로 단합해서 균열에 대항한 거야?’
자신이 쓴 글을 보고 어느 정도 참여해 줄 건 알았지만, 이렇게 일반 유저, 스트리머, 대형 길드가 다 합심해서 나설 줄은 몰랐다.
‘이 정도로 다 같이 일어나서 함께 지켜냈으면 이럴 만하지.’
뒤늦게 확인한 도진조차 뭔가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드는데 그 순간을 함께한 사람들은 더 뿌듯할 만했다.
도진은 이번에는 자신의 채널에 접속해 봤다.
‘이쪽도 난리네.’
도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진 님 빨리 영상 올려 주세요. 무슨 일 있었는지 너무 궁금해요.
-형, 진짜 형만 믿고 싸웠는데 역시 형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구나. 월드 메시지 뜰 때 나 감격해서 울었어.
-이번에는 우리도 같이 지킨 거죠? 빨리 돌아오세요!
-어이, 채널 주인장. 좋은 말로 할 때 영상을 내놓으시지? 이번에는 우리도 영상을 요구할 정당한 명분이 있다, 이 말이야!
-단순히 사냥해서 레벨 올리고 스펙 올리는 게 이 게임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균열 지랄났을 때는 존나 짜증 났거든? 근데 이젠 형 때문에 다음 이벤트가 너무 기다려져. 더 어려웠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그때도 우리 같이 극복하자!
다들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 세계를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다는 것에 만족하며.
전생에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없었다.
‘이런 재앙이 닥칠 때마다 뫼비우스 욕하고, 손해 보상하라고 아우성치고, 뭐라도 얻을 만한 이벤트면 다들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숨기고 싸우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는 도진이 만든 변화였다.
회귀한 후로 도진이 사람들에게 보여 준 자신이 걸어온 길.
큰 시련을 깨부수고,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음을 증명하고, 그 끝에 다른 누구보다 강하게 성장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런 도진의 모습이 LOST를 즐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파문을 만들었고, 그것들이 누적되어 이런 일이 가능하게끔 한 것이었다.
도진이 바꾼 건 게임 속 세상의 운명만이 아니었다.
* * *
보상 정산도 기다리고, 시온 표 치료도 받을 겸 도진은 돌아와서 처리해야 할 일들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시약으로 가득 찬 유리관에 아바타를 방치하고, 현실로 돌아온 도진은 가장 먼저 지인들을 안심시키는 일부터 했다.
일단은 천지현부터였다.
사태가 사태였던 만큼 꾹 참고는 있지만, 건강 해치기 딱 좋은 패턴으로 게임을 해 댄 탓에 걱정을 하는 게 보였다.
“앞으로 2주 동안은 무조건 하루 5시간 이상 안 할게.”
“정말……?”
“정말.”
방법은 간단했다.
캡슐 밖으로 안 나오고 게임 폐인으로 살아서 걱정인 사람한테는 게임 줄이겠다는 약속이 제일이었다.
다음은 파티원들. 이쪽은 무사히 돌아왔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따로 영상으로 보내 줄 테니 확인해 보라는 말이면 됐다.
그런 뒤에는 바로 콘텐츠 팀장 오영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다름이 아니라 빨리 편집됐으면 하는 영상이 있어서요.”
도진의 말에 오영식은 펄쩍 뛰었다.
안 그래도 콘텐츠팀은 도진이 캡슐에서 걸어 나왔다는 소식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LOST 판을 발칵 뒤집어 놓은 도진이 돌아오면 그만큼 엄청난 게 올 거라 기대하고 말이다.
[“걱정 마세요. 이번 거는 저번보다도 더 공을 들이려고 완벽하게 준비해 뒀습니다. 도진 씨 채널 전담 인력도 더 뽑아 놨다니까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이 만들 겁니다.”]
원본 영상을 보기도 전부터 흥분해 말하는 오영식.
자신의 영상에 열정을 보여 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도진은 이렇게 말했다.
“팀장님, 죄송하지만 이번 거는 최대한 빠르게 전투 장면만 편집해 주시면 안 될까요? 빨리 보여 주고 싶어서요.”
도진은 고마웠다.
자신의 글을 읽고, 그것에 동조해 함께 재앙에 맞서 준 사람들이.
자신의 활약을 믿고 기다려 주는 팬들이.
그래서 빨리 보여 주고 싶었다.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도, 걱정해 주는 사람들에게도.
‘공들여서 편집하려고 들면 끝도 없이 늘어질 테니.’
덜어낼 거 덜어내고, 포장할 거 포장하려면 괜히 길게 끌릴 거다.
[“음, 원본 영상을 아직 안 봤지만, 그냥 전달 받은 상황만 생각해도 잘 뽑아내면 엄청난 게 나올 거 같은데… 사람들 기대감을 고조시키면서 잘 만든 뒤에 내놓는 게 낫지 않겠어요? 신경 쓰기 귀찮아서 그러는 거면 저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 빨리 팬분들한테 보여 주고 싶네요. 그러고 싶어요.”
[“후우, 어쩔 수 없죠. 저번에도 전투 영상만 올린다고 해서 아쉬웠는데… 도진 씨 생각이 그러면……. 음, 그런데 정말 빨리 보여 주는 게 목적이면 속보처럼 전투 장면 올린 다음에 같은 재료로 작품 만들어서 채널에 올려도 되잖아요?”]
“어… 그건 그렇죠.”
[“오케이! 알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 궁금해 죽기 전에 딱 예고편 삼아서 하나 때리고, 후속으로 영화 뺨치는 거 만들어서 딱 때리는 걸로 하면 되겠네요.”]
다시 열정을 불태우는 오영식에게 도진은 잘 부탁한다고, 항상 고맙다고 말했다.
[“하하. 고마운 건 우리죠. 편집이야 다 할 수 있는 건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영상 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에 일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우린 복받은 거죠. 이런 소스 주는 크리에이터를 어디서 만나겠어요.”]
“부끄러우니까 이만 끊겠습니다. 건강 챙겨 가면서 하세요.”
오영식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끊은 도진은 하- 하고 짧게 숨을 뱉으며 생각했다.
‘바쁘다, 바빠.’
다음에 접속할 때는 회복이 되어 있으려나? 보상 정산 쪽도 신경 쓰이는데.
아냐, 이런 것보다.
‘쉬자.’
이러다 정말 죽는다. 도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