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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천만한 곳에서는 탈출했지만, 집까지 이동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물 대신 어둠으로 채워진 바다를 지나는 동안 시온과 앤은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도진은 끼어들어서 할 말도 딱히 없고, 엉망진창이 된 몸뚱이 때문에 힘도 없어서 그냥 눈을 감고 듣기만 했다.
【정말… 난 가끔 들려오던 목소리가 환청이라고만 생각했어. 그게 진짜 네가 내게 했던 말들이라니.】
앤은 자신을 위해 시온이 계속해서 공허에 목소리와 이야기를 흘려보냈다는 사실을 듣고는 엄청나게 감격했다.
특히 도진이 경계를 넘으며 앤의 목소리를 듣고, 그걸 시온에게 전해 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거의 감격 속에서 헤엄을 치는 수준이었다.
“이 녀석이 그 말을 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이만큼 확신을 갖고 널 찾기는 힘들었을 거야.”
【기억이… 나는 거 같아……!】
기억이 나긴 개뿔.
그거 다 쌩 거짓말이었는데.
도진은 눈을 감고 그렇게 생각했다.
앤은 공허에서 혼자 오래 지낸 탓인지 무슨 말만 들으면 기억을 멋대로 재구성했다.
‘하긴. 처음 반응을 보면 자기가 꿈에 있는 건지 환상을 보는 건지도 구분 못 했으니.’
도진 입장에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여차하면 앤을 부분 기억 상실증 환자로 몰아서라도 거짓말을 덮어야 했는데, 귀찮음이 줄었으니.
그나저나 언제쯤 도착하는 거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공간이 늘어지는 감각이 도진을 덮쳤다.
속을 뒤집어 놓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우욱……!”
예고 없이 닥친 멀미를 강제하는 경험은 시온이 장거리 공간이동을 감행하면서 발생한 여파였다.
“음, 아직인가? 이 정도면 꽤나 많이 회복한 거 같은데.”
태연하게 중얼대는 시온을 도진이 노려봤다.
“…저 환잡니다.”
“안다.”
“…….”
시온의 당당함에 도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죄송해요. 우리 애가 사회성이 부족해서…….】
앤이 대신 사과를 했다.
하나 시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공간이동을 감행했다.
도진은 기겁했지만, 놀랍게도 두 번째부터는 어지러움이 전혀 없었다.
“음. 손상된 만큼 조정을 하니 좀 낫구나.”
시온이 단 한 번의 시행착오로 손상된 회로에 맞춰 공간이동 마법을 재조정한 것이었다.
도진은 새삼 느꼈다.
‘성격에 문제가 있어도 능력만 쩔면 그냥 되는구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시온은 옳았다.
그녀가 현재 상태에 맞게 재조정한 공간이동 마법은 일행의 이동속도를 엄청나게 끌어올렸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좌표는 이 지점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멈춰서 그렇게 말한 시온은 강제로 차원의 막을 찢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시온의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로스타니아를 둘러싼 막을 뚫을 수가 없었다.
도진이 열쇠로 열어 보려 했지만.
[‘비어 가는 열쇠’에 남은 힘이 부족합니다.]
로스타니아로 통하는 문을 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제한 시간도 가는 시간만 주고 돌아오는 시간은 주지도 않고. 이젠 탈출도 못 하게 막아 놔?’
이거 완전 시온 그레이스 데려올 거 아니면 거기서 죽어라. 이런 거잖아.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다.
그런데 뭐 이 게임이 악질적인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지금은 일단 문을 열 궁리부터 해야 할 때였다.
“여기서 스승님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때요?”
가장 무난한 방법 같아서 도진은 그렇게 말했다.
“음. 조금 오래 걸릴 거 같은데.”
오래 걸린다니, 얼마나? 하고 물으려는데 시온이 먼저 계산을 마치고는 말했다.
“이곳의 마나 농도와 전환 효율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 마음 놓고 능력을 쓰려면 1년은 걸릴 거다.”
그럼 안 되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도진은 아주 간단한 해법을 발견했다.
“그러면… 힘을 합쳐서 열어 보죠.”
그렇게 말하며 도진은 시온에게 자신이 지닌 열쇠는 건넸다.
시온 혼자, 힘이 얼마 안 남은 열쇠 하나. 이렇게 단독으로는 열지 못하지만, 시온이 이 열쇠가 지닌 저력을 전부 끌어내서 자신의 힘과 합치면 가능해지지 않을까?
도진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투명한 큐브 모양의 열쇠를 건네받은 시온은 열쇠의 구조를 파악했다.
“…정확한 구조는 모르겠지만, 이걸 사용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건 가능할 것 같구나.”
큐브가 열어야 할 벽의 두께를 얇게 만드는 데만 집중한다면,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러려면 널 보호하는 마법을 거둬야 한다.”
도진에게 쓰는 힘까지 끌어와야 했다.
“어차피 바로 픽 쓰러져 죽는 것도 아니고, 가죠.”
제한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도진은 도전을 선택했다.
고개를 끄덕인 시온은 작업에 들어가기 전 도진에게 다시 큐브를 넘겼다.
“내가 신호를 하면 그걸 사용하면 된다.
그런 뒤 시온은 본격적으로 사전작업을 시작했다.
마법으로 ‘공간’을 구체화한다.
그런 뒤에 하나의 세계를 감싼 막에 마력을 침투시켰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면역 반응이 일어나지 않게끔, 이질적인 힘이 침투하고 있음을 들키는 시점을 최대한 늦추려 노력했다.
‘효율을 높이려 노력을 하려니 힘들구나.’
가진 힘을 아껴 가며, 이렇게 신중하게 쓰는 게 얼마 만인지.
시온은 속으로 툴툴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앞의 공간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시온의 이마에 땀이 방울지기 시작했다.
얇게, 얇게, 더욱 얇게.
하지만 어느 정도 깊이까지 파고들자 자신들을 가로막은 벽의 저항이 거세졌다.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다.
‘아직 부족해.’
그때 저쪽과 이쪽의 힘의 평행을 깬 건 한 자루의 창이었다.
에고 스피어 앤이 조금 뒤로 물러났다가 확 하고 앞으로 치고 나갔다.
【나도 도울게!】
시온이 구체화하여 드러나게 해 둔 차원막에 앤이 충돌했다.
오랜 세월 공허를 떠돌며 업을 쌓은 창은 차원과 공간에 상처를 내기에 충분한 기물이 되어 있었다.
“지금-”
시온의 외침보다 한발 먼저 도진의 손이 큐브를 내밀고 있었다.
도진의 눈에도 확연히 보인 것이다. 공간에 하얀 실금이 가는 것이 말이다.
콰직.
실금 간 공간이 깨지며 와르르 무너졌고, 도진, 시온, 앤은 그대로 로스타니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억-!”
원래 세계로 돌아오자마자 느껴진 건 엄청난 속도감. 그리고 얼굴을 두드리는 바람이었다.
“또 하늘이야!”
문이 뚫린 지점이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 위였던 것이다.
심지어 아래는 새파란 바다였다.
오른쪽에는 중앙대륙이 보이고, 고개를 틀어보니 저기 위쪽에는 하늘에 뜬 부유대륙이 보였다.
대충 따져 보니 중앙대륙 동쪽 해상의 하늘 위인 거 같았다.
“좌표가 어긋났구나.”
추락하는 와중에 태연히 말하는 시온을 본 도진은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말했다.
“구출이나 해 주시죠.”
해탈한 도진은 그냥 외력에 몸을 맡겼다.
대마법사랑 있는데 낙사는 안 하겠지.
이젠 그냥 쉬고 싶을 따름이었다.
[로스타니아로 귀환한 것을 환영합니다!]
[시스템 기능이 정성화됩니다.]
[퀘스트 완료에 따른 보상 정산이 이루어집니다.]
[달성한 위업이 신화적입니다. 보상 정산 작업에 다소 시간이 소요됩니다.]
[보상은 순차적으로 지급됩니다.]
로스타니아로 돌아오자마자 보상 관련된 안내 메시지가 주르륵 떴다.
그리고 이어서 밀려 있던 월드 메시지도 주르륵 떴다.
신화적 위업, 세계의 찬사 어쩌고 하는 건 눈에도 안 들어왔다.
[운명의 분기점을 넘었습니다! 잠들어 있던 세계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 숨겨져 있던, 다른 세계와 연결된 문이 눈을 뜹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다른 세계와 연결된 문이라니? 그걸 이쪽에서 열 수 있다고?
도진은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도 다른 세계의 존재랑 치고 박고 싸우긴 했다.
다만 그때는 저쪽에서 쳐들어와서 싸웠다는 게 다르다.
균열 열리고, 테라포밍 시원하게 당하고, 전진 기지 깔리고.
그런데 선공을 당한 것도 아닌데 이쪽에서 먼저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다니.
‘전개가 이렇게까지 달라지다니.’
도진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큰일을 해 냈는지 실감이 됐다.
뚝.
메시지를 다 확인할 때쯤 추락이 멈췄다.
풍부한 마나를 바탕으로 시온이 고속으로 회복을 한 것이었다.
예고도 없이 시야가 암전됐다. 도진은 생각했다. 또 공간이동이구나, 하고.
* * *
도진과 시온이 엘토마기아 최상층에 들어서자마자 본 건 엘토마기아의 마스터들이었다.
그들은 시온이 사라지고, 도진이 시온을 찾으러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공허로 나간 자가 무사히 돌아올 확률은 한없이 희박함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못하여서.
그런데 갑자기 시온이 나타나자 그들은 화들짝 놀라 억눌린 비명부터 질렀다.
‘어!’ 와 ‘억!’ 사이의 소리를 내는 노구의 마법사들.
밖에 나가면 엘토마기아의 자색위로서 제국 공작 이상의 대우를 받는 자들이지만, 지금은 처량하게 바닥에 앉아서 궁상을 떠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시, 시온 님!”
그들은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그랜드 마스터가 돌아왔다는 것 말고는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오셨군요!”
“영원히 사라지신 줄만 알았습니다!”
“어디 가실 때는 말씀을 해 주셔야지요!”
반가움에 눈시울을 붉히는 노마법사도 있었다.
하지만 시온은 달랐다.
“여기서 뭣들 하는 것이냐? 이런. 차원 분리 마법이 사라졌잖아?”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전혀 모르겠다 듯이 말한다.
“걱정이 되니까요! 이대로 영영 돌아오시지 않으면 저희는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어떻게 하기는. 어차피 있으나 마나 했던 탑주가 아니냐. 하던 대로 잘들 지내면 그만이었다.”
슥슥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 자신의 공간을 지키던 마법을 복구하는 시온.
그녀를 보며 일곱 마스터는 뭐라 더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 이런 분인 걸 모르고 따른 것도 아니고.
돌아오셨으면 되었다.
“…….”
그들은 무심한 시온 대신 ‘데려 오겠다’ 말하고 정말로 세상 바깥까지 나가서 시온을 데리고 돌아온 도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뜨거웠다.
‘그냥 고마워서 보는 거 같지가 않은데……?’
도진은 노마법사들의 눈에서 마법사 특유의 광증 섞인 갈망을 읽었다.
‘설마 공허 차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려고 하는… 젠장, 그거구나.’
확실하다.
이 인간들, 시온이 돌아와서 걱정거리가 해결되니 바로 호기심에 눈이 멀기 시작한 거다.
아마 시온만 없었다면 벌써 달려들어서 질문 세례를 퍼붓고 있었겠지.
도진이 어떻게 닥친 위기를 넘길지 궁리하려던 그때.
“방해된다.”
모든 마법을 복구한 시온이 손을 휘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