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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사다. 볼품없는 톱니바퀴다.
역할을 다 하면, 위대한 대마법사 스승님께서 모든 걸 해결하실 거다.
그래야 했다.
그게 도진이 예상한 전개였고, 가장 바람직한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시온의 의식을 깨웠으나 그녀는 제시간에 마법을 쓸 수 있을 만큼 회복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마법회로를 제자에게 넘기는 선택을 했다.
[접속 마법회로의 소유자 「시온 그레이스」가 마법회로의 통제권을 일시적으로 포기합니다.]
[연산 능력 한계 초과! 연산 능력 한계 초과! 연산 능력 한계 초과! 연산 능력 한계 초과!]
[연결된 외부 확장 마법회로의 연산 능력을 사용해 밀린 작업을 처리합니다.]
[안정화 완료되었습니다.]
마법계의 슈퍼컴퓨터 「진리의 서」와 마법에서 태어난 대마법사 시온 그레이스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척척 해결해 나갔다.
잠시 후 도진은 시온의 모든 걸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총 한 자루 쥔 보병이 거대한 항공모함의 통제 권한을 쥐게 된 셈.
그러나 갑자기 통제권을 쥐게 된들 도진이 바로 시온 그레이스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이렇게 한다고 없던 마법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더럽게 큰 화염구 따위로는 저걸-”
시온 그레이스가 처음으로 제자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마법은, 상상력이다.】
거짓말처럼 주변의 마나가 깨끗하게 재배열됐다.
【상상한 것을 현실로 옮길 때 그것을 얼마나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가가 마법사의 역량이지.】
시온이 도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상상하거라, 네 눈앞에 펼쳐졌으면 하는 광경을. 보조는 내가 하마.】
그래. 믿자.
도진은 눈을 감았다 떴다.
펼쳐졌으면 하는 광경을 떠올리며.
그런 도진 주변으로 엄청난 숫자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그래, 그게 마법이다.】
대마법사의 마법회로와 대마법사의 보조, 거기에 「진리의 서」까지.
이것들이 일으키는 시너지는 잠시 동안 도진을 대마법사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해 주었다.
‘결국 운명은 내 손으로 바꾸라는 거냐.’
잘 짜인 판에서 놀아나는 기분이다.
엑스트라 노릇을 하려고 왔더니,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이렇게까지 등을 떠밀면 버틸 재간이 있나.
바라는 대로 춤을 추는 수밖에.
도진은 목표를 확인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듯 암흑 촉수를 뻗은 괴물은 허겁지겁 흩어진 조각만 끌어당기고 있다.
도진의 접근이나 이쪽에서 벌어지는 일은 관심을 두지도 않는 모습이다.
하긴 저만한 크기다.
위협이 될 때는 신경을 쏟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먼지만도 못한 크기를 지닌 이물질 정도나 되려나 모르겠다.
“이제부터 달라지겠지만.”
도진은 자신의 상상과 시온과 진리의 서가 합작해 만든 마법들을 일제히 발동시켰다.
마법진에 갇혀 있던 광선 수백 줄기가 일제히 공허 공간을 물들였다.
이제 막 주워서 붙여 놓은 외곽의 껍데기 역할을 하는 조각들이 광선에 직격되어 다시 부서지고 흩어진다.
스으으으으.
그와 동시에 저 안쪽 깊숙한 곳에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악의로 똘똘 뭉친 안개였다.
【중앙만 피하면 된다. 나머지는 얼마든지 부숴도 좋으니, 마음대로 날뛰거라.】
안 그래도 그럴 거다. 정말 더럽게 고생해서, 잠깐 쥐게 된 이 치트키 같은 순간을 한껏 즐기지 않으면 억울할 거 같거든.
심플 이즈 베스트. 복잡한 상상은 필요치 않다. 지금 필요한 건 ‘강하고’ 또한 ‘많은’ 화력뿐이다.
이런 생각으로 도진은 마법을 쏟아부었다.
이에 세계 포식자의 집단으로서의 생존 본능과 안에 도사린 암흑 촉수의 주인이 동시에 대항했다.
일제히 솟아올라 도진이 있는 방향으로 꺾여 날아드는 유리 조각의 채찍들. 육안으로 헤아리기 힘든 숫자였다.
시온은 이러한 공격을 하나하나 인식하고, 각각의 궤도를 계산해 마법으로 요격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상대가 여러 갈래의 공격을 하니, 그저 자신도 여러 갈래의 마법을 만들어 대응했다.
능력 넘치는 대마법사의 마법적 사치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진은 그런 사치를 상상할 능력이 없었다.
도진은 시온에게 공간을 가르는 마법을 요구했다.
《공간 절단》
도진의 손짓에 의해 수백 가닥의 공격의 중간 지점이 잘렸다.
【음…….】
전생 시절 마법 하나하나가 소중했던지라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데 도가 튼 도진의 전투 방식은 시온에게는 신세계였다.
적의 공격이 단순한 것을 이용해, 그것들이 한데 엉키도록 유도해서 한꺼번에 잘라 버린다든지.
【어엇- 무엇을 하는……!】
특히 가장 큰 차이점은. 시온은 꿈쩍도 않고 공방을 주고받았으나 도진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타입이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쇄도하는 수백 가닥의 공격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도진을 본 시온은 기겁을 했으나 이는 모두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어차피 난 하난데 촉수든 채찍이든 수백 가닥을 뽑으면 어쩔 건데? 난 나한테 가까이 오는 것만 대처하면 그만이야.’
시온이 쓸데없이 외부로 확장해 넓게 펼쳐 놓았던 마법회로의 크기도 줄였다. 이렇게 크면 과녁밖에 더 되나?
《천상의 날개》
그런 뒤 날개를 달았다. 이런 고위 주문을 마음껏 난사할 수 있다니. 이런 상황만 아니면 정말 꿈만 같았을 거다.
도진은 관성을 무시한 비행이 가능하게끔 해 주는 날개를 펼치고 곡예비행을 감행했다. 도진을 노리는 세계 포식자에서 뻗어 나온 유리 채찍들이 저들끼리 뒤엉킨다.
‘날 잡으려면 머리를 좀 굴려서 이동 경로를 제한해야 하는데-’
정직하게 뒤꽁무니만 쫓는 수준이면 숨바꼭질에서 질 수가 없다.
퍼버버버벙.
비행하는 도진에게서 전투기가 사출하는 플레어를 닮은 광점이 쏟아졌다.
그것들은 세계 포식자의 표면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피해를 입혔다.
“이런.”
공격을 위해 가까이 붙은 도진을 갑자기 훅 치솟은 검은 안개가 노렸다.
마치 자신은 그래도 머리를 좀 굴릴 줄 안다는 듯한 노림수다.
그걸 도진은 연속적인 공간 이동으로 응수했다.
순식간에 벌어지는 거리를 보며 도진은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점멸」도 이렇게 마음껏 쓰지 못하는데.’
그것도 공간을 다룰 수 있는 최소 조건인 8성 마법사가 돼야 하고, 마법회로 과부하 될 거 각오하고 땡겨도 이따위 난사는 불가능할 거다.
【…고위 주문을 처음 활용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능숙하구나.】
“스승님 말대로 상상하는 건 많이 해 봤거든요.”
전생 찐따 마법사 출신의 망상을 우습게 보지 마라.
‘그런데… 아무리 봐도 유의미한 피해를 줬다고 보기에는 힘들어 보이는데.’
고위 주문을 난사하는 건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분비되는 일이 맞았다.
하지만 적에게 엄청난 피해를 줬다면… 그건 아닌 듯했다.
‘내가 부수는 거랑 수복되는 속도가 비슷하다.’
도진이 싸움이 익숙하다 하여 만전 상태의 시온 그레이스를 능가할 수는 없는 일.
이대로라면 시온이 끝끝내 패배했듯 도진 또한 빌린 힘을 모두 소모하고 말라죽는 미래가 확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도진은 자잘한 딜을 누적시키는 걸 멈추고, 적의 목에 직접 칼을 꽂을 준비를 하기로 했다.
【음……? 네가 이 마법을 어찌 아느냐?】
도진의 상상을 읽은 시온이 의아함을 표출했다.
의아함 다음에는 곤란함이 나왔다.
【이건 지금까지 사용한 간단한 주문들과는 궤가 다른 주문이다. 이런 간접적인 보조만 가능한 상태에서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도진이 지금 원하는 마법은 위험했다.
【트리거를 당길 마법의 발현자인 네가 마법의 구조와 골자를 최소한이나마- 아니, 적어도 눈으로 본 적이 있어, 그 이미지를 또렷하게 그려 낼 수는 있어야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어.】
“어차피 이대로 소모전이 이어지면 결과는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시도할 수 있을 때 해 봐야죠.”
그리고 봤습니다, 이 마법이 발현되면 어떤 광경이 펼쳐지는지. 잊을 수 없는 광경이라 아주 잘 기억하고 있거든요.
이 마법은 스승님, 당신이 세상에서 홀연히 사라져 자취를 감추기 전 마지막으로 썼던 마법이니까요.
도진이 돌진한다.
시온은 급히 보조를 시작했다. 도진에게 빌려준 회로에 마나를 배열하고, 마법을 이루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조정한다.
그 어느 때보다 시온은 신중했다. 자신이면 몰라도 도진을 대리로 발현하는데 이런 대주문이라니.
【성질이 왜 이렇게 급해!】
이미 세계 포식자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 도진을 보며 시온은 빽 소리를 질렀다.
말투에 무게를 실을 겨를도 없었다.
그것만 한다고 다가 아니었다. 도진은 날아가는 와중에도 마법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시온뿐만 아니라 「진리의 서」가 풀로 로드 될 정도로 공격을 쉬지 않는다.
쉴 틈 없이 발현되는 마법의 폭풍은 트리거 역할을 하는 도진을 불태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른손의 마법회로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무리하면 펑 하고 터져 버릴 거라며 아우성을 친다.
하지만 도진은 전진하는 것도, 공격하는 것도 무엇 하나 멈추지 않았다.
‘날 노려!’
그런 도진이 가까이 온 순간 검은 녀석이 움직였다.
자신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왔다는 판단이 선 순간, 검은 안개를 솟구치며 도진을 노린다.
도진은 고속으로 회전하며 검은 촉수의 공격을 한차례 흘렸다.
그 순간.
【됐어! 하지만 발동은 결국 네가 해야 된다!】
마법이 준비됐다.
도진은 자신이 기억하는, 이 마법의 언령을 읊었다.
“영원에서 태어나, 찰나를 태우는 빛이 되리니.”
12성 초월 마법.
《극광(極光)》
저 안에 사는 검은 괴물이 바깥으로 안개를 내보내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
그곳을 도진의 손끝이 가리켰다.
닿는 모든 것을 증발시키는 새하얀 백염(白炎)의 빛은 어둠을 태우고, 조각과 파편을 태우고, 그것들이 서로를 당기는 힘마저도 태워 버렸다.
‘됐어……!’
마법을 쓴 대가로, 도진의 팔은 녹아 없어졌다.
마법의 발현을 위해 트리거를 당긴 후폭풍만으로 이렇게 됐다.
그렇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내부에서부터 많은 걸 소각한 덕에 세계 포식자를 이루는 조각 간의 연결 고리가 박살 났다.
서서히 극광에 피해를 입은 지점을 중심으로 붕괴가 일어나고 있었다.
‘음침한 놈도 조용한 걸 보니-’
엄청나게 피해를 입은 모양이군, 하고 생각하려는 순간. 스아아아아아 하고 폭발적으로 검은 안개가 피어났다.
“…말로는 안 했는데.”
전통의 부활 주문 ‘쓰러뜨렸나?’ 꼴이 날까 봐 속으로만 생각했더니.
건방지게 제멋대로 자력 부활을 감행한 검은 촉수가 도진에게 돌진했다.
그 순간.
《공간 절단》
그것이 잘렸다.
“나도 부활이다, 개자식아.”
「한정회귀」로 도진이 모든 부상을 회복한 것이었다.
짓쳐드는 공격을 막아 낸 도진은 검은 줄기를 따라 더욱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주변에 퍼진 검은 안개가 헐떡인다.
지금이 기회다.
사출되어 폭발하는 광점을 무제한으로 흩뿌리며 붕괴를 가속하며 나아간다.
그런 끝에.
“찾았다.”
바깥으로 검은 안개를 배출하는 새까만 조각을 찾아냈다. 그 안에서 적의로 똘똘 뭉친 눈동자가 데룩 굴러 도진을 노려보았으나.
“힘도 다 쓴 놈이 노려보면 어쩔 건데.”
구질구질하게 굴지 마.
이미 승부는 났으니까.
도진은 이번에도 제 안위를 도외시한 마법 발현을 요구했다.
수많은 마법진이 일제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