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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243화 (243/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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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가 지닌 힘은 보호와 더불어 공허에서 자유롭게 달릴 능력도 부여했다.

위와 아래가 따로 구분되지 않는 공간 특성상 도진은 원한다면 전방위로 걷고 뛸 수 있었다.

하나 도진이 가야 할 ‘앞’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젠장, 벌써 8시간이 다 돼 가는데…….’

시온 그레이스가 남긴 흔적이 남아 있는 방향이 곧 도진의 길이었다.

한데 벌써 8시간 가까이 그 길을 따라 달렸는데도 여전히 보이는 건 시온의 흔적 말고는 어둠뿐이다.

주어진 72시간은 어느새 앞자리가 6까지 줄어 있었다. 몇 시간 후면 이마저도 5까지 줄어들 것이다.

‘말려 죽일 생각인가? 뭐라도 나와라, 제발.’

그런 도진의 마음이 닿기라도 한 걸까.

저 멀리.

시온이 남긴 흔적 저편에 작은 유리 같은 게 보였다.

도진은 그것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탁, 하고 바닥 아닌 바닥을 찰 때마다 유리의 크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어느새 먼지 같던 유리 조각은 도진 발아래로 펼쳐진 거대한 땅덩이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어떤 세상을 담아 놓은 매우 거대한 유리 상자처럼 보였다.

“떨어져 나온 조각.”

도진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이건 어떤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었다.

작게는 모종의 재앙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멸망까지.

아주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부정적인 사건으로 인해 공허라는 바다에 빠져 버린 유실물.

‘우리 가출 스승님이 남긴 흔적이 아래쪽으로 꺾여 있네.’

도진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막막하긴 해도 차라리 다행이다.

어둡기만 한 공간을 하염없이 달리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테니.

도진은 방향을 아래로 잡고 달렸다.

점차 무언가에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유실물이 지닌 인력이 도진을 당기는 것이었다.

* * *

시온도 그레이스도. 어느 하나 자신의 이름이 아니던 때.

기억의 시작은 어느 숲속.

그 이전에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어쩌면 단순히 기억의 시작이 아닌 존재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깨어난 순간에는 갓 태어난 사슴보다도 흉한 몰골.

잠자리를 닮은 여러 장의 날개는 물에 젖은 천처럼 검은 털에 달라붙어 있고, 앙상하고 길쭉한 몸은 점액 같은 것으로 번들거렸었다.

「【으아”」

처음 낸 소리는 텔레파시와 육성이 반씩 섞인 소음이었다.

스스로 낸 소리의 거북함에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적신 점액 때문일까.

살갗에 닿는 모든 게 차갑게 느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숲속에 펼쳐진 꽃밭이 나왔다.

그때는 그게 꽃밭인 줄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앤’을 만난 곳은 그러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앤이 기척을 느끼고는 돌아봤다.

「너는……?」

털이 검은 짐승.

보석과 비단을 섞어 만든 듯한 잠자리를 닮은 날개가 여러 장.

눈은 제각각의 마력이 보석처럼 일렁인다.

앤은 짐승에게 다가갔다.

짐승은 그런 그녀를 경계하며 이를 드러냈다.

「정말 여러 번을 살았지만, 너만큼 신기한 존재는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앤이 한 말 몇 마디는 짐승에게 ‘언어’를 부여했다.

「‘여러 번?’」

언어가 생기니 그러한 의문을 품을 정도의 지성도 순식간에 갖춰졌다.

「말을 알아듣는구나?」

앤이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갈래?」

그 말을 짐승은 생각 없이 따랐다. 달리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시온. 네 이름은 시온이 좋겠어. 아, 그리고 내 이름은 앤이야.」

그녀를 따라 걸으며 받은 이름은 영원한 자신의 이름이 됐다.

「미안. 전생이었으면 훨씬 더 좋은 걸 줄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한낱 방랑기사 신세라서.」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딱딱한 빵을 나눠 주며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앤은 환생자였다.

「시온! 내가 다른 사람들 사는 곳에는 가지 말라고 했지?」

「하아… 시온, 내가 기침할 때 조심하라고 했잖아. 우리 밥을 다 날려 버리면 어떻게 하니?」

「시온! 그게 무슨 꼴이야! 왜 털 색이 알록달록해진 거야? 변신 풀어!」

방랑기사인 그녀를 따라다니며 참 많이 듣고 배웠다.

그러다 첫 번째 마지막이 찾아왔다.

「…미안해. 이번 몸은 좀 더 버텨 줄 거 같았는데.」

그건 갑작스레 찾아왔다.

환생자의 비대한 영혼을 버티기에는 한참 부족한 인간의 육신이 피를 토했다.

「운이 좋으면 널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지… 그때쯤에는 날 알아보지도 못하겠지.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이때까지는 별다른 감정이랄 게 없었다. 아니, ‘감정’이 없었다.

그냥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따라다니며 함께 지냈을 뿐.

그런데 개념으로만 알고 있던 ‘상실’을 처음 접한 시온은 앤의 죽음을 앞두고 난생처음 제대로 된 감정을 얻었다.

「기다… 릴게.」

언제가 되었든 그녀는 다시 태어난다. 그러면 나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앤이 놀란 눈을 했다. 시온이 말을 한 건 이게 처음이었다.

30년쯤 걸렸다. 다시 만나는 데는.

그때 만난 앤은 옹알이만 하다 죽었다.

찾아냈을 때는 이미 마을 사람들은 역병으로 다 죽고, 그녀만 살아 있는 상태였다.

18년을 더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이 아주 평범한 새, 개, 고양이의 모습을 할 수 있게 됐다.

가족으로 살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녀가 먼저 떠났다.

기다림은 지루했고, 만남은 짧았다.

시온은 마법을 얻었다.

환생자인 친구를 더 살게 하기 위해서.

그래도 짧은 간격으로 찾아드는 죽음을 막진 못했다.

그녀가 짊어진 환생의 굴레는 시온의 마법 바깥에 존재했다.

「나도 죽을까?」

그렇게 정했다. 앤이 죽으면 가사 상태에 들어갔다.

앤이 태어날 때 눈을 떴다.

「…날 따라 죽지 마.」

「죽는 거 아냐.」

「그래도.」

몇 번 반복하니 들켰다. 반쯤 죽어 있는 사이에 왕조와 황조가 바뀔 게 뭐람.

자신이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 한 게 패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제대로 살기 시작했다.

어색하지 않게 인간 세상에 녹아들어 자리를 잡았다.

인간의 태를 갖추고, 시온에 더해 ‘그레이스’로 살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쯤부터.

지금의 나이도 이때부터 헤아렸다.

어느 생부터였지? 앤은 자신의 짧은 삶을 찬란하게 태우기 시작했다.

「시온, 넌 나 말고 다른 인간도 호의를 갖고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돼.」

대마법사의 영역에 들어선 자신의 도움으로, 환생자라는 게 페널티가 아닌 아주 큰 재능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시점부터였다.

모험가로, 귀족으로, 어떨 때는 영웅으로.

「시온, 고마워. 난 내가 저주 받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어.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나는 반복되는 삶 속에서 사람을 구해. 그들의 웃음을 봐.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네가 기다려.

함께하는 동안 자연스레 자신의 영역도 넓어졌다. 그녀와 함께 만든 것들을 바로 내팽개칠 수도 없으니, 거기에 묶여 있다 보니 그렇게 됐다.

언제나 이렇게. 남자일 때도 있고, 여자일 때도 있지만, 언제나 앤과 함께. 영원히.

그럴 줄 알았다.

차원의 막이 찢어진 곳에 생겨난 그 던전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대로는 어디까지 휘말릴지 몰라.」

벌어지려는 틈을 마법으로 필사적으로 봉합했다. 하지만 그걸 벌리고 이쪽으로 들어오려는 무언가가 그걸 용납지 않았다.

「내가 할게.」

앤이 창을 들었다. 그대로 벌어진 틈으로 달려 나갈 기세로.

「안 돼! 저긴, 저긴 이 세계 바깥이야! 죽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고! 그럴 거면 차라리 내가-」

「시온, 너는 한 번밖에 못 살아 봤잖아.」

그러면 너는. 내가 옆에서 본 모든 생이 짧기만 했던 너는.

말릴 새도 없었다.

거듭된 삶 속에서 갈고닦은 무예의 깊이는 이미 한 시대의 검성을 뛰어넘었다.

거기에 비대한 영혼과 연약한 육신의 간극을 좁혀 준 게 자신.

그렇게 얻은 짧은 생만큼이나 찬란히 타오르는 능력으로- 한 줄기 섬광이 된 앤은 이 세계와 저 바깥을 가르는 경계를 뚫고 사라졌다.

「안 돼애애애애-!」

공허는 죽음과 환생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삭고 삭아 완전히 소멸하는 결말만 있는 세계다.

죽음도 가져오지 못했던 완전한 이별이다.

이날 이후 시온은 공간과 차원에 미쳐 살기 시작했다.

비슷하거나 조금이라도 관련된 던전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찾아낸다. 포기는 없다. 영원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쿠웅-

길게 늘어지는 진동이 길었던 회상을 끝냈다.

“환상… 최면, 아니 환술에 가까운 수작이었나.”

원래대로라면 완벽하게 재현된 과거에 영원히 가두는 방식의 감옥이었을 터.

그러나 대마법사를 가두기에는 조악한 재주였다.

“힘을 너무 많이 소모했나? 이런 하찮은 수에 당하다니.”

시온은 바람을 일으켰다. 일어난 바람이 그녀를 감쌌다 사라지자 너덜너덜해졌던 그녀의 의복이 말끔하게 수복됐다.

그런 그녀 주위로,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마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하나가 문자 그대로 산과 같은 크기를 지닌 마수들이었다.

방금의 회상은 그중 가장 거대하고 강력하여 마지막까지 죽음을 유예 받은 마수의 마안이 불러온 것이었다.

“여기엔… 없군.”

시온은 자신이 초토화시킨 황량한 세상을 봤다.

이 어디에도 자신이 찾는 사람은 없다.

있던 건 망한 세상의 찌꺼기들뿐.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 나아가면 닿아.”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닿을 거다.

시온은 미련 없이 딛고 있던 대지를 떠나려 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뒤를 돌아봤다.

“…….”

하나 별말 없이 다시 앞을 보고, 나아갔다.

* * *

공간의 일그러짐에 빨려든 도진이 땅을 디뎠을 때 그곳은 폐허였다.

눈에 밟히는 산맥은 인위적인 절단면을 내보이며 비스듬히 무너져있었다.

그리고 그 산맥과 엇비슷한 크기를 자랑하는 마수들도 비슷한 맥락으로 잘려 있다.

“…미쳤군.”

잘린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잘 보면 뭉개져 죽은 것, 부서져 죽은 것, 뒤틀려 죽은 것.

다종다양한 사인으로 끝을 맞이한 괴물들이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쌓여 있었다.

참으로 험악하고 폭력적인 발자취였다.

“여기 있었던 건 확실하네.”

도진은 경외로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다음’을 생각했다.

자신의 스승, 시온 그레이스가 여기 있었던 건 확실해 보인다. 하나 지금은 없다.

그러면 다시 추적을 해야겠지. 그런데 어떻게 나가지? 열쇠를 써야 하는 건가?

[필드가 리셋됩니다.]

[※경고: 진행 중인 퀘스트에 비해 필드의 레벨이 너무 높습니다.]

[필드 레벨이 보정됩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데, 불길한 메시지가 떴다.

“뭐-”

싸울 생각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다 박살 나 있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억울한 눈을 하는 도진 앞으로 레벨과 사이즈가 한없이 작게 조절된 마수들이 나타났다.

시온 그레이스를 막아섰던 오리지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놈들.

그러나 제자 입장에서는 너무나 힘겨운 싸움을 각오해야 하는 놈들이었다.

“하아… 시발. 뭐 하나 쉬운 게 없구만.”

도진의 작은 푸념은 마수의 포효에 허무하게 파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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