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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떠나 공화국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갖은 일을 겪었다.
잠입, 탈출, 파괴공작을 비롯한 각종 테러 활동, 거기다 마지막에는 전격적인 군사 쿠데타까지.
단일 퀘스트에 들어가는 시간으로서는 3주를 넘기는 시간이 길게 느껴질지 몰라도, 이번 퀘스트는 아니었다.
겪는 중에는 잠까지 줄여 가며 이동과 전투를 반복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그랬기에 시간은 훅 지나갔다.
시간 가는 걸 일일이 신경 쓸 만큼의 여유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다 끝난 뒤 느낀 감상은 ‘길었다’가 아닌 ‘벌써 이렇게 흘렀어?’였다.
그랬던 상황과 현장이 고스란히 영상으로 남았다.
생존을 위해 취한 수면과 중간에 섞인 로그아웃 타임을 제외해도 러닝타임이 무려 450시간에 달하는 긴 영상으로 말이다.
라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팀은 도진의 영상을 전달받자마자 가용 가능한 인원 전부를 투입했다.
도진 영상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대충 봐도 ‘이번 것도 대박’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건 8부작… 아니, 12부작으로 한다!」
원본이 길기도 하고, 도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점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한 콘텐츠팀은 12부작을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테레사와 소소의 시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둘 다 라엘 엔터테인먼트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으니.
유일하게 부탁이 조심스러운 건 탄토였으나 라엘 엔터의 정중한 부탁을 받은 탄토는 흔쾌히 영상 사용을 허락해 줬다.
그렇게 도진의 영상에 진심인 라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팀이 심혈을 기울여 재창작한 루마누스 공화국 에피소드가 차례대로 업로드 대기 상태에 돌입했다.
* * *
부유대륙에서 도진 파티는 위업을 달성했었다.
월드 보스로 진화할 예정이었던 놈을 저지한 것이다.
그걸 영상으로 공개했으니, 더한 자극을 전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비슷한 반응이나마 이끌어 내면 다행이라고 봐야 할 정도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번엔 좀 오래 조용하네? 역시 직전 영상이 너무 컸나?
-아무리 도진이라도 부담되겠지 ㅋㅋ
-대박만 쳐야 하는데 초초초초초대박을 쳐 버렸으니 ㅋㅋ 딜레마에 빠질 만해
-난 아무래도 좋으니까 영상 주기가 짧았으면 좋겠음… 그냥 자주 보고 싶어
└너 같은 애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 잘나가는 사람 보면 무지성으로 까내리는 애들이 많아서 조금만 주춤한다 싶으면 개같이 달려들걸?
원래도 도진 채널은 불규칙하고, 긴 텀을 가진 채널이었다.
그래서 길게 안 올라오는 영상이 특별할 건 없었다.
‘설마 접었나?’ 같은 소리도 꾸준히 나오는 것이었고.
그런데 이번에는 팬들이 유독 걱정을 깊게 했다.
-그러고 보면 항상 대박을 쳤잖아? 그래서 영상 텀이 긴 걸 수도 있겠다. 적어도 전에 올린 거랑 비슷한 수준은 돼야 된다는 부담감을 느낀 걸지도 모르겠어.
-우리야 그냥 아무거나 올려도 볼 준비가 됐지만, 채널 운영하는 진 입장에서 받는 부담이나 스트레스는 또 다르니까.
└아무거나 올린다고 다 본다는 것도 거짓말이야. 너는 그럴 수 있지만, 대중은 절대 만만한 게 아님.
└ㅇㅇ 진짜 이 말이 진리임. 대충 운영해도 채널 잘 돌아가네? 하고 잠깐 방심하면 어느 순간 조회 수 바닥 치는 게 이 바닥이야.
최근 영상이 워낙 대단했기에 도진이 느낄 부담감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다가 그런 걱정이 전염된 것이었다.
-야야야, 솔직히 나라도 쫄려서 못 오겠다 ㅋㅋ 이제 어중간한 영상 올렸다간 퇴물 됐다고 욕먹기 시작할 텐데
-난 솔직히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 힘 빠진 영상 올라오면 바로 퇴물, 퇴물 하면서 댓글 달면 부들댈 새끼들 생각하면… 캬아!
그런 팬들의 걱정은 안티들의 기대가 되었다.
-우리가 이럴수록 도진이한테 더 부담이 되는 거 모름? 그냥 얌전히 기다리자.
-맞아, 맞아.
└응~ 얌전히 기다려. 우리도 욕 장전하고 기다릴게~
└근데 궁금해서 그런데, 진 안티는 왜 하는 거임? 뭐 잘못한 게 없는데.
└그냥 싫은데? 싸가지 없어 보이잖아.
진심으로 도진을 걱정하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의 걱정을 자양분 삼아 분탕을 치는 안티들은 서로 뒤엉켜 싸웠다.
“이게 뭐야?”
그리고 그걸 도진도 봤다.
자다 깨서 지현이 누나가 차려 준 밥 먹고, 요즘 LOST 판이 어떻게 돌아가나 체크하려고 로트라넷에 들어왔더니.
[유튜버 도진, 부담감을 못 이겨 은퇴 선언-]
로트라넷 메인 페이지에 뜬 실시간 조회 수 1위 글이 자신의 은퇴 소식이었다.
이건 낚시 글인 걸 알아도 클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은 별게 없었다.
[-하지 않고 영원히 우리 곁에 남겠다고 약속.]
대놓고 낚시다.
한데 댓글이 개판이었다.
글쓴이를 욕하는 거야 그렇다 치자.
솔직히 이런 글 쓰는 사람들은 욕먹겠다고 올린 거다.
맞는 거 좋아하는 그런 부류.
근데 어쩌다 메인 페이지까지 걸리게 돼서 그런지 팬과 안티가 모여서 싸움판을 벌이고 있었다.
페이지를 새로고침할 때마다 적게는 30개, 많게는 100개 이상씩 훅훅 늘어나는 댓글 숫자는 싸움의 열기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뭐 이렇게 열심히들 싸워?”
도진은 당혹스러웠다.
누가 부담감을 느낀다는 거지? 읽어 보니 자신이란다.
부담감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전보다 못한 영상이면 어떤가. 그냥 올리는 거지.
인기? 좀 떨어져도 된다.
어차피 인생이라는 게 고점을 찍으면 밑으로 내려오기 마련이다.
적절한 곳에 멈춰서 횡보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도진의 부담감은 현실에 있지 않았다.
가상현실을 넘어 자신의 또 다른 현실인 저쪽에 있지.
‘그래도 고맙긴 하네.’
나 싫다는 소리야 깔끔하게 무시하고 마는 도진이었지만, 거기에 대신 반박하며 열을 내주는 팬들을 보니 좋았다.
게임만 하느라 딱히 신경을 써 준 적이 없음에도 자신을 이렇게 좋아해 주고, 걱정도 해 주고, 남이 욕을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싸워 주는 걸 보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뿌듯하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심장 부근이 살짝 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도진은 직접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서 글을 작성했다.
[안녕하세요, 도진입니다.
요즘 저를 걱정해 주시는 분들이 많은 거 같아 근황이라도 전하려고 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부담감을 느낄 걸 걱정하시던데,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거든요.
전 제가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생각하고, 거품도 많이 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거품이 사라질 걸 걱정하면서 현재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언젠가 시시해져서 잊힐지 모르지만, 그래서 더욱 지금을 오롯이 만끽하고 싶습니다.
저를 많이 걱정해 주시고, 제 대신 화도 내주시는 분들이 많은 이 순간을요.
아, 곧 영상 올라갈 예정입니다.
전보다는 많이 시시할 거 같네요. 괜히 길어서 지루할 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편집을 재밌게 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별거 없는 절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진의 깜짝 글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도진아 ㅠㅠㅠ 정말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어. 그냥 행복해 줘.
-진짜 마인드가 좋다. 이게 인생을 대하는 태도여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너무 각박하게만 사는 거 같아.
-그지. 언제나 최고의 자리에 있긴 힘들지. 언젠가는 내려와야 하는데, 거기서 절망을 느끼느냐 뿌듯함을 느끼느냐가 그 사람의 행복을 결정하는 거 같아.
-ㅋㅋㅋ 갑자기 몇 번 쓰지도 않던 커뮤니티 공지 올리는 거 보니까 쫄리나 보네? 이번 영상은 본인이 봐도 노답인가 봐? 시시하고 지루한 영상 기다릴게~
└넌… 하아, 아니다. 너도 행복해라.
└네가 뭔데 나보고 행복해라 마라 하냐? 어?
-우린 형 일상 브이로그도 재밌게 볼 준비가 됐으니까 부담 느끼지 마. 진짜 형 자체를 좋아하는 팬도 많다는 거 알아줘.
라엘 엔터테인먼트가 영상 업로드 일정을 문의하는 전화와 메일로 고생을 하긴 했지만, 도진의 글은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
쏟아지는 문의도 마케팅 측면에서 보면 아주 좋은 광고 효과를 낸 셈이니, 나쁜 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시일이 흘렀고, 12부작 영상의 업로드가 시작됐다.
사흘의 텀을 두고 한 편씩 올라간 영상에 대한 반응은 ‘도진 말은 믿지 말자’였다.
-주인장, 당신 미쳤어? 시시하고 지루하다며!
-다음 편 내놓으라고!
-정보: 도진은 한국어를 개같이 못한다. 그는 ‘쩔다’를 ‘시시’로, ‘시간 순삭’을 ‘지루’로 알고 있다.
-후우, 형, 내가 웬만한 건 다 실드 쳐 주겠는데 이건 진짜 못 치겠다. 한국어 공부 다시 하자.
스케일만 놓고 보면 저주의 형상과 치렀던 전투 장면보다 못했다.
쌓여 있는 서사도 부족했다.
부유대륙, 뱀파이어, 그들을 속박한 저주 등은 카린과의 첫 만남부터 쌓인 이야기가 있었으니.
하지만 루마누스 공화국 에피소드는 그것과는 결이 다른 맛이 있었다.
-장르가 완전히 달라졌네;
-몬스터 잡는 게임 아니었음? 왜 잠입에 폭탄 테러에 약탈을 하고 있냐 ㅋㅋ
-아니, 유저가 마석 트럭을 터는 건 진짜 상상도 못 했네 ㅋㅋㅋ
-한국인으로서 진짜 가슴이 웅장해진다.
└한국인인 게 무슨 상관임?
└우리가 독립운동의 민족이잖아.
└독재에 맞선 역사도 잊으면 안 되지. 결을 따지면 그쪽이 더 맞고.
정통 판타지에 가까운 제국과 달리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루마누스 공화국의 모습.
단순히 어려운 던전, 강력한 몬스터를 공략하는 게 아닌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모습.
영상에 담긴 내용은 전부 신선함 그 자체였다.
특히 한국처럼 식민지, 독재정권 등의 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 사람들에게는 더욱 몰입감을 선사했다.
-근데 멸망교단 애들이 개입해서 저렇게 됐다고 해도, 그래도 국가인데 저렇게 쉽게 털리나?
└그게 독재의 무서움임. 권력을 한 사람이 틀어쥐고 있으니까 그 새끼가 돌아 버리면 국가 전체가 돌아 버리거든. 예전에 러시아처럼.
-하긴. 독재 유지하려고 누가 힘 키우기 전에 다 싹을 잘랐을 테니. 제국이었으면 아무리 황실이 장악돼도 개같이 트롤링하면 견제 세력이 움직여서 저지했겠지.
영상에 담긴 토론 떡밥이 하도 다양하다 보니 조회 수는 엄청나게 높게 나왔다.
당연하게도 도진 퇴물설을 언급하던 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마지막 장면이 제일 좋다.
말없이 떠나려던 도진이 레지스탕스 대원들에게 결국 붙잡혀서 모두가 나란히 서 있는 장면.
골치 아파 하는 얼굴의 도진과 활짝 웃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흑백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된 필름 사진처럼 처리된 마지막 컷은 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