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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웜 박멸 작업을 끝낸 뒤에도 도진 파티는 계속해서 사냥을 이어 갔다.
끔찍한 난이도의 사냥터와 던전들을 돌며 경험치 이벤트 효율을 극한까지 뽑아냈다.
새롭게 얻은 장비의 퍼포먼스가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전투는 힘들지언정 고통스럽진 않았다.
도진이 뿌리는 광역 저주는 모든 상황에서 파티의 생존성과 공격력을 동시에 높여 줬다.
테레사, 탄토의 무기가 지닌 단일 대상에 대한 강력한 공격력, 방어력 감소 저주는 보스전에서 특히 좋은 성능을 발휘했다.
재벌가 외동딸의 위엄을 보이며 HP/MP 재생 옵션이 줄줄이 달린 S급 1티어 장비로만 전신을 도배한 소소는 「강제되는 희생」에 힘입어 독보적인 힐러가 됐다.
유물 장비 4개가 더해진 도진 파티의 전력은 거의 2배 이상 강해진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으아아… 끝! 드디어 끝났드아아아…….”
한 달이라는 짧지 않은 경험치 이벤트의 끝을 알린 건 테레사의 힘 빠지는 포효였다.
마지막 던전의 보스 머리통에 망치를 얹으며 포효를 내지른 테레사가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진짜 이젠 좀 쉬어야지. 이러다 몬스터보다 내가 먼저 죽겠어.”
즐겁긴 했다. 다만 힘든 건 힘든 거였다.
“몬스터는 벌써 다 죽였는데 뭘 먼저 죽어. 지금 죽으면 네가 저승 후배야.”
소소가 핀잔을 주자 테레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러니까 평생 남자친구가 없지.”
소소가 셉터로 테레사의 머리를 찍었다.
말이 셉터지. 사실상 금속으로 만들어진 짧은 지팡이이자 둔기다.
그걸로 머리를 깡- 하고 얻어맞은 테레사는 억! 하는 소리를 내며 정수리를 감쌌다.
“김소소, 너 미쳤어? 이거 살인미수야!”
테레사의 항의에 소소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탱커 주제에 엄살은.
무엇보다.
“너도 마찬가지면서 헛소리하지 마.”
“난 고백은 많이 받았거든!”
던전을 나오면서도 옥신각신하는 둘을 방치하고, 도진과 탄토는 훈훈한 대화를 나눴다.
“고생했어요, 형.”
“내가 뭘. 도진이 네가 고생 많이 했지.”
“전 당분간 좀 쉬려고 하는데, 형은 어떻게 할 거예요?”
“나도 좀 쉬려고. 솔직히 이렇게 쉬지 않고 사냥을 길게 한 건 처음이라.”
그래. 쉬어야지.
제대로 된 휴식 없이 계속해서 달리기만 했더니 정말 푹 쉬는 시간이 절실했다.
며칠 푹 쉬고, 그런 다음에 또 제대로 달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진은 탄토에게 말했다.
“푹 쉬고 나중에 봐요.”
“응. 도진이 너도 푹 쉬어.”
도진이 가장 먼저 접속을 종료했다.
탄토는 여전히 투닥대는 테레사와 소소를 보다가 조용히 접속을 종료했다.
이후로, 도진은 이틀을 내리 잠만 잤다.
사흘째 되는 날에도 게임을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바깥 공기 좀 쐴까 하는 기특한 생각을 했지.
“인벤 정리만 살짝 하고 나가야겠다.”
하지만 게임에 절여진 습관이 문제였다.
정신없이 사냥만 하느라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린 인벤토리가 신경이 쓰였던 도진은 그것만 정리하기로 했다.
딱 그것만 하려고 했는데.
“순순히 협조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다, 마법사.”
정신을 차려 보니 포위되어 있었다.
“…이건 또 뭐 하는 새끼들이야.”
도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 * *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분명 마법사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데 있어 취약하다고 들었다.
대마법사전을 훈련할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다.
「마법사는 준비가 필요한 짐승이다. 무엇을 하든 사전에 준비란 게 들어가지. 사냥감에게 그럴 틈을 주지 마라. 그럼 놈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데 아니었다.
사냥감으로 정한 마법사는 언뜻 보기에 무방비해 보였다.
제압을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힐 때까지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꼼짝 못 하는 거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진 순간 갑자기 전신에서 힘이 빠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놈이 움직였다.
분명 마법사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수준의 간격이라 생각했으나, 사실 사지로 걸어 들어간 게 자신들이란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흰색? 파란색도 보였다. 섬광이 번쩍이고, 무얼 해 보기도 전에 화염이 주변을 삼켰다. 그다음 둔탁한 충격에 눈앞이 번쩍했고. 의식이 날아갔다.
의식이 날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맡은 건 피 냄새였다.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피가 전신을 옭아매는 듯한…….
* * *
자신을 포위하고 제압하려던 괴한 다섯을 역으로 제압한 도진은 짜증 섞인 한숨을 뱉었다.
“설마 산적이나 도적놈들은 아닐 거고.”
복장만 보면 부랑자나 다름없어 보이지만, 한눈에 봐도 어디서 훈련을 받은 놈들이다.
한데 훈련 받은 티는 나지만 어설프다.
“멸망교단 쪽은 더더욱 아니고.”
처음 뭐가 튀어나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멸망교단이었다.
딱히 원한 살 일을 하고 다닌 적이 없으니, 누가 노린다면 반사적으로 그쪽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멸망교단에서 뭔가를 하려 들었다면 이것보다는 훨씬 나은 걸 썼을 거다. 사람이 됐든 괴물이 됐든.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도진은 두뇌 사용을 멈췄다.
어차피 당사자들한테 물어보면 그만인 걸 굳이 아까운 뇌를 혹사시킬 필요는 없지 않나.
도진은 기절시킨 다섯 놈을 명치어림까지만 남기고 바닥에 묻었다.
그런 뒤 다섯 놈을 동시에 깨웠다.
“우으으으읍!”
갑자기 가해진 전기충격에, 다섯 괴한은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깨어난 괴한들에게 도진이 말했다.
“아프기 전에 알아서 말하고 싶다, 손.”
당연히 대답하는 놈은 없었다.
막 깨어난 와중에도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는 모양새가 독립투사가 따로 없다.
“오랜만에 산책 좀 나가려고 했더니 피곤하게 만드네.”
도진은 싸우느라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며 한 놈에게 다가갔다.
“퉷, 죽여-”
다가오는 도진을 보며 말하던 괴한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도진이 발로 걷어찬 것이었다.
“이런 개새-”
그걸 보고 반응하는 옆에 놈도 걷어찼다.
그리고 복면을 거칠게 벗겼다.
‘뭐야? 생각보다 어린데.’
앳되다는 걸 제외하면 별거 없었다.
다음 놈도 마찬가지.
‘뭐야? 여자도 섞였어?’
펑퍼짐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 그냥 호리호리한 놈이다 싶었는데 여자도 하나 섞여 있었다.
“…다른 자들은 건드리지 마라! 차라리 나를-”
“안 됩니다!”
복면을 벗겨 보니 여자라 멈칫했더니 넷째 놈이 발작을 했다.
‘이러면 내가 악역 같잖아.’
습격한 건 그쪽이면서 왜 드라마를 찍고 있어.
“안 그래도 네 차례였어.”
도진은 네 번째 놈의 안면을 건틀렛으로 강타했다.
다른 놈들이 지랄발광을 하는 걸 보니 이놈이 두목이다.
심문은 이놈을 중점적으로 하면 되겠어- 하고 생각하며 복면을 벗겨 냈다.
“……!”
그런데 아는 인물이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워낙 유명한 자다.
알토스 조르문드.
중앙대륙 북동부에 위치한 루마누스 공화국 총통의 장자.
루마누스 공화국을 지구의 국가에 비유하면 동독, 소련, 북한 정도를 뒤섞은 나라다.
유저들 레벨이 올라서 제국이 아닌 제국 바깥, 중앙대륙 전체가 유저들의 활동 영역이 된 후에도 루마누스는 특유의 폐쇄성으로 갈 수 없는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 알토스 조르문드가 유명해진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이놈이 대륙 전체에 수배된 수배범이 되기 때문이다.
알토스 조르문드. 루마누스 총통의 아들인 이 남자는 루마누스 공화국의 전복을 노리고 반군을 조직해, 끝끝내 내전까지 일으킨 인물이었다.
‘뭐, 결국 루마누스 공화국 자체가 멸망하면서 알토스에 대한 수배나 현상금도 흐지부지돼서 잊히긴 했지만…….’
한동안 유저들 중에서도 현상금 사냥을 하겠다며 알토스를 쫓는 게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어서 도진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지금은 반군도 없고, 레지스탕스 노릇을 하고 있을 시기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들 나라도 아니고 제국 한복판에서 자신을 습격하다니.
미래 정보고 나발이고 맥락이란 게 조금은 맞아떨어져야 조각을 맞춰 볼 엄두라도 내지.
이건 너무 뜬금이 없어서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어쨌든… 큰 게 온 건 확실해. 뭔 일이 터지든, 터졌든.’
일단 그걸 알아내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도진은 짹짹대는 공화국 놈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이놈들이 정보를 불지에 대해.
어디서 온 건지 안다면서 협박을 해 볼까?
아니다.
더 좋은 수가 있었다.
도진은 말없이 마나를 조작했다.
“헉!”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짹짹대고 있던 알토스가 서서히 지면 아래로 잠긴다.
“멈춰라!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제발 멈춰!”
알토스가 조금씩 가라앉는 걸 본 다른 놈들이 당황해서는 발작을 했다.
알토스는 자존심에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기만 했지만, 눈에 맺힌 두려움은 숨기지 못했다.
도진은 그대로 알토스를 땅 아래 묻어 버렸다.
여자가 제일 먼저 말을 하겠다며 발버둥 쳤다.
그러나 도진은 묵묵히 다른 자들까지 땅 아래로 담갔다.
“아아……!”
이제 남은 건 여자 하나에 남자 하나.
두 사람은 절망과 분노가 반씩 섞인 눈을 하고 있었다.
도진은 그들에게 희망을 선물했다.
“묻힌 놈들은 아직 살아 있다.”
“……?”
“땅 밑에 공간을 만들어 뒀거든.”
“……!”
도진은 마법으로 걸터앉을 의자를 만들어 앉아 여자와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빨리 날 납득시켜 봐. 어디서 온 건지, 왜 온 건지, 날 습격한 이유는 뭔지, 누가 시켰는지 등등. 들어보고 지금 얻어맞은 정도로 봐줘도 되겠다 싶으면 묻어 놓은 놈들 꺼내 줄 테니까.”
도진의 말에, 여자가 다급히 물었다.
“정말 살아 있는 거겠지!”
도진이 빙긋 웃었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남은 둘도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이, 이게 무슨-”
“입 다물어. 흙 먹는다, 그러다.”
여자와 남자가 완전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가 5초 정도 후에 다시 위로 올라왔다.
“우우욱……!”
내려갔다 올라오는 사이에 입과 코로 들어간 흙과 자갈을 토해 내며 괴로워하는 두 사람.
“궁금해하는 거 같아서 직접 확인시켜 주려고. 아래서도 숨 쉴 수 있지?”
“…….”
퉤, 하고 나머지 흙은 뱉어낸 여자가 입을 열었다.
“우린…….”
“마, 말할 생각이십니까?”
“…어쩔 수 없다.”
여자는 진지한 얼굴로 성심성의껏 정보를, 아니 거짓말을 털어놨다.
당연히 도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도진은 여자를 땅속에 연속으로 다섯 번을 묻었다 올렸다 했다.
강제로 삼킨 흙더미가 300그램을 넘길 때쯤, 여자는 제대로 된 진실을 입에 담았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더 시간을 끌었다간 밑에 묻힌 사람들이 시체가 될 판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너흰 루마누스에서 왔고, 딱히 날 특정해서 노린 건 아니고 제국 내의 마법사를 납치하려고 했다는 거냐?”
“…그렇다.”
“이유는?”
“최근 공화국에 들어온 제국 출신 마법사들 때문이다. 너희 때문에 공화국이 더욱 크게 일그러지고 있다. 그걸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했단 말이다……!”
“뭐?”
도진은 의아했다.
표면적으로 루마누스는 마법사를 대놓고 배척하는 나라였다.
뒤로야 힘을 키우기 위해 뭔 짓이든 하겠지만, 대놓고 마법사가 설치게 둘 리가 없는데?
‘거기다 공화국이 일그러졌네 어쩌네 할 정도면 그냥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꽤 고위 마법사가 얽혔다는 소린데…….’
그런데 고위 마법사는 어딜 가든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루마누스까지 가서 설칠 필요도, 마법을 팔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뭔가… 뭔가 냄새가 난다.
다만 정확히 무슨 냄새인지 판단하기에는 정보가 단편적이었다.
“더 자세히.”
도진은 냄새를 더 맡아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