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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유저가 혜택을 보는 경험치 이벤트는 뜬금없는 이벤트 취소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고도 남았다.
이제 막 가상현실 세계에 적응 중인 뉴비, 자신의 레벨에 만족하고 사냥보다는 가상현실 라이프에 집중하던 라이트 유저 등등.
레벨업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을 두던 사람들도 경험치 이벤트 소식에 녹슨 병장기를 꺼내 들고 사냥터로 나섰다.
물론 게임에 진심인 부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경험치 이벤트 기간 내내 일분일초도 쉬지 않을 기세로 사냥터로 향하고 있었다.
“언니, 진짜 여기 맞아?”
인상을 찌푸리며 묻는 건 파티의 막내였다.
“맞다고 몇 번을 말해? 계속 오르다 보면 나온다고!”
“힘드니까 그렇지. 언니가 마법사 해 봐. 진짜 오래 걸으면 죽을 맛이라고!”
“그러게 누가 마법사 하래?”
파티의 리더이자 맏언니인 탱커 유저가 핀잔을 줬다.
게임 내 최고의 체력을 자랑하는 탱커의 감수성으로는 게임 내 최강의 허약체인 마법사의 고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진 님만 아니었으면.”
도진의 영상이 풀리기 시작했을 때쯤 마법사로 유입된 슬픈 사연을 가진 막내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어! 저기! 설인이다!”
그때 파티의 둘째이자 눈 좋은 레인저가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멀리 눈이 쌓인 곳에 작게 보이는 설인을 캐치한 것.
“내가 말했지! 여기 사람도 없고 설인이랑 트롤 흰둥이들 잔뜩 있다니까!”
최근 80~120레벨 구간 꿀 사냥터와 꿀 던전으로 떠오른 곳들 중 다수가 불을 테마로 하는 던전이었다.
덕분에 요즘 설인과 아이스 트롤의 부산물은 부르는 게 값인 수준으로 비싸지고 있었다. 불에 강한 장비의 재료이기 때문.
“환경이 이래서 그렇지, 아니지. 이런 환경이라 사람이 없으니까 여기 다 우리 거라고!”
팡팡 방패를 두드리며 호기롭게 외치는 맏언니를 따라 졸졸 위로 올라가는 파티원들.
사냥은 순조로웠다.
한데 어느 순간.
“우리 너무 올라온 거 아냐? 우리가 올라온 길이 안 보여!”
설산이 그들을 삼켰다.
항시 부는 강풍이 발자국을 지우고, 인간의 냄새를 산의 주민들에게 전달했다.
몬스터가 몰려왔다.
이대로는 전멸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대충이나마 방향을 잡아 산을 내려가려 했으나.
“미, 밑에도 올라오고 있어!”
몬스터들은 집단으로 행동했다.
오랜만에 보는 따뜻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리 퇴로부터 차단해 둔 것.
수십 마리의 설인과 몇 마리의 아이스 트롤들이 인간을 뜯어먹기 위해 조여 들어갔다.
그때.
“꺄아악!”
불이 일었다.
거리를 두고도 느껴질 정도의 뜨거운 열기가 몬스터들을 구워 버렸다.
뭐지? 무슨 일이야?
황망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던 그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늑대가 달려오는 걸 봤다.
“어어……!”
막내가 이상한 소리를 내는 사이 늑대는 경로에 걸리는 몬스터들을 사정없이 분쇄하며 질주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 하나도 나타났다. 설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을 휘감은 그는 늑대가 남기고 간 몬스터들을 말끔히 태워 없앴다.
“설마!”
마법사인 막내가 소리를 질렀다.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그녀는 열렬한 ‘그 마법사’의 팬 출신이었다.
그녀는 이리저리 구르느라 엉망이 된 머리며 옷매무새부터 다듬었다. 저 마법 사이사이로 방출되는 황금색 마력은 그다. 도진 님이다.
‘무, 무슨 말부터 하지?’
괜찮냐고 물어보겠지? 그러면 엄청 팬이라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그녀 옆을 도진이 휙 지나쳤다.
마법을 두르고, 엄청난 속도로.
이때까지만 해도 막내도, 다른 사람들도 위쪽까지 정리를 하려나 보다. 다시 내려오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
“가는데?”
도진은 몰려 있는 몬스터만 정리하고는 오히려 속도를 더 높여서 멀리, 산 위로 올라가 버렸다.
쿨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여기 부는 설산의 바람보다 추운 거 아냐?
“…그 사람 맞지?”
누군가의 질문. 대답은 없었다. 너무 뻔한 질문이어서였다.
막내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속 아이돌을 눈앞에서 놓친 그녀는 발걸음을 위쪽으로 향했다.
“미친년! 지금 당장 내려가도 모자랄 판에 어딜 가는 거야!”
물론 그런 시도는 바로 제압당했다.
* * *
다시 아네모네에 탑승한 도진은 마법을 거두며 말했다.
“여기서도 가장 최악인 자리에서 뭣들 하는 거야?”
길을 잘못 드는 것도 정도가 있지.
방금 그 자리는 몬스터 서식지의 중심 같은 곳으로, 일부러 찾으려 들어도 찾기 힘든 장소였다.
아네모네가 사람 냄새가 난다고 해서 살펴본 건데 길을 뚫으면서 잡은 몬스터만 해도 한 트럭일 정도다.
“바로 내려가야 할 텐데.”
【내려가고 있어. 냄새가 멀어지고 있거든.】
“그래? 어쨌든 네가 저 사람들 구한 셈이네.”
달리는 아네모네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도진의 칭찬에 뿌듯해하는 것이었다.
도진은 아네모네의 갈기를 툭툭 두드려 주면서 앞을 봤다.
티그렉 산.
전에 왔을 때는 그렇게 고생스러웠는데, 이젠 쉽게 돌파가 가능했다.
도진도 아네모네도 그 옛날과는 차원이 다르게 성장해 있었다.
‘아니, 쉬운 게 문제가 아니지. 애초에 내가 왜 이 길을 또 써야 하냐고.’
도진의 불만은 합당했다.
이전 마글로와 함께 이곳에 왔을 때 도진은 티그렉 산 안쪽에 사는 드워프들에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 줬었다.
정확히는 실버문이 남긴 마법 포탈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데 강철 봉우리 마을로 들어가려고 갔더니 공간이동 마법진이 비활성화되어 있는 게 아닌가.
덕분에 거길 가기 위해서 마글로와 올랐던 설산에서 다시 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큰 문제만 아니면 좋겠는데.’
용건이 있어 찾아온 것과 별개로, 도진은 드워프들이 무사하길 바랐다.
“아네모네, 조금 더 빨리 가자.”
도진의 바람대로 아네모네는 속도를 높였다.
* * *
결과적으로 도착해 보니 드워프들에게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잘 지내 문제였다.
티그렉 산맥 안쪽에 있는 공동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강철 봉우리 마을은 그 규모가 말이 안 되게 커져 있었다.
건물들도 싹 다 새로 지었는지, 세련된 공업도시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다.
“어엇?”
도진이 마을로 다가가자 그를 알아본 문지기 드워프가 화들짝 놀랐다.
“마, 마법사님 아니십니까!”
도진은 이들의 은인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마을에 사는 드워프 중 도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소식은 빠르게 마을 안쪽으로 전해졌고, 곧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야, 이 자식아!”
마글로였다.
그는 도진을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며 달려왔다.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리면서 그가 말했다.
“아주 얼굴 잊어버릴 뻔했다, 이 녀석아!”
그런 그를 보며, 도진도 말했다.
“…꼴이 그게 뭐예요?”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어울리지도 않는 정장 차림에다 안경은 또 뭐야.
저거 알도 없는 거 같은데.
수염은 또 왜 저렇게 깔끔하게 다듬었어.
특히 콧수염은 그 유명한 카이저 수염 모양이다.
머리카락은 올빽으로 넘겼고.
어딜 봐도 망해 가는 대장간 주인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넌 오랜만에 보자마자 하는 말이……!”
쯧- 하고 혀를 찬 마글로가 말했다.
“꼴이 뭐냐, 꼴이. 사업하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인마.”
그러다 슥 자기 차림과 머리를 만지작대더니 말했다.
“많이 이상하냐? 사실 나도 엄마가 만들어 줘서 입고 있긴 한데…….”
“…농담이죠. 깔끔하고 멀끔하고 딱 좋네요.”
여기서 ‘엄마’라는 필살기를 써 버리다니.
도진은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후우, 어쨌든. 짜식이 반가움 희석되게 말이야.”
마글로가 손을 내밀었다.
두툼한 손을 맞잡자 마글로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잘 왔다. 그간 잘 지냈고?”
“그럭저럭이요. 그런데 마법진이 작동을 안 하던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어어, 보다시피 우리 사업이 잘되고 있거든. 이번에 대량으로 납품하고, 필요한 원자재 좀 들여왔더니 과열돼서 그렇지.”
말을 하던 마글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넌 어디로 들어왔냐? 마법진은 내일이나 모레쯤 쓸 수 있을 거라 그랬는데.”
“우리 왔던 길로 왔죠.”
“…….”
마글로의 얼굴이 기괴해졌다.
‘미친놈’ 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인사를 나누는 사이 마을 드워프들이 단체로 나와서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걸 본 마글로가 도진에게 말했다.
“일단 조용한 데로 가자. 차도 한잔하고.”
이 아저씨 진짜 사업가 다 됐네.
드워프가 술이 아니라 차를 다 입에 담고.
도진은 마글로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집은 으리으리했다.
마글로가 직접 차를 타서 도진 앞에 내려놨다.
“…….”
차에서 술 냄새가 난다. 차에도 술을 타다니.
도진은 예의상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물었다.
“대장간은 창고가 됐던데요? 전에는 대장간 계속한다고 했잖아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일이 바빠지니까 망치 잡을 시간이 없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마글로가 물었다.
“그래. 여기 온 이유부터 듣자. 내 얼굴 보러 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바로 본론이에요?”
“쯧. 속 시원하게 듣는 게 편해서 그래, 인마. 망치 놓고 사업을 하려니 원. 협상이다, 뭐다 골 아픈 짓거리만 해 대니. 네 앞에서도 그러고 싶지 않다.”
마글로는 술이 들어간 뜨거운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말만 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도와 줄 테니. 우린 형제잖냐.”
“…….”
“씁. 외모가 다가 아냐.”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눈으로 했어, 이 자식아.”
도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달라지긴 했어도 좋은 쪽으로 달라져서 다행이다.
알 없는 안경에 올빽 머리는 좀 적응이 필요할 거 같지만.
도진은 경험치 이벤트가 진행되는 와중에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꺼내기 위해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간이 드워프를 찾을 이유가 달리 있겠어요? 제작 의뢰지.”
도진이 마글로, 아니 드워프들을 찾은 이유는 이번에 얻은 보상인 피 맺힌 저주의 원석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