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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룬드 대공이 뽑아낸 마법의 정수만 해도 엄청난 정보량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흘러들어온 정보의 대부분은 그대로 다시 흘러나가 소멸해야 정상이었다.
그 과정에서 찌꺼기처럼 남은 조각들로, 고유 마법 하나 정도를 배우는 데 그쳤을 거고, 그게 보상의 일부가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도진에게는 「진리의 서」라는 변수가 있었다.
진리를 탐하는 욕심 많은 책은 들어오는 마법과 정보를 닥치는 대로 삼켰다.
당장 이해 못 할 영역의 정보든 뭐든, 정보를 압축하고 블록화 해 마구잡이로 받아 적는다.
[▨▨▧▧▨▨▧▧▨▨▧▧▨▨▧▧▨▨▧▧]
모든 연산 능력을 그쪽으로 돌린 탓에 도진에게 보이는 글자며 홀로그램은 몽땅 다 깨져 버렸다.
조각난 글자와 홀로그램들이 비산하고, 제멋대로 활성화된 진리의 서가 뿌리는 황금빛 마력 입자들도 미친 듯이 흩날렸다.
가장 위험한 종류의 마약을 집히는 대로 꽂아 넣은 중독자가 죽기 직전에나 볼 법한 광경이다.
이것만으로도 도진은 버거운 상태였다.
한데 여기서 티룬드 대공은 진혈까지 도진에게 넘겼다.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그래서 다급히 넘긴 것이지만.
“……!”
그걸 받아야 하는 도진 입장에서는 버거움이 더해지는 꼴이었다.
‘무슨 일이야……!’
마비된 몸에 걸리는 압박감이 치솟고, 시각적인 폭주가 더욱 심해졌다.
답답함 속에서 도진은 필사적으로 견뎠다.
이대로 정신을 놓는 순간 부작용이 발생하든, 아니면 손해가 발생하든 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껴서였다.
[▨▨▧ ▧▨▧▧ 중 입▧▨.]
[현▨ ▨▨▨ ▨▨▨ ▨ 정▨ 블▨▨ ▨▨…….]
드디어 끝이 다가오는 듯했다.
깨졌던 홀로그램 창들이 조금씩 맞춰지고, 메시지도 제한적이지만 제대로 된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진은 알지 못했지만, 이는 뱀파이어 로드의 진혈 덕분이었다.
주입 직후에는 육체적, 정신적 부담을 치솟게 만든 주범이었으나 도진과 동화되면서 오히려 마법적 정보 처리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된 것.
카르네스 티룬드의 마법은 그가 뱀파이어의 왕으로서 존재하면서 발전시켜 온 결과물.
그런 만큼 뱀파이어 로드의 육체적, 정신적 정수라 할 수 있는 진혈은 그의 마법을 받아들이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게 당연했다.
[모든 정보 압축 및 저장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입력된 정보 중 현재 접근 가능한 정보가 극히 제한적입니다.]
[해당 정보에 대한 해석 작업을 시작합니다.]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으나 눈을 감든 뜨든 보이는 시스템 메시지는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이건 진리의 서고.’
몸도 조금이지만 가눌 수 있게 된 것을 느끼며, 도진은 정신부터 수습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어지는 메시지를 보기 전까지였다.
[뱀파이어 로드 카르네스 티룬드가 당신에게 자신의 진혈을 계승했습니다.]
[특성 「봉인된 진혈」이 생성되었습니다.]
이건… 또 뭐야?
완전히 마비가 풀리지 않았다면 육성으로 튀어나왔을 경악이었다.
‘그럼 방금 전에 갑자기 더 힘들어졌던 게……?’
그렇게, 도진이 자초지종을 대충 파악할 때쯤 시야가 점차 돌아왔다.
활성화됐던 진리의 서가 뿌리던 황금빛 마력 입자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뒤로 황금색 별 무리 가운데서 아버지를 안고 있는 딸이 보였다.
카린은 말없이 대공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미안하다.”
아버지는 그런 딸의 머리를 쓸어 주고 있었다.
슬프고, 또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맑은 눈물을 흘리며 카린이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딸이었음을, 이젠 안답니다.”
“…….”
더 줄 것을.
차라리 바보 같은 팔불출처럼 굴며 살 것을.
아마 그렇게 천 년을 보냈어도 모자람이 있어 후회했을 것만 같은데.
그 모든 마음을 담아 대공은 딸의 머리를 쓸었다.
바닥으로 맑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다시 웃게 됐고, 울 수 있게 됐다.
“…너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구나. 준 것에 지우는 부담이 무거워 미안하다.”
부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침묵하고 있던 도진은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과분하게 받았습니다.”
대공은 멀리 시선을 던졌다. 자신의 공국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 뒤 카린을 보았다.
그리고 도진을 보았다.
“잘 부탁한다.”
강렬한 눈빛과 무거운 말.
도진은 그 무게감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런 뒤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걱정-”
소리가 죽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손끝에 머물던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도 사라졌다.
카르네스는 직감했다. 드디어 마지막이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감았다 뜰 때마다 세상이 흐려진다.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거다. 믿을 만한 녀석이 있으니.
이런. 완전히 굳어 버리기 전에 딸을 놓아 주어야지.
카르네스는 카린의 머리에서 손을 떼려 했다.
떨어지려는 손을 카린이 잡아 눌렀다.
소리가 사라진 세상을 비집고,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 안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주실래요?”
“그럼. 물론이지.”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괴물들의 왕이 아닌 아버지이자 사람으로 잠들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카르네스는 아주 오랜만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사랑해요, 아빠.”
딸의 속삭임을 들으며.
카린은 한참을 석상처럼 굳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도진은 그런 그녀의 옆을 지켰다.
몇 시간 뒤 카린은 피 안개로 변해 아버지의 품에서 나왔다.
“해를 보고 싶어요.”
그리고 돌아서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카린이 날았다.
어두운 대륙의 그림자 밑을.
더욱 어두운 바다 위를.
그러다 거대한 땅덩이 밑을 지나 구름 위로 치솟아 올랐다.
하늘이 있는 곳으로 나온 카린과 도진을 달과 별이 맞이했다.
달빛과 별빛이 쏟아지는 설원을 지나 예전에 섰던 장소에서 두 사람은 태양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카린이 불쑥 말했다.
“감사해요.”
뭐가 고맙다는 걸까. 더 잘했으면. 다른 방법을 썼으면. 무슨 짓이든 했으면.
그런 마음뿐인 도진에게 카린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과 저에게는 예정된 이별이 있었어요. 그건 상상 이상으로 최악일 거고, 끔찍한 것이었겠죠. 조금 이른 이별이 슬프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아름답고 애틋할 수 있었잖아요.”
도진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착한 흡혈귀는 알고 이러는 걸까?
이러면 미안함이 더 커진다는 걸 말이다.
아마 모르겠지.
대공에게 받은 부탁의 무게가, 넘겨받은 모든 것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도 모를 거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다른 뱀파이어분들도 깨어나시겠죠. 그분들과 함께 이곳을 아주 아름답게 꾸밀 거랍니다.”
카린이 순백의 설원을 가리켰다.
“알 수 있답니다. 이제 우리는 피를 탐하지도, 태양을 피하지도 않아도 된다는 걸. 아버님이 남긴 선물이자 유산이에요.”
밤이 끝나고, 달이 물러난다.
새로운 날의 시작을 알리듯 태양이 떠올랐다.
설원과 카린의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도진은 그것을 눈에 담고 기억에 새겼다.
“자주 보러 와 주실 거죠? 제가 잘하고 있는지.”
“당연하지.”
카린은 더 이상 햇빛이 따갑지 않다며 좋아했다.
슬픔의 편린이 드러나지 않게끔 열심히 기뻐했다.
카린과 도진이 그러고 있는 사이.
힘이 강한 순서대로 다른 뱀파이어들이 가사상태에서 벗어났다.
오랜 시간 자아를 거세당한 상태로 지내왔기에 정신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폭주는 없었다.
본능이 그들에게 알려 준 것이다.
더 이상 피를 향한 끔찍한 갈증을 느낄 일도, 태양에 대한 바닥없는 두려움을 느낄 일도 없다는 것을.
깨어난 뱀파이어들은 대신 지독한 상실감을 느꼈다. 뱀파이어는 본능적으로 상위 개체에게 애정을 느끼며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그런 그들이기에 티룬드 대공의 부재는 사무치는 슬픔과 그에 비례하는 상실감일 수밖에 없었다.
참지 못할 상실감에, 깨어난 뱀파이어들은 날아올랐다. 현재 느껴지는 가장 높은 존재를 찾기 위해서.
“저건…….”
태양빛 아래를 날아오는 검은 점들.
그들은 말없이 카린과 도진 앞의 설원에 모여들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카린은 현존하는 가장 상위의 뱀파이어였다.
대공이 없는 이상 카린은 뱀파이어 전체에게 가장 강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저한테 뭘 맡긴 겁니까.’
문제는 아직은 인형에 더 가까운 뱀파이어들이 애정을 보내는 게 카린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최초의 피’를 물려받은 도진도 뱀파이어들에게 애정의 대상으로 느껴졌던 것.
이제야 자신이 받은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도진은 쓰게 웃었다.
‘도망칠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말란 말씀이시군요.’
도망칠 생각도 없었지만, 이건 쐐기를 박는 수준이다.
티룬드 대공은 저주를 봉인하는 쐐기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박아 버린 셈이었다.
* * *
도진은 자신이 얻은 보상에 대한 메시지도 살피지 못했다.
대공이 그렇게 떠난 마당에 어떤 아이템이 들어왔는지, 얻은 능력이 뭔지 살필 마음 자체가 들지 않아서였다.
정신을 차린 뱀파이어들과 그들을 챙기는 카린을 돕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그녀 옆을 지켰다.
사망한 파티원들에게는 잘 해결됐으니 걱정 말라는 메시지만 보내 놨다.
어차피 테레사나 소소가 있으니 정 궁금해 미칠 거 같으면 집으로 쳐들어와서 녹화본이라도 보겠지, 하는 생각으로 오롯이 카린에게 집중했다.
[도진아, 지금 밖에 난리 났어.]
덕분에 테레사를 비롯한 지인들의 메시지는 도진에게 닿지 않았다.
사건의 개요는 대충 이랬다.
저주의 형상이 등장하고, 그것이 중앙대륙을 향해 방향을 잡았을 때 뫼비우스에서 공지를 올린 것이다.
새로운 월드 보스가 등장할 예정이라고 말이다.
-???
-월드 보스 이벤트 또 함?
-뭐야? 예정이라고만 하고 다른 내용은 없는 거야?
갑작스러운 공지에 사람들의 궁금증은 극에 달했다.
이때쯤 누군가의 목격담이 올라왔다.
-지금 산 위에 있는 탑에서 던전 돌고 있거든? 근데 북쪽에 뭔 검붉은 게 줜나 올라오는데?
도진은 몰랐지만, 저주의 형상은 주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건 부유대륙 근방의 하늘을 검붉게 물들일 정도였다.
비교적 북쪽 가까이, 그것도 높은 고지대에 있던 유저 몇몇이 제한적이나마 그 이상 현상을 관측하고 스크린샷과 동영상을 동반해 제보하기 시작했던 것.
-월드 보스 관련된 현상 아냐?
-저쪽이면 부유대륙이잖아?
-이번 월드 보스는 부유대륙이나 북쪽에 나오나 보다!
-하긴. 이제 유저들 레벨도 많이 올라갔으니 메인 무대가 새로운 지역으로 옮길 때도 됐지.
-설마 보스가 뱀파이어는 아니겠지?
뭐가 됐든 새로운 콘텐츠, 그것도 대형 떡밥 냄새가 솔솔 나는 상황에 유저들의 기대는 높아져 갔다.
하지만 다음 날 공지가 올라오면서 뫼비우스에 대한 민심은 박살이 났다.
[예정되어 있던 월드 보스 레이드 이벤트가 취소되었습니다.]
뜬금없는 이벤트 취소 공지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