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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213화 (213/271)

213

모든 핵을 잃고 아홉 개로 분리된 저주의 형상들은 더욱 강력한 생존욕을 보였다.

【죽을 수 없어.】

【죽고 싶지 않아.】

【살아야 해.】

닥친 위협에서 도망치려는 듯 갈라진 저주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려 했다.

《그림자 사슬》

그것을, 땅에서 솟은 거대한 사슬들이 막았다.

아홉 개의 저주 덩어리들은 그림자로 만들어진 사슬에 꿰여 꿈틀거렸다.

분열됐다 해도 저주 덩어리들의 크기는 하나하나가 성에 버금갔다.

그런 것들이 사슬에 꿰여 버둥거리는 장면은 신화적이라는 표현을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제는 고통 없이 스러지거라.”

티룬드 대공은 사슬에 꿰인 놈들을 마무리하려 했다.

한데 꼼짝도 못할 것만 같던 저주의 형상들이 갑자기 그림자 사슬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꽈드득, 꽈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온몸으로 그림자를 씹어 흡수하는 놈들.

그걸 본 대공의 눈썹이 경련했다.

자신의 그림자는 단순한 어둠이나 그림자 속성을 지닌 힘이 아니었다.

천 년을 넘게 피와 어둠의 왕으로 살며 쌓은 업 그 자체다.

그런 걸 저렇게 간단히 부수다니.

‘…하긴 저것이 나의 업이자 과오이니.’

티룬드 대공은 새로운 마법을 준비했다.

“너를 만든 내가 직접 너의 안식이 되겠다.”

티룬드 대공의 몸에서 어둠이 흘러넘쳤다.

《그림자 영역》

흘러넘친 어둠은 지상으로 가라앉아 하나의 결계이자 영역을 만들었다.

솟아오르는 어둠으로 빚어진 성채는 티룬드 대공이 품고 있는 자신만의 세계 그 자체였다.

대공이 오른쪽으로 손을 뻗었다.

같은 방향으로, 땅에서 솟은 수많은 그림자 칼날이 지상을 뒤엎었다.

콰드드득.

칼날은 경로에 걸리는 모든 걸 분쇄했다.

어둠이 저주를 가르고, 선혈 줄기가 수백 미터 높이까지 치솟았다.

【나는, 죽지, 않아.】

【우리는, 살아야, 해.】

지독한 집념을 보이는 저주의 형상과 티룬드 대공의 전투는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땅에서는 어둠과 피가 치솟고, 하늘에서는 온갖 원소가 다채로운 색을 뿌렸다.

저주는 대공의 마법을 씹어 삼키며 힘을 키웠고, 제 몸을 재료로 삼아 피와 어둠의 사슬을 만들어 휘두르며 반격했다.

【나한테 살라고 했던 건 너였잖아아아아-】

자신을 공격하는 대공이 원망스럽다는 듯이 절규하는 저주의 형상.

그걸 보는 티룬드 대공의 얼굴에 죄책감이 스쳐 갔다.

공방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명백해져 간다.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저건… 나다.’

딸의 죽음을 앞두었던 그 순간.

그날의 자신이 저기에 있다.

대공은 딱 자신이 입힌 피해만큼, 자신의 힘을 흡수해 수복하는 저주의 형상을 보며 결론을 내렸다.

다른 자는 몰라도 자신은 저것을 저지할 수 없다.

스스로의 원죄를 스스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방법이 있다면, 그건 단 하나다.

‘충분히… 긴 시간이었지.’

스스로를 내려놓는 것.

티룬드 대공은 자신의 마지막을 정했다.

“나를 대가로 지불하여 얼마만큼의 기적을 사들일 수 있는가.”

티룬드 대공은 자신의 마법회로를 하나하나 파괴했다.

회로가 파괴되며 발생하는 힘을 마법진으로 쌓는다.

마법진이 담은 마법의 개요는 ‘거래’.

힘, 업, 생명, 마력… 대공이 지불할 수 있는 것들이 차례대로 지불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주의 형상은 대공을 향해 원망을 쏟아냈다.

대공은 그 모든 원망을 귀담아들었다.

‘살아 달라 말한 주제에 이제는 사라져 달라 하고 있으니.’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다.

딸인 카린에게.

그녀를 살리기 위해 괴물로 만들어 버렸던 자들에게.

미래를 돌려주기 위해서는.

《영원한 안식》

완성된 마법진이 하늘에서부터 지상을 훑으며 모든 걸 삼켰다.

소리는 없었다.

소리마저도 강력한 봉인 술식에 잡아먹혔기 때문이다.

대공이 주먹을 쥐었다.

그것에 맞춰 마법진이 한 점으로 축소됐다.

【…….】

존재를 걸고 세계와 거래를 하며 완성한 봉인 술식임에도 밖으로 새어 나오는 사념이 느껴졌다.

시간이 흐르면 얼마 안 가 봉인을 부수고 탈출을 감행하겠지.

결국 더 많이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대공은 카린이 느껴지는 방향을 보았다.

그런 뒤 말없이 마지막 마법을 시전했다.

자신을 봉인의 쐐기로 바꾸는 마법을.

검은색 점이 된 봉인을 향해 쐐기가 내리꽂혔다.

* * *

저주와 대공의 대결이 심상치 않다는 걸 도진은 오래지 않아 알아챘다.

순식간에 마무리될 줄 알았던 전투가 길어지고, 대공의 힘을 저주가 흡수하며 박빙의 대결이 펼쳐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해서, 도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필사적으로 찾으려 했다.

하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 일이 터졌다.

티룬드 대공이 자신을 대가로 마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방향을 도진은 경악을 담아 바라봤다.

‘설마…….’

티룬드 대공의 태양과도 같던 마력이, 그 존재감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 의미를 도진은 너무나 잘 알았다.

“대공!”

짜인 판이다.

유저의 역할은 아홉 개의 핵을 부수는 데까지.

그다음은 개입할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다.

‘이만한 미래를 이만큼 바꾸려면, 이 정도는 지불해야 한다.’라고 미리 정해 둔 듯이.

도진은 그게 너무나 싫었다.

‘그 개고생을 했는데 겨우 이런 결말이라고!’

언제나 해피엔딩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걸 바라기에.

“멈춰!”

도진은 달렸다.

딱히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뭐라도 해 보기 위해서 달렸다.

안전한 곳을 벗어난 도진을 향해 어둠과 피로 이루어진 괴물들이 달려들었다.

땅에서 일어난 시체 같은 것들을 도진은 파괴하고 부수며 나아갔다.

그러나 곧 티룬드 대공의 마법이 발동되고.

【흐아아…….】

숨 새는 소리를 내며 도진을 공격하던 것들이 소멸했다.

그런 뒤.

우우웅-

대공은 스스로를 봉인의 쐐기로 만들어, 불완전한 매듭을 완전히 지어버렸다.

결말이 났음에도 도진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아직, 티룬드 대공이 저곳에 있었다.

“아.”

가까이 다가온 도진을 보고는 하는 말.

대공이 준 눈에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대공의 존재감이 보였다.

실시간으로 봉인과 동화되어 가는 모습이다.

도진은 울컥하는 마음을 담아 말했다.

“꼭 이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시간만 충분히 벌어 주셨어도 분명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겁니다.”

말하면서, 도진은 대마법사의 등장을 곧 승리로 착각한 자신을 탓했다.

티룬드 대공은 작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게 최선이다. 이것은 나만이 마무리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대공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시스템 메시지는 분명 저주의 형상에게서 ‘영원’을 박탈하였다 했지만, 그게 곧 아무나 그것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의미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 이루어진 이 방법만이 이 싸움을 끝낼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카린은요.”

그러나 머리로 납득하는 것과 마음이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다.

“…….”

도진의 말에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바라봤다.

그곳엔 카린이 있었다.

대공의 비호 아래 저주의 영향을 가장 덜 받아 왔던 그녀는 가사상태를 벗어나는 것도 가장 빨랐다.

“아버님!”

카린은 아연실색한 얼굴을 하고 날아와, 무너지듯 지상에 착지했다.

“…괜찮다.”

대공의 말에 카린이 눈물 없이 울며 말했다.

“무엇이요! 전혀 괜찮지 않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아버지가 사라지기 직전이란 건 알 수 있었다.

티룬드 대공은 딸을 달래 주고 싶었다.

덜덜 떠는 어깨를 잡고서 두려워할 것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너를 살리기 위해 했던 일을, 후회하지 않아.”

카린이 숨을 멈추었다.

“그 순간 앞에 몇 번을 서더라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거란다.”

부드럽고 자상한 어투였다.

“천 년을 넘게 존재하며 너를 위해 한 일들 중에 후회로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어.”

“안 돼요. 이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후회가 있다면, 조금 더 일찍, 충분히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던 것.

조금이라도 더 빨리 카린이 진짜 웃음을 짓게 해 주지 못했던 것.

그런 것들.

그래도 다행이다.

‘나의 죄는 여기에 묻힌다. 그리고 너에게는 미래가 열리고.’

또 하나.

‘천 년이 넘게 걸렸지만, 네가 웃을 수 있게 된 걸 확인했으니 되었다.’

티룬드 대공은 시선을 돌렸다.

딸에게 진짜 웃음을 찾아 준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

도진에게도 남길 말이 있었다.

“그런 얼굴 할 것 없다. 그대가 없었다면, 그대가 해 준 일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의 끝은 파국이 전부였을 테니.”

“그-”

도진은 반박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해 봐야 소용없는 말로 대공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마음을 읽은 대공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다. 조금은 더 자주 얼굴을 비춰 주길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티룬드 대공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딸이 어렵게 얻은 친우를 쉬이 잃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이기심이니,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게 무슨 말씀…….”

무슨 소리인지 몰라 반문하는 도진에게 티룬드 대공 위에 생성된 마법진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카르네스 티룬드에게 남은 모든 것이었다.

[뱀파이어 로드 카르네스 티룬드의 고유 마법 체계가 입력되었습니다.]

[저장 가능한 용량을 초과하였습니다.]

[정보 압축 작업을 실시합니다.]

[해석 가능한 정보가 매우 제한적입니다.]

도진은 오랫동안 「적야」를 보유하고 있었다.

마안이 몸에 동화되면 동화될수록 뱀파이어 로드 카르네스 티룬드의 유전 정보도 계속해서 입력된 거나 마찬가지.

그걸 이용해 대공은 자신에게 남은 것들을 도진에게 이식하고 있는 것이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해일은 감히 인간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대공조차 일부나마 받아들이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넘겨주는 것이었다.

거기다, 대공은 다른 것까지 도진에게 주려 하고 있었다.

티룬드 대공의 눈에서, 진혈이 방울방울 눈물처럼 흘러나왔다.

‘인간은 뱀파이어의 친구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짧게 살지.’

대공은 자신의 진혈마저 도진에게 주려 하고 있었다.

딸을 두고 떠나는 아비의 마지막 선물로서.

‘마안을 만들어 주길 잘했어.’

마법적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꼼짝도 못 하는 도진에게, 원래도 저주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던,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뱀파이어 로드의 진혈이 흘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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