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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212화 (212/271)

212

눈을 뜬 카르네스 앞에는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길고 긴 일평생을 통틀어 가장 과분했던 여인.

리비네 티룬드. 아내였다.

“저를 사랑하시나요?”

가끔 자신의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을 때 해 오던 질문이다.

장난기가 담긴 반달 같은 눈웃음을 짓고 다가와, 불쑥 물어보던 말.

그럴 때마다 자신은 입을 꾹 다물곤 했었다.

“저를 사랑하시지요?”

그러면 그녀의 웃음은 더욱 짙어지곤 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몇 번인가 더 묻다가…….

“역시 부끄러움이 많으세요. 그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저는 제가 아주 많이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아니까요.”

이렇게 말하곤 했었지.

너의 질문에 매번 같은 대답을 돌려줄걸, 하고.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는지… 아마 너는 모르겠지.

“사랑한다.”

카르네스는 눈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을 향해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을 뱉었다.

여인은 눈을 크게 떴다.

“……?”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표정.

“꿈……?”

카르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꿈은 자신이 꾸고 있다.

“대, 대공!”

카르네스는 리비네를 끌어안았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 보는 따스함은 행복이면서, 동시에 지독한 슬픔이었다.

행복하면서 슬픈 환상 속에서, 카르네스는 자신이 살았던 시간을 다시 한번 살았다.

그 속에서 카르네스는 리비네의 질문에 항상 같은 대답을 돌려줬다.

“대공, 저를 사랑하시지요?”

곤란해하는 얼굴을 기대할 때보다도 훨씬 더 큰 기대를 품은 눈을 보며.

“사랑한다.”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러면 리비네는 예의 그 반달을 그리는 눈웃음으로 행복을 표현했다.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카린이 태어났다.

카린이 걸음마를 떼었다.

리비네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울지 마세요.”

이전에도, 지금도, 카르네스는 울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전에도 지금도 리비네는 그에게 울지 말라 말했다.

살리고 싶다. 하지만 이 환상 속에서 카르네스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저를… 사랑하시지요……?”

삶의 끝을 앞둔 리비네가 묻고.

“…사랑한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앞으로도. 천 년이 지나도 똑같이.”

대공이 답했다.

“다행이에요.”

리비네는 자신의 배 위에 작은 머리를 얹고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카린을 어루만졌다.

“카린이 어른이 될 때쯤에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겠죠? 그러니 저에 대해서는 좋은 이야기만 해 주셔야 한답니다.”

“…….”

“이렇게 일찍 떠나는 못된 엄마지만, 정말 많이 사랑했다고. 그렇게 전해 주셔야 해요. 제가 미움 받지 않도록 말이에요.”

카르네스는 눈물을 흘렸다.

“카린을 부탁해요.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한답니다.”

리비네가 떠났다.

카린의 키가 자랐다.

그러다 어느 날 카린이 죽은 새를 품고 다가왔다.

“아버님, 새가 움직이지 않아요. 아버님께서 치료를 해 주세요.”

전에도 겪은 일이다.

그때는 이렇게 답했었다.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릴 수는 없다. 그게 이 세상의 섭리이자 법칙이다.」

그리고 카린은 울었었지.

카르네스는 카린에게서 죽은 새를 받아들었다.

“안타깝지만 이 새는 우리 곁을 떠날 것 같구나.”

“…….”

카린이 울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새의 영혼은 저 멀리, 엄마 곁으로 날아갈 테니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 곁으로요?”

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이 새가 제 말도 어머니께 전해 줄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다행이에요!”

카린은 제 방에서 편지를 들고 나왔다.

카르네스는 카린과 함께 새를 묻어 주었다.

편지는 새와 함께 묻혔다.

“어머니께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할 수 있어 다행이에요. 절 걱정하실까 매일 걱정이었거든요.”

“…걱정할 것 없다. 리비네는 언제나 널 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카르네스는 제대로 된 아비 노릇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카린에게, 리비네를 앗아간 병마가 찾아왔을 때도 이번에는 곁을 지켰다.

마법으로도, 신에게 빌린 기적을 파는 신성 마법으로도 어쩌지 못한 병마는 이번에도 같은 끝을 불러왔다.

전과 같다.

카린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주변으로 보이는 건 익숙한 마법진이었다.

세계가 회색으로 변했다.

【네가 원한다면 모든 걸 다시 할 수도 있다.】

불쑥 솟아오른 피로 이루어진 인영이 말을 걸어왔다.

【원한다면 다시 돌려주마. 이번에는 아내도, 딸도 너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몇 번이고 행복을 곱씹을 수 있을 거다.】

유혹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공 본인이었다.

환상을 보자마자 알았다. 이건 자신의 바람이 만들어 낸 거란 사실쯤은.

대마법사의 자아는 강력한 것이어서, 대마법사 본인을 가두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영원히 행복한 시간 속에 갇힐 수 있어. 네가 바란다면 아주 쉽게 이루어질 행복이다.】

이미 겪은 유혹이었다.

리비네를 보았을 때 이미.

“결국 환상이다.”

【환상이란 사실마저 잊을 수 있잖아? 자각하지 않고 이곳을 자신만의 현실로 만드는 것쯤, 너에게, 아니 우리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야.】

카르네스, 티룬드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떨쳐 내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나 이미 결론이 난 문제다.

“내가 한 약속은 아직 유효하다.”

그리고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카린을 부탁한다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후 영원히 그러했다.

회색 세계에 색이 돌아왔다.

카르네스는 잠들어 있는 카린을 보며 마법을 발현했다.

수없이 후회한 일이었으나 같은 지점에 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큰 죄악이라 해도, 딸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은 몇 번이고 이 죄악을 반복할 것이란 걸.

행복했던 세상이 부서졌다.

* * *

의식이 돌아온 티룬드 대공은 가장 먼저 자신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움직일 수 없군.’

육체가 말을 듣지 않았다.

회로도 많이 망가져 있다.

대마법사인 그는 바로 저주가 분리되면서 발생한 부작용이라는 걸 알아챘다.

이대로는 다시 움직이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터.

대마법사는 의식을 확장했다.

그러다 도진의 눈을 발견했다.

자신의 진혈로 만든 마안이자 마법회로.

대공은 즉시 도진의 마안에 접속을 시도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대공은 자신의 의지를 도진에게 전하는 단계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현재 어떤 상황인지도 파악했다.

‘저걸 소멸시키지 못하면…….’

뱀파이어들은 가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공은 간접적으로 도진을 도왔다.

의식 일부를 마안에 옮겨 마법 연산을 돕는 것만으로 도진의 캐스팅은 더욱 빨라졌고, 마나 효율도 어마어마하게 높아졌다.

“뭣?”

도진은 6성 마법이 즉시 시전과 다를 바 없는 속도로 완성되어 발사되는 걸 보고는 비명 비슷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곧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하고, 바로 적응에 들어갔다.

‘시전 속도랑 위력, 마나 효율에 마법회로 점유율까지 전부 다 미친 듯이 올라갔다.’

이건 「초월」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역시 대마법사다. 간접적인 개입만으로 이런 차이를 만들다니.

대마법사 겸 뱀파이어 로드를 서포터로 얻은 도진은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도진은 말 그대로 불 뿜는 포탑 그 자체가 되었다.

【그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하게 상승한 DPS를 무기로 저주의 형상을 주저앉히고.

“길 뚫을 테니까 멀리 떨어지지만 마!”

충분한 화력은 탱커 없이도 모든 걸 가능하게 했다.

내부로 진입하면서 길을 뚫는 것부터 핵을 파괴하고 탈출 루트를 확보하는 것까지 도진은 혼자서 감당해 냈다.

물론 마나 효율이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소모는 발생하기 마련. 아끼고 아꼈던 「초월」과 「한정회귀」까지 썼으나 저주의 형상 여전히 움직였다.

“…….”

털썩.

말없이 소소가 쓰러졌다.

마나 고갈 상태가 지속되면서 쌓인 피해 누적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얼마 안 가 탄토도 쓰러졌다.

힐러의 부재는 근접 딜러에게는 극복하기 힘든 난관이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마지막 한 개만 남아서.”

파티원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도진 혼자 남게 됐지만, 적이 지닌 심장도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남은 마나를 가늠했다. 충분하다고는 못 하지만, 절망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도진은 마법을 시전했다.

이미 몇 번이나 주저앉힌 놈이다.

계산은 정확했다.

【그아아아아아……!】

주저앉는 모션이 나왔을 때 이미 도진은 달리고 있었다.

염동 도약 한 번에 수많은 적을 뛰어넘고, 가로막는 적들을 태워 없애며 돌파했다.

철컥.

건틀렛 쥐는 소리가 울렸다.

아껴 둔 파멸 룬이 마법진에 깃들고, 마지막 검은 심장이 폭발했다.

[저주의 형상이 지닌 모든 핵이 파괴되었습니다.]

됐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도진은 한 줌 남은 마나를 써서 탈출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저주의 형상이 아홉 개의 형상으로 분열합니다.]

암담한 메시지가 떴다.

그걸 본 도진은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예상을 좀 벗어나라고. 제발.’

부정 탈까 봐 생각도 않으려 애쓰긴 했지만, 여기서 끝날 거 같지가 않더라니.

하지만 그렇다고 도진은 절망하지 않았다.

방금 전.

마지막 핵을 터뜨리는 순간 마안에 깃들어 있던 티룬드 대공의 의식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단순히 버틴 수준은 넘었습니다.’

때가 된 거다.

버티라고 했던 티룬드 대공이 말한 때가.

쿠웅.

중력이 무거워졌다.

아니, 중력이 아니다.

주변의 마나가 일제히 누군가의 영향권 아래로 복속되면서 느껴지는 압박감이었다.

검은 안개가 나타났다. 익숙한 납치의 순간이었다.

어느새 도진은 저주의 형상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안전한 장소에 있었다.

“잘 버텼다.”

먼 거리와 지독한 소음을 뚫고 명료하게 전해지는 목소리.

일부러 육성으로 전해진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

도진은 폐부에 쌓여 있던 숨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진짜 때려죽인다고 해도 못 움직일 거 같았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

정확히는 유저의 시간은 여기까지다.

도진과 카린이 처음 만난 순간부터 조금씩 방향을 꺾었던 뱀파이어의 운명.

그러나 도진은 단순히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

마침표를 찍는 건 이야기를 시작한 카르네스 티룬드의 몫이었다.

도진은 거꾸로 선 하늘에서 자신의 과오를 내려다보는 사내를 보았다.

지금부터는 대마법사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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