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도진은 보자마자 확신했다.
‘저건 막거나 피하라고 만든 게 아닌데.’
밀려오는 해일을 쳐다본다고 살길이 생기지 않는다.
막막함만 커질 뿐이지.
막을 각도, 피할 각도 보이지 않는 공격이 닥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변을 살피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적의 공격에서 날 구해 줄 오브젝트를 찾아야 했다.
‘건물은-’
아니다.
손에 닿는 족족 형편없이 뭉개지는 걸 보아 건물 뒤로 숨는 건 자살행위.
다른 게 필요했다.
‘저거다.’
도진은 건물과 달리 꼿꼿하게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해일에 삼켜지는 첨탑을 발견했다.
그림자 공국 곳곳에 박혀 있는 말뚝과도 같은 첨탑으로, 대공이 마법을 유지시키기 위해 설치해 놓은 구조물이었다.
“이리 와!”
도진의 외침은 파티의 패닉 상태를 단번에 해결했다.
그만한 신뢰가 쌓였기에, 파티원들은 도진의 한마디에 바로 반응했다.
앞서 달리는 도진을 따라 뛰는 셋.
도진은 첨탑까지 최단 거리를 쪼개기 위해 담벼락을 밟고 2층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걸 본 테레사가 소소를 챙기려 했다.
“소소-”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하지만 탄토가 먼저 움직였다.
소소를 짐짝처럼 휙 어깨에 얹고서 도적 스킬을 활용해 도진과 같은 루트를 밟고 지붕 위를 달렸다.
테레사는 ‘그럼 나도!’ 하며 호기롭게 도약했다. 하지만 도약이 지닌 힘은 충분했으나 정확도가 부족했다.
좁은 담벼락 윗부분을 박차려고 뻗은 테레사의 발이 터억- 하고 걸려 버렸다. 테레사는 쿠당- 하고 바닥에 처박혔다가, 개구리 도약하듯 펄떡이며 다시 일어났다.
“아오!”
결국 테레사는 그냥 눈앞에 보이는 건물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문이고 창문이고 박살을 내면서 도진이 달리는 방향을 따라갔다.
다행히 숨을 만한 첨탑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도진 일행은 느릿느릿한 핏물 해일이 닥치기 직전 첨탐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철썩- 하고 첨탑과 저주의 핏물이 만나는 소리가 울렸다.
“후아- 주, 죽는 줄 알았네. 난 방패라도 발동하려고 했었거든.”
가장 늦게 첨탑에 들어온 테레사가 가슴을 쓸며 말했다.
“그건 아껴.”
“알았어. 도진이 네가 쓰라고 할 때까지 아낄게.”
바깥에서는 파지지직- 하는 마나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첨탑을 보호하는 마법과 핏물이 지닌 저주가 서로 상잔하는 빛이었다.
도진의 눈에는 첨탑이 지닌 마력과 마법이 소모되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일회용이란 말이지.’
뭐가 됐든 저놈의 공격을 이걸로 막아 내면 같은 첨탑은 두 번 쓰지 못하게 되어 있는 거 같았다.
우지직-
아니, 그것뿐만 아니다.
“잠깐 저기 위에……!”
탄토가 비명처럼 내지른 소리는 무너지는 위쪽 때문이었다.
견디다 못한 첨탑 꼭대기 부분이 뚝 하고 부러진 것.
일부가 부서짐에 따라 연쇄적인 붕괴가 시작됐다.
그렇다고 바로 탈출할 수도 없었다.
“타이밍 맞춰서 나갈 거니까 준비해!”
도진은 위에서 낙하하는 파편을 피하거나 막아 내며 말했다.
그렇게 견디고 견디다, 첨탑의 내구도가 완전히 소모되어 갈 때쯤.
“지금!”
도진의 신호에 따라 4명 전부 첨탑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직도 핏물 손이 휩쓸고 지나가며 남긴 피의 범람이 후폭풍처럼 남아 있었지만,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다.
빠져나오기 무섭게 쿠우웅- 하고 첨탑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이른 타이밍에 탈출했으면 공격에 노출되어 죽었을 거고, 늦었으면 깔려 죽었을 것이다.
“거지 같네, 진짜.”
이번에는 테레사에게 운반 당한 소소가 진심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투덜대는 것과 별개로, 소소는 파티가 입은 피해를 빠르게 복구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도 도진과 구르면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된 지 오래였다.
“바로 움직이자.”
생명력이 회복되자마자 도진은 마법회로를 활성화했다.
저주의 형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난한 싸움이 시작됐다.
이동하는 저주의 형상을 공격하고, 반격해 오는 걸 막아 내고.
그러다 가끔 덮쳐오는 커다란 공격 패턴을 겨우겨우 받아넘기고.
다시 핏물 다리를 터뜨려 이동을 방해했다.
다행히 저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피해는 뱀파이어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지만 공국은 점점 쑥대밭이 되어 갔다.
그에 비례해 놈은 자신의 원하는 장소와의 거리를 착실히 줄여 갔다.
그러는 동안 저주의 형상은 몇 번이나 공격 패턴을 바꿨다.
꼭 학습을 하는 것처럼, 놈은 갈수록 까다로운 공격을 감행했다.
“이거 죽기는 하는 거겠지?”
현재는 무한히 쏟아져 나오는 핏물과 저주로 뭉쳐진 핏덩이 몬스터를 처치하는 중이었다.
탱커인 테레사는 피 웅덩이에 빠졌다가 건져진 몰골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마.”
대답하는 도진의 목소리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최대한 마나를 관리하고 있긴 하지만, 마냥 화력을 아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소모가 쌓여 가는 건 필연적이었다.
“누난 괜찮아?”
소소에게 묻는 것이었다.
소소가 입가를 쓱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안색이 파리한 것만 봐도 상태가 안 좋은 게 느껴진다.
탄토는… 그나마 가장 열심히 싸우는 중이다.
‘어쨌든 기회를 봐서 다리를 더 파괴해야 돼.’
파티 전체가 지쳐 간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쏟아지는 쫄들만 상대하다가는 끝이 없었다.
도진은 범위 마법으로 공간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파티를 전진시켰다.
그런 뒤 억지로라도 여유를 만들어 틈틈이 거대한 다리에 피해를 가했다.
퍼어엉-
다리 하나가 더 파괴됐다. 아니,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다리가 한꺼번에 터졌어요!”
탱커보다도 더 위험한 위치에서 전투를 치르던 탄토가 외쳤다.
그의 말대로, 저주의 형상에 달려 있는 다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그우우우우우…….】
깊고 우울한 소리와 함께 저주의 형상의 바닥에 몸을 뉘였다.
쿠우우웅- 하는 울림과 함께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저주의 형상의 이동을 일시적으로 막아 냈습니다! 곧 저주의 핵이 드러날 겁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저주의 형상 옆으로 커다란 상처가 생겨났다.
흡사 거대한 어류의 아가미 같은 모습으로 벌어진 상처 안쪽에서 엄청난 마력 반응이 느껴졌다.
뜬 메시지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본 테레사가 ‘우아아아!’ 하는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방패를 앞세우고, 가로막는 핏물 덩어리들을 밀어내면서.
탄토도 그녀 근처를 달리며 도끼와 단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이 뚫는 길을 도진과 소소가 따랐다.
사이드에서 치고 들어오는 적들은 도진이 처리했다.
파티는 적들을 뚫고 나가 저주의 형상 내부로 진입했다.
“으윽, 쫄이 더 세졌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내부에 진입하자 벽에서 쫄몹이 생성됐다.
핏물로 만들어진 칼날과 창, 채찍 등도 수시로 튀어나와 도진 일행을 노렸다.
[저주의 형상이 힘을 회복하려 합니다.]
필사적으로 길을 뚫는데 주변이 진동했다.
저주의 형상이 다시금 몸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점차 공간이 좁아지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상처가, 균열이 아무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에서 저주의 살에 파묻혀 죽게 될 터.
“뚫어!”
도진이 전방에 마법을 날리며 외쳤다.
퍼어엉- 하고 범위로 적을 휩쓰는 화염.
순간적인 화력으로 벌어진 틈을 비집고 탄토가 미친 듯이 치고 나갔다.
막 생성되어 벽에서 떨어져 나오는 적을 찍고 베며 시간을 번다.
도진은 그런 탄트를 앞질러 나갔다.
달려드는 적들은 몸에 두른 화염과 전격으로 태워 죽였다.
「적야」에 비치는 세상이 꼭 검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저주의 핵이 내뿜는 마력은 그만큼이나 강렬하면서도 음울했다.
‘찾았다!’
드디어 수많은 혈관처럼 보이는 선과 연결된 검은색 덩어리가 있는 장소가 나왔다.
심장처럼 박동하는 썩은 핏덩이를 향해 도진은 공격을 퍼부었다.
파멸 룬을 덧씌운 화염포의 화력은 순식간에 도진의 목적을 이뤄 냈다.
벽, 천장, 바닥, 모든 게 지진이라도 난 듯 진동한다.
핵이 파괴되면서 저주의 형상이 실질적인 피해를 입어서였다.
하지만 그게 곧 전투의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저주의 형상이 지닌 아홉 개의 핵 중 하나가 파괴되었습니다.]
메시지를 본 도진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같은 생각을 공유했다.
‘미친.’
다른 말이나 단어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핵이 있던 자리에서 새살이 돋아나는 걸 보고도 반응이 늦은 건 그런 이유였다.
“…도망쳐!”
뒤늦게 이 공간이 사라질 거란 사실을 깨닫고 탈출을 시작했다.
겨우겨우 탈출에는 성공했으나 기쁘지 않았다.
저주의 형상은 핵을 파괴당하고도 멀쩡히 일어나 이동을 재개했다.
‘하나라도 부쉈다’라며 희망을 찾기에는 남은 여덟이 주는 압박감이 너무나 컸다.
아득한 크기의 적을 보며, 도진은 형언하기 힘든 막막함을 느꼈다.
마치 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방에 갇힌 것 같다.
한 방울씩 몸 안의 피가 새어 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천천히 정해진 재앙이 한 걸음씩 다가온다.
‘막아야 돼. 막아야 하는데…….’
싸우고 또 싸우면서, 두 번째 핵까지 파괴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하고, 활용할 수 있는 건 다 활용했다.
번갈아 가며 생명력과 마나, 체력을 회복해 가며 싸워야 할 지경이 됐다.
그러다 테레사가 사망했다.
탱커의 고립, 힐러의 마나 공백, 딜러들의 화력 공백이 겹쳐지며 발생한 사고였다.
“레사야!”
하얗게 질린 소소의 비명.
그건 파티가 지르는 비명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장기전에서 탱커의 부재는 작지 않은 재앙이 될 것이기에.
“탄토 씨! 뭉쳐서 힐러부터 지켜야 돼요!”
도진은 전선을 물렸다.
든든했던 탱커가 사라진 이상 전처럼 적극적으로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유물 방패라도 발동했으면…….’
아끼고 아끼던 그건 결국 쓰지도 못했다.
아마도 체력의 한계에 부딪혀 블랙아웃이라도 온 모양이다.
흔한 죽음이다. 의식이 날아간 사이에 순간적으로 죽어 버리는.
테레사의 죽음 이후 전투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도 도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희망 따위 보이지 않는다 해도, 놓아선 안 된다.
놓는 순간 모든 게 끝나니까.
한 걸음 더, 한 걸음만 더. 보이지 않는 이 앞에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포기하지 않는 한 끝은 아닌 것이다.
【버텨라.】
악착같이 매달리고 있는 도진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머릿속… 아니, 눈 쪽이다.
「적야」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도진은 손으로 눈가를 쓸어 봤다.
만지는 감각만 있고, 눈이 만져지는 감각은 없었다.
부분적인 마취라도 된 듯이.
‘내 통제를 벗어났다.’
이런 일이 가능하고, 버티라며 말을 걸어 올 존재는…….
“대공이십니까?”
이 눈을 만들어 준 대공밖에 없다.
【조금만 더…….】
노이즈가 끼어 있고, 희미한 소리지만, 희망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이미 충분히 힘들게 버티고 있지만, 좀 더 버텨 보겠습니다.”
그러니 뭐가 됐든 빨리 해 주시길.
도진은 다시 한번 눈을 매만진 뒤 새로운 마법을 장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