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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209화 (209/271)

209

LOST에 접속한 도진은 대공이 내준 호화로운 침실에서 나타났다.

로그아웃한 장소가 이곳이니 당연한 일이다.

흡혈 저주를 해결할 수단을 손에 넣자마자 도진은 부유대륙으로 왔다.

물론 해주(解詛) 수단이 생겼다고 바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걸 준 빛이 거듭해서 위험성을 경고한 만큼 사용 전 티룬드 대공과의 논의는 필수적이었다.

도진은 해주 마법진의 위험성을 가감 없이 전달했고, 티룬드 대공은 그 말을 들은 뒤 본인이 직접 분석을 하겠다 말했었다.

‘오늘은 분석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도진은 호화로운 방을 나섰다.

적막하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티룬드 대공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젠 안내나 대공의 납치 없이도 원하는 곳을 찾아갈 정도로 이곳에 익숙해졌다.

목적지에 도착한 도진은 노크를 하려 했다.

하지만 도진이 손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마법진을 유심히 살피는 대공의 모습이 보였다.

“왔군.”

티룬드 대공이 시선은 여전히 마법진에 고정한 채로 인사를 건네 왔다.

“예.”

인사를 받은 도진은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분석은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도진의 물음에, 티룬드 대공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대공의 눈에 씌워져 있던 마법이 해제되며 빛이 산란했다.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한계까지는 분석이 끝났다. 아무래도 그 이상은… 마법이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인 거 같군.”

“어디까지 보셨습니까?”

“내가 볼 수 있는 것, 그리고 이해가 가능한 영역은 이 마법진이 저주를 떼어 놓는 기능을 하도록 설계된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지, 부작용은 어떤 게 있는지는…….”

대공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예상하긴 했다. 알아내는 게 힘들 거라는 것쯤.

그래도 티룬드 대공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 시스템의 장벽을 넘는 건 힘든 모양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구해 온 건 도진이지만,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건 도진이 아니었다.

위험을 감수할지 말지는 뱀파이어의 운명을 짊어진 티룬드 대공이 정할 일이다.

하지만 대공 입장에서는 자기 멋대로 정할 일이 아니라고 느껴지겠지.

‘본인만 위험을 감수하는 게 아니니까.’

흡혈 저주를 푸는 일은 뱀파이어라는 종 전체의 운명을 건 도박과도 같다.

책임감 하나로, 자신의 백성들을 이지 잃은 인형 신세로 만들어 가면서까지 놓지 못하고 있던 게 티룬드 대공이었다.

“며칠만 더 지켜보도록 하지. 조금 더 분석을 해 보면 무언가 나올지도 모르니.”

대공은 다시금 눈에 마법을 두르고 마법진을 바라봤다.

사실 이미 보고 알아낸 것 외에 다른 건 알아낼 수 없을 거다.

그건 다른 누구보다 대공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공은 뚫어져라 도진이 가져온 마법진을 살폈다.

그에게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 * *

‘다른 차원의 존재에게 받았다고 했었지.’

벨라와 라베스가 동시에 얽힌 던전에서 마주친 존재였다고.

누가 들어도 믿기 힘든 허무맹랑한 소리다.

하지만 티룬드 대공은 도진이 한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마법은 그 정도 허무맹랑한 배경 이야기가 있어야 납득이 갈 만큼의 불가해(不可解)였다.

‘저주를 떼어 낸 뒤에 감당하는 건 당사자의 몫. 이건 곧 분리된 저주가 감당해야 할 존재가 된다는 뜻이겠지. 최악의 경우 그릇에서 나온 저주가 더 넓게 퍼질 수도 있다.’

대마법사의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해 유추한 ‘부작용’은 전부 최악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한 유추 끝에 티룬드 대공이 도달하는 지점은 언제가 같았다.

‘시도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이것은 첫날 마법진의 안을 들여다보자마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럼에도 티룬드 대공, 아니 카르네스 티룬드는 일주일 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다음 기회가 있을까?’

아득한 시간 동안 매달렸음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던 문제였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 기회는 있을 것인가.

아니, 다음이 올 때까지 버틸 수는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자신은 영원히 버틸 것이다.

하지만 다른 뱀파이어들은 아니다.

하급 뱀파이어들은 이미 이지를 잃은 지 오래고, 저주의 영향은 그럼에도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엘더급도 흡혈 저주의 힘에 의해 흡혈욕에 지배당하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아니, 언젠가는 분명 그렇게 될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카린마저…….’

하급 뱀파이어들에게 그런 것처럼 카린의 자아를 마비시켜야만 하는 날이 온다면… 아마도 그때가 자신이 무너지는 시점일 터였다.

눈을 감고 딸을 살폈다. 도진이 데리고 다니는 늑대 정령과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카린이 보였다.

뭐가 그리 신기한지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꺄르르 웃는 카린. 그 존재가, 끝이 없을 것만 같던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어차피 감내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이른 시기에 하는 게 낫겠지.”

결국 인간일 때도, 뱀파이어의 왕일 때도, 카르네스를 움직이는 마지막 한 조각은 부성애였다.

* * *

결정을 내린 티룬드 대공은 고민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단호히 움직였다.

「어떤 형태로 위협이 발생하든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겠다.」

도진에게 결정을 통보하면서 덧붙인 말대로, 대공은 분리된 저주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마법을 준비했다.

이미 그림자 공국은 흡혈 저주를 억제하기 위한 마법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상태였기에 그걸 개조하기만 하면 됐다.

마법을 이루는 핵심적인 부분은 티룬드 대공의 피로 이루어져 있어서 개조 작업 자체도 용이했다.

“결행일 전까지 저도 나름대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진도 대비에 들어갔다.

그 대비는 파티원 호출이었다.

도진의 부름에 테레사, 소소가 부유대륙으로 왔다.

사실 파티를 구성하는 게 아무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위협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는지를 모르니 말이다.

그래도 필요할 때 없는 것보다는 잉여 인력이라도 확보해 두는 게 나을 거 같아 불렀다.

“흡혈 저주를 풀 건데 위험할지도 몰라서 불렀다고? 음… 어떤 일이 터질지 전혀 모른다는 거지?”

자초지종을 들은 테레사는 미간을 좁히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여기 온 게 헛수고였으면 좋겠네.”

굵직한 퀘스트가 발생하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 일도 없이 저주가 풀려 버리면 좋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보상이 없어도 좋으니 그냥 평화롭게, 카린과 뱀파이어들이 천형처럼 짊어진 속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소소는 평소대로 시니컬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게임에서? 그럴 리가.’ 하고.

솔직히 도진도 머리로는 소소에게 동의했지만, 마음은 테레사 말대로 됐으면 하고 바랐다.

“정말 가끔은 누나 말대로 허무할 정도로 개연성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쉽게 가면 좋을 텐데.”

나흘의 시간차를 두고, 탄토도 부유대륙에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퀘스트 때문에 고립되어 있다가 겨우 탈출해서요.”

“갑자기 불렀는데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죠.”

“도진 님이 부르는데 당연한 거죠.”

전생을 기준으로 둬도 탄토는 도적계 클래스의 탑티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반 구간에 유물 아이템까지 손에 넣었다.

성장에 박차가 가해졌으니 사실상 탄토는 물리 근접 딜러 중 최고의 자리에 있다 봐야 했다.

그런 딜러를 이렇게 자유롭게 쓸 수 있다니. 역시 전우가 좋긴 좋았다.

* * *

카린은 오랜만에 대공의 호출을 받았다.

“무슨 일이시지?”

대공이 카린을 부른 건 그녀가 도진의 동료 중 한 명인 가면 쓴 남자의 운반을 완료한 직후였다.

“아버님?”

집무실에 들어선 카린은, 어떤 마법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티룬드 대공이 의아했다.

저렇게 집중하시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

티룬드 대공의 시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린에게 닿았다.

“카린.”

“네!”

“저주를 풀 가능성이 생겼다.”

대공의 말에 카린이 펄쩍 뛰었다.

“네? 저, 정말인가요?”

너무 잘됐- 하고 기뻐하려던 카린은 심각한 티룬드 대공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님.”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부르는 것만으로, 카린은 하고 싶은 질문을 다 할 수 있는 존재였다.

“흡혈의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감당해야 할 위험이 얼마나 클지도 알 수 없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너에게 묻고 싶구나.”

“무엇을 말이죠……?”

“지금과 같은 상황이 좋다면, 나는 너에게 최대한 많은 시간을 주고자 노력할 것이다. 너에게 찾아올… 불행이 최대한 늦게 찾아오도록 말이다.”

“…….”

카린은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인형처럼 변해 버린 다른 뱀파이어들을 말하는 거라는 걸.

카린은 지금이 좋았다.

기다릴 사람이 생긴 것, 기다림 끝에 반짝이는 불빛을 보았을 때 반가움을 알게 된 것… 그것 외에도 수많은 게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대로 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님. 그럼 그 후에 아버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자신마저 사라지고 나면, 카르네스 티룬드라는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스스로 소멸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책임감과 미련에 매몰되어 영원히 존재할 것인가.

저주를 억제하던 존재인 티룬드 대공이 사라지면? 남은 뱀파이어들은 폭주하지 않을까? 그중 하나가 자신이 될 테고.

‘저를 포함한 뱀파이어 전체를 소멸시킨 뒤에 스스로도 소멸하는 것. 그나마 이게 가장 덜 불행한 결말처럼 보여요. 이건… 너무 슬픈 결말이에요.’

저주를 풀 방법이 생겼다고 하셨다.

도진 님이 부유대륙에 오신 직후에 하신 말씀이니, 그 방법이란 건 도진 님과 관계가 있을 거다.

카린은 하늘에서 내려오던 빛과 흡혈 저주를 풀고 싶다며 소원을 빌던 도진을 기억하고 있었다.

‘…믿을래요.’

카린은 도진을 믿기로 했다.

“아버님. 전 인간이던 시절의 기억은 없답니다. 하지만 절 살리기 위해 하셨던 선택을 후회하시던 아버님의 모습은 아주 오랜 세월을 지켜봤어요. 저는 아버님이 그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지시길 바란답니다.”

카린은 예쁜 웃음을 짓고서 말했다.

“저의 행복의 조건에는 당신의 행복도 함께 있어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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