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디케인의 영혼을 추방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별벼림 검이 빛으로 흩어지고 도진은 원래 있던 로스타니아로 돌아왔다.
흐릿해졌던 세상이 선명해지고, 퀘스트 존을 감싸고 있던 장벽이 사라졌다.
일단은 마무리를 했다는 생각에, 황량하기 짝이 없는 풍경을 둘러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려 했다.
한데 그런 도진의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저건……?’
아직 사라지지 않은 디케인의 시체에서 거뭇거뭇한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우드드득-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디케인의 시체가 뭉개졌다.
“……!”
도진은 깜짝 놀라 마법회로를 활성화했으나 그걸 쓸 일은 없었다.
완전히 뭉개진 디케인의 시체에서 검은 덩어리가 빠져나오더니, 순식간에 하늘 위로 치솟아 사라졌다.
“…뭐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도진에게 아네모네가 말했다.
【저놈한테 속박되어 있던 존재 같아. 진한테 고맙대.】
“너한테 말을 했어? 정령인가?”
아네모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겠어. 기운이 너무 이질적이야.】
뭐가 됐든 흑염의 원천이란 건 알겠다.
‘이미 사라졌는데 머리 굴려 봐야 나만 손해지.’
도진은 아까 뱉지 못했던 숨을 뱉었다.
이제 좀 다 끝난 느낌이 난다.
‘퀘스트 진행은… 멈춰 있고.’
퀘스트 창을 열어 보니 진행 상황이 딱 영혼 추방 지점에 멈춰 있었다.
완료 직전에 갱신이 안 되는 걸 보니 어떤 식으로든 빛이 접근을 해 올 거 같았다.
‘아마 그 여자가 다시 오겠지?’
이건 기다리면 되는 거고.
다음은… 아, 방송.
슬쩍 살펴보니 아주 난리가 났다.
채팅도 채팅이고, 이번에는 급히 일을 진행하느라 멋대로 켜 버렸더니 메시지 창도 난리법석이었다.
골치가 아파진 도진은 조용히 방송을 종료했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방송 종료가 어이가 없겠지만,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대충 알아서 해석해 줄 거다.
‘실제로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번쩍- 하고 무언가가 나타났다.
“어어?”
꽤 높은 지점에서 나타난 건 가면 쓴 빛의 하수인이었다.
높은 곳에서 나타날 생각이 없었는지 여자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그래 봐야 가볍게 착지했지만.
“…뭐 해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상대에게 한심함을 담아 묻는 도진.
이에 세실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엔 말투가 좀 다르네요?”
“전엔 적일지도 몰라서.”
“그럴 수 있죠.”
씩 웃어 보인 세실리아는 이번에도 편지를 한 장 꺼내 흔들었다.
“오늘도 배달하러 왔어요.”
도진은 날아오는 편지를 이번에도 염동력으로 받아 들었다.
그런 도진을 한 번,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세실리아가 말했다.
“그간 지켜보면서도 느꼈지만, 화끈하네요.”
“칭찬으로 듣죠.”
“그럼요. 얘기했잖아요? 팬이라고.”
세실리아가 두 걸음 물러났다.
이번에도 퇴장을 종용하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칫- 하고 혀를 찬 세실리아는 도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 맞다. 세실리아예요.”
저번에도 그랬지만, 퇴장이 신속한 여자였다.
도진은 여자가 남긴 이름을 한 번 입에서 굴려봤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
세실리아에 대한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편지를 열자 저번처럼 빛과의 만남이 시작됐다.
【…대단해.】
편지 위로 작게 떠오른 빛의 첫마디는 감탄이었다.
【넌 지금 아주 커다란 변화의 흐름을 막은 거야. 거대한 분열의 불씨가 될 수도 있었는데…….】
빛이 무얼 말하는지, 무얼 걱정했는지 도진도 짐작이 갔다.
같은 불안을 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런 시도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날까?”
【당분간은. 이번 일에 라베스는 상당한 기회비용을 투자했어. 결국 성공했다면 엄청난 영향력 확장이라는 결실을 가져갔겠지만, 그걸 네가 막았지. 결과적으로 붉은 별은 위축되고, 파란 별은 여유를 갖게 됐어.】
“균형의 추가 다시 라베스 쪽으로 기울 때까지는 굵직한 음모는 시도를 못 할 거라는 말이군.”
빛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고개를 끄덕이듯.
그러더니 빛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곧 낭비야. 보상에 대해 이야기하자.】
빛은 조급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벨라는 이번에 얻은, 네가 만들어 준 여유의 상당 부분을 너에게 돌려주고 싶어 해. 거기에 이번 일을 맡긴 우리가 가용 가능한 힘까지 얹을 거야. 나에게 원하는 바를 말해.】
“무엇이든?”
【보상으로 주어진 힘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능하다면. 내가 추천하는 건 역시 너의 힘을 키우는 쪽으로 사용하는 거야. 그게 이 세계에 가장 큰 도움이 될 거 같거든.】
빛이 말하는 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특성이나 장비 등을 요구하면 정말 엄청난 걸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진은 다른 걸 원했다.
‘이번에는 가능할까?’
이전 벨라와의 만남 때는 불가능했던 일.
“혹시 뱀파이어에게 걸려 있는 흡혈 저주를 풀 수 있어?”
도진이 자신의 성장보다 먼저 해결하고 싶은 건 뱀파이어에게 걸린 저주였다.
미래를 조금 틀었다고는 해도 뱀파이어가 인류의 적이 될 불안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게 도진의 생각이었다.
특히 요즘 들어 자주 보았던 세계율의 빛은 도진의 그러한 불안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뱀파이어의 저주가 라베스랑 관련되어 있다면, 앞으로 멸망교단 놈들이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없지 않아.’
카린 때문에라도 이쪽 문제는 완전히 해결하고 싶었다.
【그 저주를 해결하고 싶은 거야……?】
도진의 말을 들은 빛은 난색을 표하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확실히… 그걸 해결할 절호의 기회이긴 하구나.】
평소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여러 호재가 겹친 지금이라면.
도진에게 줄 보상을 만들 여분의 힘이 이만큼이나 되는 이 순간이라면.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어.】
“가능하다는 말이지?”
【가능할 거 같아. 하지만 아슬아슬해. 뱀파이어들이 짊어진 저주는 너무 오랜 시간 힘을 키웠거든. 떼어 내는 것도, 그걸 소멸시키는 것도 쉽지 않을 거야.】
도진이 말했다. 가능성만 있다면 시도해 보겠다고.
【아주 위험할지도 몰라. 너뿐만 아니라 뱀파이어에게도. 운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큰 리스크가 생길 거야.】
“…….”
도진이 망설인 지점은 딱 이곳이었다.
뱀파이어의 운명. 그걸 걸 자격이 자신에게 있나?
‘…하지만 그냥 손을 놓고 있으면 언젠가 대공에게도 한계가 오지 않을까?’
대공의 억제력이 한계에 달하는 시점이 오기 전에 무언가 수를 써야 하긴 했다.
‘일단 수단을 쥐는 게 먼저다. 그걸 사용할지 말지는 당사자들이랑 얘기해 본 뒤에 결정하면 돼.’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앙이 일어날 여지를 제거하는 의미에서라도 카드는 쥐고 있어야겠어.”
【…좋아. 잠시만 기다려 줘.】
빛이 반으로 분리됐다.
분리된 빛은 어디선가 나타난 파란 빛과 합쳐져 복잡한 마법진을 이루었다.
그것이 도진의 손에 올라왔다.
【그걸 사용하면 어떠한 저주든 분리해 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분리된 저주를 감당하는 건 오롯이 당사자들의 몫이라는 걸 잊지 마.】
“고마워.”
【그런 말 마. 네가 이번에 해 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거기다 네 바람은 결국 이 세계를 위한 거잖아?】
“그럼 서로 고마운 걸로 하면 되겠네.”
빛이 따뜻하게 일렁였다.
그러고서는 말없이 사라졌다.
보상을 만들어 내는 데 힘을 다 쓴 모양이었다.
잠시 후 조금 늦은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떴다.
더해서 갑작스런 방송 종료로 인해 또 한번 발칵 뒤집힌 바깥에서 오는 메시지가 시끄럽게 울렸다.
“하아.”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을 마지막으로 도진은 현장을 뒤로했다.
* * *
도진의 캐삭빵은 LOST 커뮤니티 전체를 발칵 뒤엎었다.
가뜩이나 NPC 학살 건으로 시끄럽게 타오르던 떡밥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도진’이라는 어그로 치트키가 개입한 것도 모자라서 ‘캐삭빵’이라니.
이건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진짜 이번에 간지 미쳤음. 다른 방송인들 추적 방송이네 뭐네 하면서 어그로 끌고, 시청자 늘리려고 쇼하고 그랬잖아. 근데 그런 거 없이 바로 방송 켜고 죽이고 바로 끄고. 캬, 미쳤다, 미쳤어.
-이거 ㄹㅇ임. 솔직히 전투 장면? 멋있었음. 근데 진짜 멋있었던 건 이번 사건으로 굳이 어그로 끌 생각 없다는 듯이 방송 켜자마자 범인들 싹 정리하고 바로 꺼 버린 그 간지였음 ㅋㅋ
학살범들을 지탄하며 적대 포지션을 잡은 스트리머는 많고 많았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도진 같은 사람은 없었다.
추적 방송, 추모 방송 등을 하며 시청자 몰이를 한 사람들.
반면 도진은 단 10분도 되지 않는 방송 시간 동안 학살범을 전부 ‘삭제’시켜 버렸다.
도진의 주가가 상승곡선을 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진짜 어떻게 된 걸까? 죽는다고 캐릭터가 삭제된다니. 그게 말이 돼?
-설정상 리제니안의 영혼이 저 세계에서 추방된 거니까 말은 되지.
-ㅋㅋ 그러게 왜 세계 구하라고 불러 놨는데 학살을 하고 다니냐고.
방송 직후부터 온갖 게시판은 활활 타올랐다.
채널에 올리지도 않은 영상은 팬들에 의해 편집되어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다.
짧은 하이라이트 영상들은 대부분 ‘물리치료’나 ‘참교육’이 포함된 제목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벵가의 방송이 켜졌다.
[“이번 사태는 정말 있을 수 없는 폭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게임이라 해도 유저가 유저를 죽임으로써 더 이상 게임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이를 시스템적으로 허용한 뫼비우스 사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LOST에 적지 않은 투자를 했습니다. 그런 돈이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다면, 어떤 유저가 마음 편히 게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초췌한 모습으로 정장을 차려입고 입장표명을 하는 모습.
-병신 ㅋㅋ 그러게 누가 그딴 짓 하고 다니랬냐?
-어린애들까지 죽이는 거 보고 구역질 나왔는데 꼴 좋다 병신 새끼 ㅉㅉ
쏟아지는 비난에 벵가는 결국 울분을 터뜨렸다.
[“게임하면서 한 일이잖아! 이럴 거면 아예 죽이지 못하게 막아 두든지!”]
-정상인은 애초에 고아원을 습격할 생각을 안 해요, 이 못난 새끼야.
[“으아아아아아!”]
아무도 자기 편이 없는 현실에 벵가는 닥치는 대로 물건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다 송출 장비까지 부쉈는지 방송마저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