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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NPC를 죽여 경험치를 습득하는 건 LOST 시스템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저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로스타니아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
몬스터를 잡거나, 몬스터만큼이나 세계에 해로운 악인을 잡거나, 선량하고 약한 자들을 도와야 했다.
반대로 로스타니아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면 혼돈 수치가 쌓여 각종 페널티를 받는 게 유저의 위치였다.
한데 로트라넷에 힘없는 NPC를 한 명 죽일 때마다 고레벨 몬스터 여러 마리를 사냥한 것과 비슷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그걸 믿겠냐?
-이딴 거에 낚여서 따라 하면 바로 나락행 버스 타고 줫대는 거야~
-우리가 로스타니아 지키라고 불려 간 놈들인데 로스타니아인을 죽이면 시발 ㅋㅋ
사람들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LOST가 서비스를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넘어가고 있는 지금, 이런 하급 어그로에 속을 만한 바보는 없었다.
한데 변수가 발생했다.
[제목: 학살 퀘스트 인증 영상]
해당 정보를 공유했던 유저가 퀘스트가 진짜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영상을 올린 것.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도망쳐!”]
[“커으읍……!”]
말없이 휘두르는 칼에 죽어 나가는 NPC들.
50명쯤이 사는 작은 마을이 순식간에 피로 얼룩진 무덤으로 변했다.
영상 말미에는, NPC를 죽여서 얻은 경험치로 이루어진 레벨업 이펙트가 반짝였다.
-아이, 씹. 이거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이런 건 진짜 정지 때려야 하는 거 아냐?
└뭘 근거로? 기껏해야 게임 NPC 죽인 거잖아.
-…아무리 가상현실이라지만 사람답게 좀 살자.
-이런 부분은 진짜 규제가 좀 필요한 거 아닌가 싶다. 이런 거 보고 모방 범죄가 현실에서 일어나면 어쩔 거임?
└너 한국인이지? 그놈의 규제, 규제 ㅋㅋ 그거 해 보려다가 표심 박살 나서 정치인 목 몇 개가 날아갔는데.
└실상은 가상현실 보급률이 높은 나라일수록 강력 범죄가 급감한 게 팩트임. 현실에서 저런 거 할 놈들이 굳이 현실이 아니어도 놀 공간이 생긴 셈인 거지.
└이게 맞음. 인생 나락 간 놈들도 가상현실에 접속하면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극단적 범죄를 저지를 이유를 잃은 게 큰 거 같아.
해당 영상 댓글창은 물론이고 로트라넷 각 게시판은 토론의 장으로 변했다.
물론 옳고 그름을 따지며 생각에 잠기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저 퀘스트 어케 얻는데?
-퀘 정보 공유 좀.
-혼자만 처먹지 말고 같이 좀 먹자 시발넘들아.
대량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에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임은 그저 게임일 뿐이라 생각하는 그런 성향을 가진.
-진짜 저 퀘스트 얻어서 사람 죽이고 다니겠다는 새끼들은 뭐 하는 놈들이냐?
└사람 ㄴ NPC ㅇ
LOST 유저는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갈라져서 싸워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태를 확인한 도진은.
“…이건 내 기억에는 없는 사건이야.”
당황스러웠다.
이만큼이나 충격적인 주제로 갑론을박한 사건이면, 자신의 기억에 분명히 남아 있어야 했다.
심지어 지금은 도진이 LOST를 시작했던 때와 비슷한 시기.
‘이 정도 사건을 내가 모른다는 건 그냥 이 일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도진이 볼 때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리제니안이 로스타니아인을 사냥한다.
이건 리제니안의 존재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저놈 혼자서 저러고 다닌다지만, 정말 저 퀘스트가 여기저기 퍼지기 시작하면…….
‘NPC와 유저 간의 신뢰가 무너질 수도 있다.’
로스타니아인, 그러니까 NPC들은 리제니안을 위험한 이방인으로 여기게 될 거다.
리제니안을 벨라의 안배라고 광고한 성황청에 대한 불신도 팽배해질지 모른다.
거기다 지금 보다시피 유저끼리도 갈라져서 싸워 대고 있는 상황이니.
‘이 정도면… 감탄이 나올 정도네.’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하게 멸망교단 놈들의 수작이다.
게임 안에서 짜낸 음모가 가상의 벽을 넘어 현실의 지구에까지 싸움판을 연 셈이니, 정말 대단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한 수였다.
그런 만큼 빨리 막아야 했다.
이건 단순히 단발성으로 끝날 음모 따위가 아니었다.
저 퀘스트는 마치 바이러스와 같아서,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거다.
‘하지만…….’
어떻게?
몬스터가 재앙의 근원이라면 그걸 죽여 버리면 됐었다.
범죄조직이 연루돼 있으면 그것들을 소탕해 버리면 됐고.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식의 접근이 불가능한 문제였다.
인지도를 이용해서 LOST 정화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나?
‘학살자들을 우리 손으로 처단합시다!’ 같은.
한데 이러면 오히려 반골 성향 짙은 사람들이 대거 학살파에 가담하면서 혼란만 커질 가능성이 있다.
‘아직은 퀘스트가 퍼지고 있는 거 같지는 않으니 사건 현장부터 조사해 봐야겠어.’
뭐가 됐든 움직여야 했다.
도진은 거의 유일한 단서라 할 수 있는, 영상 속 학살 현장부터 찾아가 보기로 했다.
위치를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영상이 풀린 시점에 이미 그 위치를 찾아낸 유저들이 위치를 공유해 뒀던 것.
“…….”
도진은 끔찍한 참사가 휩쓸고 간 마을을 보며 밑바닥 없는 인간의 악의를 실감했다.
인간은 악하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의 역사에서 피 냄새가 그렇게 진동할 리가 없지.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선하다.
그걸 증명하는 사람들이 이곳에도 있었다.
“너무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는 힐러 유저가 보였다.
참사 현장 위치가 공유된 만큼 이곳을 찾은 게 도진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쪽에는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유저들이 놓고 간 꽃이 쌓여 있었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희생자들의 주검을 수습하는 장면도 눈에 띄었다.
‘단서는… 없나.’
하긴 경험치 주는 몬스터 죽이듯 사람들만 죽여 놓고 떠난 현장에 뭐가 남아 있겠나.
정신을 갉아먹기 딱 좋은 장면만 가득하지.
도진은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괜히 얼굴을 드러내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흘렀다.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단서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히 도진의 답답함은 커져만 갔다.
그런 와중에 한층 더 심각함을 더하는 일이 벌어졌다.
[악의 편에 설 악마들은 들으라!]
중2병 냄새가 풀풀 나는 글을 올린 건 악동으로 유명한 스트리머 ‘벵가’였다.
[어그로 끌어서 죄송합니다, 형님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에 어떤 형님이랑 아주 원대한 계획을 세웠거든요.
다들 아실 텐데, 이번에 학살 동영상 올리신 형님, 그분이 제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이번에 길드를 만드실 건데, 아주 소수정예로 꾸릴 예정이고, 길드원에게는 그 퀘스트를 공유해 주신다고요.
전 이미 공유를 받았고, 덕분에 하루만에 2레벨이나 올릴 수 있었어요.
새롭게 만들 길드 홍보 겸해서 오늘 제대로 방송 달릴 테니까 꼭 지켜봐 주십쇼, 행님덜!]
같은 날, 벵가는 정말 해당 영상의 주인공과 함께 방송을 진행했다.
[“저기, 저거 보이십니까? 저게 바로 경험치 박스예요, 경험치 박스!”]
그들은 몬스터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사는 고아원을 습격했다.
엄청난 욕설이 채팅창에 해일처럼 밀려들었지만, 벵가는 좋아라 하며 웃어 댔다.
[“와! 내 인생에 시청자가 이렇게 많아질 줄은 몰랐네! 예, 예. 형님들 여기 유튜브 아니고요. 뭘 해도 터치 없는 해적티비입니다! 정지 절대 안 먹고요. 자, 광고 강제 시청 들어갈게요! 1분 뒤에 봅시다!”]
방송을 확인한 도진은 바로 놈들을 추적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장거리 공간이동이 가능한 도시와 멀리 떨어진 범행 위치 탓에 이동에만 1시간이 소요됐기 때문.
전신을 검은 로브로 가린, 검을 쓴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드러난 게 없는 학살범과 벵가는 경험치를 챙겨 사라진 뒤였다.
“시발 새끼들 어디 있어!”
도진과 마찬가지로 급히 달려온 분노한 유저들도 허탕을 치고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
도진은 이번 생을 살면서 처음으로 말 못할 무력감을 느꼈다.
동시에 가장 큰 분노도 함께 느꼈고.
“참 끔찍하죠? 인간의 본성이란 게.”
도진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뭐지? 여긴 사건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장소인데?
「원시」로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도진은 사건 현장과는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니 놀랄 수밖에.
“잠깐! 공격까진 하지 말아요!”
도진의 마법회로가 빛나는 걸 본 상대라 손을 휘저어 가며 말렸다.
“누구냐.”
경계심을 그대로 드러내며 도진이 물렀다.
마법은 여전히 준비된 상태였다.
도진에게 말을 건 상대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나쁜 상황인 건 알겠는데, 그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나?”
상대는 입만 드러나는 가면을 쓴 여자였다.
드러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한 여자는 편지 한 장을 들어 보였다.
“거기다 말이에요. 난 당신을 도우려고 온 입장이라고요. 뭐, 정확히는 심부름을 하러 온 거지만.”
여자의 정체는 ‘계약자’ 세실리아였다.
“내 고용주께서 당신한테 이걸 전해 달라고 했거든요.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지 아주 급하게 굴던데, 받아 볼래요?”
편지를 까딱까딱 움직이는 세실리아.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다는 건가?”
“거기까지 밝히는 건 좀. 사실 나도 밝히고는 싶은데… 그게 안 되는 입장인 거 같아요.”
“같다?”
“부려 먹히는 입장에서 그렇다고 하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거죠. 어쨌든, 당신한테 나쁜 짓 하려는 거 아니니까 슬슬 이거 좀 받아 줄래요? 지금도 시끄럽게 떠들고 있거든요. 상전님들이. 당신이랑 오래 대화를 나누면 안 된다고.”
말을 마친 세실리아가 편지를 쏘아내듯 던졌다.
도진은 그걸 염동력으로 받아냈다.
“아, 그리고 있잖아요. 팬이에요.”
“잠깐-”
도진은 여자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세실리아가 사라지는 게 먼저였다.
‘공간이동?’
공간을 다루는 능력은 아직 마법사 유저들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의 능력이었다.
팬 운운한 걸 보면 무조건 플레이어인데 사전 준비도 없이 공간이동이라니.
도진은 여자가 남기고 간 편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밀랍 봉인을 뜯어냈다.
그러자 편지 봉투 위로 작은 빛이 떠올랐다.
【안녕, 오랜만이야.】
신기할 정도로 표정이 다양한,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만났던 ‘빛’이었다.
“넌…….”
【안타깝지만, 길게 이야기할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야. 그러니 내 말을 먼저 들어줘.】
도진은 입을 다물었다.
【너의 적대자들이 선을 넘었어. 덕분에 너에게도 선을 넘을 기회가 생길 여지가 생겼고. 다만 그 선을 넘는 건 너에게도 아주 위험한 선택이 될 거야. 그만큼 너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지.】
무슨 각오인지 묻기도 전에 빛이 말했다.
【너의 별이 너에게 라베스의 종이 되길 자처한 리제니안들을 영원히 추방할 힘을 부여하게끔 해 줄 수 있어. 하지만 그만큼 너도 부담을 져야 가능한 일이야. 그들에게 네가 패배하면, 네가 영원한 추방을 겪게 될 거야.】
수상할 정도로 표정이 풍부한 빛이 불안한 기색으로 반짝였다.
도진이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모습.
하지만 그건 완전한 기우였다.
“지금 당장 시작해.”
도진은 쓰레기들과 벌이는 캐삭빵은 언제나 환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