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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져 있는 방송에 대한 생각을 할 여유도, 지독한 피로감을 달랠 짧은 휴식도 도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상황 파악이 최우선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것부터 파악하도록!”
네파스의 발광은 주변 지형을 갈아엎을 정도였다.
전투가 벌어진 장소가 쿨라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당연히 그쪽에서도 소란을 관측했을 터.
“현장에 있는 모든 자, 모든 것이 범인이고, 증인이고, 증거다! 쥐새끼 한 마리, 먼지 한 톨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도시 수비대가 화들짝 놀라 출동하는 건 필연이라고 봐야 했다.
‘쉬긴 글렀군.’
밖에서 이는 소란에 도진은 한숨을 참기 힘들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데… 아직 고생을 더 해야 그게 올 모양이다.
‘어쨌든 끝까지 수습할 건 해야지.’
그냥 상황 흘러가는 대로 두기에는 찜찜한 부분도 있고.
억지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더니 머리가 슬슬 돌아가기 시작했다.
“꼼짝 마라!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즉시 공격하겠다!”
도진이 짐칸에서 나오는 걸 본 병사들이 일제히 활과 무기를 겨눴다.
“하아…….”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보인 도진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상황을 살폈다.
병사는 안 되고, 장교도 안 되고, 현장 책임자급이 필요한데…….
‘그러고 보니 이 여잔 뭐 하는 거야? 이런 때 달려와서 해명을 해 줘야 할 거 아냐. 설마… 싸움에 휘말린 건 아니겠지?’
잠시 잊고 있던 데네브가 떠올랐으나 그쪽으로 신경을 더 쓰기 전 일단의 무리가 도진에게 다가왔다.
일단의 무리는 무장한 병사와 장교 그리고 장식용으로나 쓸 법한 화려한 갑옷을 걸친 젊은 남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장님, 위험합니다!”
도진은 말을 하기도 힘들어서, 짐칸에서부터 미리 손에 쥐고 있던 펜던트와 증표를 흔들었다.
그런데 젊은 시장은 그걸 확인할 생각도 않고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저놈은 이번 사태의 중요 용의자가 분명하다! 바로 연행해라! 그리고 저놈이 저 마차 안에서 무엇을 꾸몄는지 확인해야 하니, 안에 있는 것부터 빠르게 옮기도록!”
순간 도진은 시장의 눈과 목소리에서 다급함과 조바심을 읽었다.
이건 도진이 생각하고 있던 혹시나 하는 하나의 가능성에 무게를 더하기에 충분한 조각이었다.
“잠깐.”
도진이 한 걸음 물러나며 말하자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현장 상황만 봐도 도진은 매우 위험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
접근하는 입장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뭣들 하는 것이냐! 겁먹지 말고 당장 제압하라!”
시장은 병사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조사에는 충분히 협조하겠다. 하지만 여기 있는 걸 마음대로 하게 둘 수는 없다. 난 엘토마기아의 마법사고, 이곳에서 일어날 뻔한 문제를 해결한 나이니, 현장을 조사할 권리는 우리 엘토마기아에게 있다.”
도진의 단호한 말에 도시 수비대 병력들이 당황했다.
저 말이 사실이면 지금 우리가 제국 마탑 마법사에게 무기를 겨눈 셈이잖아?
병사들의 창끝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런 거짓말이 통할 것 같으냐! 당장 저놈을 제압해라! 반항하면 사살해도 상관없다!”
이건 비정상적인 반응이고.
‘구린 놈이구나.’
도진은 확신했다.
젊은 시장이 아주 뒤가 구린 새끼라고.
밀수를 업으로 삼는 놈들이 중요한 물건을 옮기면서 이곳을 루트에 포함시킨 이유가 뭘까?
그만큼 안전한 루트라고 여겨서다.
그 근거가 아마도 저놈일 확률이 높다.
시장쯤 되는 놈이 뒷배로 있는 도시 옆을 지나가면 범죄자 된 입장에서 얼마나 든든하겠나.
‘이건 데네브가 나서고 안 나서고의 문제가 아니겠는데.’
골치 아프다.
데네브가 무사한지부터 확인해야 할 때에 이런 시간 낭비를 해야 하다니.
싸울 수도 없고, 증거물인 폭탄을 방치하고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도 문제고.
“도진아!”
“도진 님!”
“공대장님!”
그래도 상황이 도진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진 않았다.
도진의 호출에 응한 사람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테레사를 비롯해 20명쯤 되는 인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도진 앞을 가로막았다.
시장의 지랄발광에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도진을 압박하던 도시 수비대가 이때다 싶었는지 바로 물러났다.
“너희는 또 뭣들 하는 놈들이냐!”
“뭐라는 거야? 여기서 사고 한번 제대로 날 뻔한 걸 막은 게 누군데!”
“에이잇! 저놈들도 다 한패가 분명하다! 전부 연행- 아니, 모조리 사살하라!”
도시 수비대 소속 장교가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시장님, 정말 저자가 엘토마기아의 마법사가 맞다면 이건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일단 정확한 상황 파악부터 하심이…….”
“그러다 더 큰 문제가 발생하면! 이러고 있다가 저놈과 한통속인 놈들이 더 나타나서 더 큰 피해가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당장 내 명령대로 해!”
막무가내에 가까운 명령이라 해도 그걸 따라야 하는 게 군인이었다.
결국 NPC와 유저 간의 대치는 곧바로 전투 상황으로 치달을 위기에 놓였다.
도진을 보호하는 진영을 유지하며 슬금슬금 물러나는 동시에 공격대원들이 물었다.
“이, 이거 어떻게 하죠? 쟤들 다 경비병이잖아요.”
“하아… 도망쳐야죠, 뭐. 그런데 저 마차 짐칸에 있는 건 들고 가야 하는데…….”
그게 또 더럽게 크다. 젠장, 일 한번 더럽게 꼬였네.
그렇다고 안 죽이고 적당히 제압하기에는 저쪽 숫자가 200명은 족히 넘어 보인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물러난 다음에 데네브부터 찾아서 빠르게 대처하는 걸로 하자.’
그나저나 이 여자는 진짜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도진이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가뜩이나 혼란스런 상황에 또 하나의 집단이 끼어든 것은.
“모두 멈춰라!”
우렁찬 소리는 마법으로 증폭된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했다.
“에, 엘토마기아다!”
그곳에는 엘토마기아를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30명쯤 되는 마법사들 사이에 숨을 잔뜩 몰아쉬고 있는 데네브도 보였다.
‘쓸모가… 있네.’
도진은 방금 전까지 내렸던 데네브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기로 했다.
* * *
데네브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문제가 생기면 엘토마기아.
달리는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도진이 남겼던 말만이 맴돌았다.
‘저 괴물은 절대 못 이겨……!’
도진의 대단함을 여러 번 목격했지만, 그도 감당 못 할 괴물이 등장했다.
그걸 보자마자 데네브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쿨라에 있는 엘토마기아 지부 마탑 앞에서, 데네브는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도진이 위기에 처했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그리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는 우리의 일원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곳에 대한 통제는 우리 엘토마기아가 하겠다.”
그 선언에, 시장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아무리 엘토마기아라 해도 이곳 쿨라의 수호 의무는 시장인 내게 있소!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에 의해 이곳의 전권은-”
시장의 구차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간이 진동했다.
그러면서 나타난 건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린 노인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황실과 직접 면담하면 될 일이니.”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아무리 엘토마기아의 마법사라 해도 ‘황실’은 함부로 언급할 만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노인의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는 그런 말을 전부 당연한 걸로 바꾸는 힘이 있었다.
보라색. 노인의 안대는 보라색이었다.
“마, 마스터 알버트 경……!”
사실상 은둔형 외톨이인 그랜드 마스터 시온 그레이스와 마법에 미쳐 다른 건 신경 쓰지 않는 다른 자색위(紫色位) 마스터들을 대신해 엘토마기아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자인 알버트 그레이스이기 때문이었다.
안대를 한 마법사를 본 시장은 사색이 됐다.
“그레이스를 붙이게.”
“죄, 죄송합니다. 마스터 알버트 그레이스 경.”
가문도, 작위도, 엘토마기아의 자색위 앞에서는 따질 게 못 되었다.
애초에 그들은 자신들의 대마법사에게서 받은 성(成)과 색(色) 이외의 모든 걸 버린 자들이었다.
하나 그 두 가지면 충분했다.
“매우 불쾌하지만, 모르고 저지른 일일 테니 책임은 묻지 않도록 하지. 설마 엘토마기아의 일원이란 것을 알고도 칼을 겨누진 않았을 게 아닌가? 그러니 물러나게. 이곳은 이제부터 엘토마기아가 통제할 테니.”
시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장에 출동한 도시 수비대 전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알버트는 도진을 향해 걸었다.
도진을 보호하기 위해 모여 있던 유저들은 알아서 길을 비켰다.
‘이 아이가…….’
알버트는 가만히 도진을 바라봤다.
시온 그레이스가 직접 엘토마기아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한 자.
색을 부여받지 않은 유일한 엘토마기아의 마법사.
시온이 ‘(제자)’라는 글귀를 덧붙인 아이.
‘시온 님, 당신께서는… 정말 종잡기가 힘든 분이시군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제야 이 세상에 다시 관심을 두시는 것 같아.’
가장 존경하고, 가장 경애하며, 가장 사랑하는, 위대하지만 철없는 대마법사.
친우를 잃고 세상과 등을 진 시온 그레이스가 직접 제자라 적어 둔 인물.
솔직히 평생을 모시고도 정식 제자 취급을 받지 못했던 입장에서 질투가 나긴 했지만,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이젠 슬슬 나이를 먹어 존경스럽기만 하던 시온이 손녀처럼 보일 지경이 됐는데, 은둔형 외톨이 손녀가 어디서 친구를 사귄 걸 발견한 느낌이었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엘토마기아는 당신 편에 설 것입니다.”
도진은 알버트 그레이스의 대단함도 알고 있었고, 그 성격이 매우 까다롭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과하게 정중한 그의 태도는 도진 입장에서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이유야 짐작이 가지만, 적응하기 힘든 거북함이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엘토마기아의 자색위라니. 이 정도면 골치 아픈 문제를 싹 다 해결할 수 있겠어.’
도진은 알버트를 향해 말했다.
“저 마차 안에 대량 살상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도진은 아까 얻은 비밀 장부를 꺼내며 말을 이어 갔다.
“이건 폭탄을 밀수하던 놈들한테서 얻은 장부고요. 전부는 아니어도, 제국을 좀먹는 벌레들을 꽤나 많이 솎아 낼 살생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제 예상대로라면, 저기 세상 끝난 표정을 한 시장도 여기 적혀 있을 거 같군요.”
“…허허.”
예상보다 스케일이 큰 사고란 걸 깨달은 알버트는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알버트에게 양해를 구한 도진은 멀리서 눈만 굴리고 있는 데네브를 향해 손짓했다.
‘저요?’ 하는 표정을 짓는 그녀.
몇 번이나 더 손짓으로 부른 다음에야 데네브는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목각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뻣뻣한 자세로 알버트를 향해 예를 갖추는 데네브에게, 도진이 물었다.
“혹시 고속 승진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예?”
데네브는 상황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도진을 구하겠다고 헐레벌떡 달려온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기요, 근데 저희는 숨을 언제쯤 쉬면 될까요?
방송을 시청하는 사람들도 뻥뻥 터지는 새로운 상황을 따라가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