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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현은 잠옷을 입고서 도진의 방 앞에서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깨울까…….’
현재 시각은 밤 11시 30분.
자는 사람을 깨울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진은 벌써 15시간째 자고 있었다.
자신이 자러 들어가면 중간에 도진이 깰 수도 있다.
언제 일어나도 챙겨먹을 수 있게 음식은 준비해 뒀으니 알아서 먹기야 하겠지만…….
‘아침까지 계속 잘까 봐 그게 더 걱정인데.’
도진이 계속 잘 거 같다는 게 문제였다.
자신이 지금 잠들어서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도진이 계속 잔다면… 20시간을 넘게 자는 게 되는데.
캡슐에 누워 있던 시간까지 더해서 생각하면 방치해 두기에는 많이 불안했다.
“그래. 밥 먹는 건 보고 자야겠어.”
고민 끝에 천지현은 도진을 깨우기로 했다.
“도진아, 일어나.”
“으으…….”
“너 엄청 잤어. 일어나서 밥 먹고 또 자.”
“…내가 얼마나 잤는데?”
“14시간 넘게.”
잘 만큼 자긴 했네.
도진은 반항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멍해진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깨울 때 일어나는 게 낫다.
도진은 식탁 앞에서 천지현이 차린 음식을 얌전히 입에 넣고 씹어서 삼켰다.
밖은 깜깜하고, 천지현은 잠옷 차림인 걸 보고 대충 어떤 상황에 어떤 생각으로 깨운 건지 눈치챈 것이다.
“내가 알아서 치울 테니까 누난 들어가서 자. 나 때문에 퇴근도 못 하고, 미안해.”
“새삼스럽게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이젠 반쯤 여기가 내 집 같으니까 넌 신경 쓸 거 없어. 출퇴근에 시간 안 버리고 좋지, 뭐.”
천지현 본인이 정말 그렇게 느끼고 안 느끼고를 떠나서,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2, 3배쯤 죄책감이 증폭되는 말이었다.
“더 미안해하라고 눈치 주는 거 아니면 그냥 들어가 줘… 충분히 미안해하고 있으니까.”
“뭐래. 네 매니저 정도면 업계 날먹 1순위거든? 난 이렇게 쉽게 돈 벌어도 되나 싶어서 눈치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천지현은 자리를 비켜 줬다.
도진이 마음 편하게 밥을 먹게 하기 위해서.
‘참 좋은 사람들이 많아.’
전생… 아니, 전생에 비교하기에는 죄스러울 만큼 과분한 사람들이다.
서로 주고받는 이득이 확실하기에 성립할 수 있었던 관계라지만, 받기만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받은 만큼 배려로 돌려주려는 사람과 만나는 건 큰 행운이다. 도진은 이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번엔 정말 운이 좋긴 해.”
무심코 이런 말이 나올 만큼 이번 생은 운이 좋았다.
현실도 그렇고, 게임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번 건은 정말 여러 일이 맞물리며 기적처럼 갈란테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근데 보상은 어떻게 됐으려나.’
생각을 이어 가다 보니 자연스레 갈란테가 남겼을 보상이 궁금해졌다.
자느라 방치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테레사를 비롯해 레이드에 참여한 사람들이 분명 관련 이야기를 했을 거다.
‘랜덤 특성 선택 포인트.’
확인 결과 공격대 전체가 공통적으로 받은 보상은 ‘랜덤 특성 선택 포인트’인 모양이었다.
공지를 위해서 모여 있던 단체 채팅방엔 서로 뽑은 특성을 자랑한 흔적이 남아 었었다.
‘유물은 안 풀린 건가?’
장비 보상은 S급이 다였다.
미리 당겨 잡아서 그런지 임팩트 있는 보상은 아니었다.
‘인스턴스 던전 단계에서 끝을 내서 그럴지도 모르겠네.’
도진은 빠르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간접적인 확인 말고, 직접 내 캐릭터에 뭐가 들어왔는지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 게이머의 본성이었다.
먹자마자 캡슐에 눕는 게 좀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빠르게 확인만 하기로 했다.
그렇게 접속한 LOST.
도진은 그때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메시지를 다시 불러왔다.
‘여긴 아니고, 레벨업 같은 건 됐고…….’
사소한 것들은 휙휙 넘겼다.
[…보상 정산 작업-]
불필요한 메시지는 다 읽지도 않고 넘기기를 잠시간.
[운명의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드디어 쌓인 메시지들 사이에서 눈길을 끄는 게 나타났다.
[이미 확정된 운명을 뒤틀었습니다.]
[위대한 업적 <운명을 뒤튼 자>의 달성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당신은 세계의 운명의 흐름이 바뀌기에 충분할 만큼의 뒤틀림을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업적 <운명을 뒤튼 자> 달성 보상으로 ‘운명의 개척자’가 되기 위한 실마리가 당신을 찾을 것입니다.]
그간 운명 퀘스트를 해결할 때마다 조금씩 달성도가 차올랐을 위업 <운명을 뒤튼 자>가 드디어 달성됐다.
한데 달성 보상이 특이했다. 특성도, 아이템도, 능력치도 아니고, 당장 받을 수 있는 형태도 아니었다.
‘실마리가 날 찾을 거라고……?’
그러니까 다음 스탭을 밟기 위해 필요한 기회를 찾게 해 주든, 아니면 기회가 직접 찾아오든, 다음 고생거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소리였다.
‘근데 또 나쁘진 않아.’
<운명을 뒤튼 자>는 이미 부분 달성 보상으로 줄 만큼 줬다. 완전 달성 기념으로 뭘 안 줘도 될 만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더 윗 단계의 위업 달성을 위한 기회를 얻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고.
‘아니, 장기적으로 보면 이게 훨씬 낫지.’
이는 이를 테면 열매를 주는 게 아니라 열매가 잔뜩 열린 나무를 찾을 기회를 주는 셈이라고 봐야 했다.
‘업적 쪽은 그렇다 치고. 갈란테는 뭘 남겼을라나.’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서 그런지 통상적인 월드 보스 레이드 이벤트만큼 보상이 화끈하진 않아 보인다.
다들 똑같이 받은 걸 보면 기여도에 따라서 달라진 부분도 없는 거 같으니, 무난하게 특성 포인트 하나에 장비창에 못 보던 장비가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메시지를 휙휙 넘기는 동시에 상태창과 장비창을 띄웠다.
[월드 보스 독각룡 갈란테를 무찌르는 데 있어 독보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강력히 저항하는 운명을 끝끝내 깨부순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런 당신에게 어울리는 특별한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인벤토리에 존재하는 「독을 품은 용족의 심장」에 독각룡 갈란테의 남은 모든 힘이 깃듭-]
심상찮은 보상 관련 메시지를 읽던 도진의 눈이, 새롭게 들어온 정보 쪽에 고정됐다.
기존 자신의 상태창과 확연히 달라진 부분.
「마나 하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특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유한 아이템과 보유한 특성이 혼합되었습니다.]
[특성이 변환되며 강화되었습니다.]
[특성 「마나 하트」가 삭제되었습니다.]
[특성 「드래곤 하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도진의 심장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용의 심장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인간보다는 정령에 가까운 정순한 마나로 이루어진 몸.
흡혈귀의 왕에게서 받은 눈.
거기다 용의 심장까지.
「멸망의 집행자」는 죽지 않는 것을 죽일 수 있게 해 주고.
「시간 여행자」는 제한적이나마 운명만큼이나 극복하기 힘든 시간을 극복하게 해 준다.
‘거기에 「진리의 서」까지.’
도진은 아까 읽었던 메시지를 다시 불러와 읽었다.
[위대한 업적 <운명을 뒤튼 자> 달성 보상으로 ‘운명의 개척자’가 되기 위한 실마리가 당신을 찾을 것입니다.]
갈란테를 상대하기 전 이런 표현을 썼었다.
공격대는 갈란테를 잡기 위한 칼이다.
그걸 두드리고 벼리는 것이 자신이고.
그럼 이 경우는…….
‘내가 칼인 건가.’
가혹한, 이미 정해진 운명을 베어 내기 위해 로스타니아가 만들고 있는 칼.
도진은 전생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시간을 거슬러 회귀하기 전 만났던 성해공주를.
아마도 그녀였을 것이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세계가 선택했던 칼이.
‘이젠 그게 내가 된 건가.’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을 거다.
게임을 계속하며 이런 사고, 저런 사고를 치면서 가능성을 보여 주니 조금씩 베팅을 해 봤겠지.
‘정말 이게 맞다면… 앞으로 더 바빠지겠는데.’
도진은 앞으로 많은 게 자신을 찾아 밀려들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위기가 됐든 기회가 됐든… 아니면 재앙이 됐든 간에.
이미 알고 있는 것들도 쫓아다녀야 하는데 그런 것들까지 처리하려면 참 많이 부지런해야 할 거 같았다.
‘그래도 심심하진 않겠네.’
그건 그렇고. 새로 얻은 심장이 뭘 바꿔 놨는지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 봐야겠다.
* * *
갈란테가 최후를 맞은 곳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
그곳에서 일단의 무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리제니안이라.”
“예. 어떻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으나 리제니안이 개입되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 같습니다.”
그들은 멸망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이었다.
갈란테의 부활과 그로 인해 발생할 피해와 혼란은 그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가증스런 벨라의 발악이 이렇게까지 우리의 숙원을 방해할 줄이야.”
“…그래도 이번 일은 우연이라고 보는 게 맞을 거 같습니다. 재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완벽하지 못했던 탓에 벌어진 일이지, 저희를 특정해 노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드러났지.”
“…….”
“아직… 우리가 전면에 나설 수 없을 때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음 같아선 벨라의 개들을 전부 찢어 죽이고 싶다. 하지만 리제니안 놈들은 죽여도 되살아나는 괴물들이니…….”
“정말이지 괴물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놈들이지요.”
“죽지 않는 벌레인 줄 알았던 것들이 아주 골치 아픈 괴물인 걸 알았으니, 도려 낼 방법을 찾아야지. 그때까진… 마찰을 피해야겠고.”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흰옷 입은 멸망의 종들은 원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증발했다.
도진이 바꾼 운명이, 새롭게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