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89화 (189/271)

189

[긴급 공지 사항.]

[어느 용감한 모험가의 손에 의해 비밀이 파헤쳐졌습니다. 이로 인해 미래에 도사리고 있어야 할 재앙이 현재에 찾아들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월드 보스 콘텐츠가 조기 해금되었습니다. 불안정한 부활 과정에 돌입한 월드 보스의 부활에는 최소 7일, 최대 30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험가님들께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시고 언제 부활할지 모를 월드 보스에 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인게임 메시지가 뜬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월드 메시지의 형태로 올라온 공지 사항.

이 소식에 도진 방송 시청자들도 난리가 났다.

-미친! 지금 공지 사항 올라왔음!

-뭐야, 이렇게 빨리?

-운영자들도 이 방송 모니터링하고 있던 거야?

-미리 공지 사항 준비하고 있었네 ㅋㅋ

-뫼비우스 형들 ㅎㅇ

-방송이 아니라 자체 모니터링이겠지 ㅋㅋ

-ㄴㄴ 게임사들 유저 반응 보려고 이런 대형 방송은 무조건 챙겨 볼 듯.

단순히 팬 서비스 차원에서 일반 퀘스트를 같이 진행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히든 냄새 풀풀 나는 메인 떡밥에다 이젠 월드 보스 이벤트를 조기에 해금해 버린 상황.

-진정 한국인은 미친놈들인가? 뭐든 빨리빨리 해치우는 병이 이젠 출시도 안 한 보스까지 죽일 셈인가?

-미친놈‘들’이라니? 착각하지 마라, 외국인. 한국인이 미친 게 아니라 도진 혼자 미친 거다.

-근데 뭐 공지 사항은 저걸로 끝이야?

-급히 올린 거라 그런 듯? 추가적인 내용은 나중에 올라오지 않을까?

-아닐지도. 지금 뫼비우스도 나중에 써먹을 콘텐츠가 멱살 잡혀서 끌려나온 상황인데… 한번 당해 봐라 스탠스 잡을지도 모르지.

대부분의 채팅이 새로운 월드 보스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파도가 한차례 지나가고, 누군가가 이런 채팅을 올렸다.

-월드 보스고 뭐고 이번 퀘스트 결말 진짜 너무하다… 도진이 표정 좀 봐. 진짜 너무 안 좋아.

-…도진이가 저런 표정 지은 거 보고 있으니까 진짜 내 마음이 다 찢어지는 거 같아.

-그 꼬마 애가 유령이었던 거지? 하… 진짜 뻔한 반전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안 좋지.

이성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은 새로운 월드 보스 출현에.

감성이 우선 되는 사람은 퀘스트의 결말이 주는 먹먹함에.

그들은 도진의 방송이 꺼지고도 한참이나 그곳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도진은 캡슐에서 걸어 나왔다.

“하아…….”

내뱉는 한숨에 그리고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에 피로가 묻어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르펜을 그렇게 보내고도 바로 게임을 끄지도 못하고, 뒷수습을 해야 했다.

퀘스트가 히든으로 전환되고, 그게 또 다른 사람과 공유되고.

멸망교단 은신처도 히든 던전 취급이라 그에 대한 분배까지.

공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내팽개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구조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피해자들의 처참한 꼴을 보고 경악한 NPC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외에도 일일이 언급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시달렸으니, 도진의 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시발… 진짜 지독하네.”

그러고서 해결이 말끔하게 됐다면 좀 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도 제대로 해결된 게 없었다.

그게 도진을 심적으로 더 힘들게 만들었다.

‘말만 꺼내면 바로 세계율의 빛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이번 건도 알아서 처리하란 소린데.’

멸망교단에서 구해 낸 사람들을 데리고 갔음에도 온전한 정보 전달은 할 수 없었다.

「마법 실험이군! 사악한 마법사가 연관된 범죄가 틀림없어!」

어거지에 가깝게 얼개를 맞춰 버리는 커클리의 대사는 마치 옛날 게임에 등장하는 NPC의 대사 같았다.

정해진 말 말고는 할 줄 모르는 고전 게임의 NPC 말이다.

위화감으로 가득 찬 커클리의 대사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확정된 미래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어설픈 변수 따위로는 바꿀 수 없는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진 필연.

독각룡의 부활과 그로 인해 찾아올 수많은 죽음과 영원히 죽어 버릴 대지.

그걸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쉽지 않았다.

핸들이 꺾이지 않는 트럭을 몰고 있는 기분이다.

정면으로 달리기만 하는 그런 트럭.

그리고 달려가고 있는 정면에는 낭떠러지가 있었다.

‘정해진 운명에도 난이도가 있고 등급이 있다는 거냐.’

지금까지 했던 운명 퀘스트들도 어려웠다.

‘미래를 바꾸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듯이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하면 클리어가 불가능한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했었다.

한데 지금은 아예 느낌 자체가 다르다.

운명이란 놈이, 미래란 놈이 ‘절대 안 바뀔 거야’라고 말하며 꿋꿋하게 버티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너희끼리 알아서 해 봐라, 이거 같은데.’

피곤함에 절어 있던 도진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복잡하게 얽힌 상황, 감정, 생각.

전부 다 한데 모아 한구석에 처박았다.

이런 건 숨을 돌려도 될 때 꺼내서 챙기면 그만이다.

“꺾이지 않으려고 버티면 부러뜨려서라도 꺾어 줘야지.”

당장 필요한 걸 제외한 모든 감정을 갈무리해 아래로 침잠시킨 도진은 밖으로 나갔다.

처리해야 할 건 현실에도 있었다.

이벤트성 실시간 방송이 끝자락엔 월드 보스 이벤트로 탈바꿈했으니, 회사 쪽도 난리가 난 것이다.

이례적으로 게임을 마무리하지도 않았는데 로그 아웃 하면 상의할 게 있다고 메시지가 왔다.

“도진아!”

도진이 나오자마자 천지현이 반겼다.

회사에서 도진을 찾으면 가장 압박을 받는 입장이 그녀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천지현은 일단 일 얘기를 꺼내기 전에 도진의 상태부터 살폈다.

“도진이 너 괜찮아……?”

밖에서 퀘스트 진행을 다 지켜본 천지현은 도진이 마지막으로 지었던 표정을 잊지 못했다.

별빛 안에서 짓고 있던 그 표정을.

걱정으로 가득한 천지현의 얼굴을 본 도진은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뭐가?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다고.”

도진은 아무렇게 않게 말했다.

걱정해 주는 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그런 사람한테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건 다른 방향으로 당연한 일이다.

“…….”

그런 도진의 마음을 눈치챈 천지현은 또 천지현 나름대로 모른 척하기로 했다.

“도진이 너 지금 엄청 난리 난 거 알아? 어딜 가도 네 얘기뿐이라니까.”

화제 전환이 어색하긴 해도 이 정도면 됐다.

“내 얘기가 아니라 월보 얘기겠지.”

“지금 월드 보스 얘기가 나오는데 네가 빠질 수 있겠어? 어쨌든 그 건 때문에 팀장님 두 분이 너 기다리느라 이미 목 빠졌어.”

타이밍 좋게 천지현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이 메시지 수신음을 연속으로 울려 댔다.

그녀가 스마트폰을 들고 흔들어 보이며 쓰게 웃었다.

“나 좀 구해 줄래?”

도진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건 또 상상을 초월하는 전개인데요?”

어이없음을 혼잣말로 표현한 인물은 세실리아였다.

「계약자」 클래스를 지니고, 자신과 계약한 존재의 의뢰를 받고 도진에게 히든 지도를 전달했던 세실리아.

이미 한번 도진과 얽힌 일이 있기에 그녀는 도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행보가 워낙 요란해서 예의 주시할 것도 없긴 했지만.

그래서 이번에도 세실리아는 도진의 방송을 챙겨 봤다.

뭔가 큰 걸 기대하고 본 건 아니었다.

방송인들이 주기적으로 하는 팬 서비스용 이벤트쯤이겠거니 하고 본 거지.

그런데 그게 사실은 멸망교단과 연관된 퀘스트고, 결국에는 월드 보스 이벤트가 연계가 되다니.

“유저 한 명이 월드 보스 이벤트를 열어 버리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어이가 없네.

별의 사도면 다야?

나도 「계약자」야.

히든이라고, 히든!

세실리아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기요, 님들. 난리가 났는데 뭐 하실 말씀 없으세요?”

자신과 계약한 존재들에게 말을 거는 거였다.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군?】

약간 놀란 듯한 말투에 세실리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 정보력이 좀 우수하거든.”

현실에서 수집한 정보지만.

【계약자의 우수함은 우리로선 다행스러운 일이지.】

“그런데 말이야. 우수한 내가 우수한 머리를 굴리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더라고.”

【무슨 의문을 말하는 거지?】

“전에는 내가 지도를 가져다줬단 말이지. 어딘가의 누구 씨가 시켜서.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었는데… 어떻게 저기까지 갔을까?”

세실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나 말고 다른 계약자 키우는 거 아니지?”

한마디로 자기가 모르는 「계약자」가 또 존재하여, 그쪽을 이용해 정보를 전달했는지를 묻는 거였다.

【아니다. 너를 제외한 계약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그럼 저게 다 우연이라고?”

【그렇지 않다. 결국 우리가 전달한 지도 한 장에서 시작된 흐름이 아직 멈추지 않았을 뿐.】

세실리아가 ‘허허’ 하고 작위적으로 웃음소리를 냈다.

“겨우 그거 하나로 잠들어 있는 월드 보스님을 깨웠다고? 이거 참…….”

적절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고심하던 세실리아는 딱 적당한 말을 찾아냈다.

“미친놈이시네.”

【…일부 동의한다.】

“그럼?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우린 뭐 안 해?”

【흐름이 순조로우니 별도의 개입은 지양하는 게 맞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세실리아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다.

“아, 맞다. 전에 그 사람이 별의 사도인지 뭔지가 됐다고 했잖아. 그럼 나랑 비슷한 게 된 건가?”

【아니다. 그는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

“아하.”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세실리아는 생각했다.

‘그 말은 너흰 그쪽이랑은 또 다른 존재라는 거네?’

세실리아는 자신이 계약했고, 지금도 대화를 나누는 존재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지금 한 질문은 ‘별’과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질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번에도 나한테 딱히 시킬 건 없다는 거고. 그럼 난 또 지켜만 보는 입장이 되는 건가?”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그리고 그런 역할만이 주어지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

“계속 가만히만 있으니까 심심한데.”

【…….】

“…알았어, 알았어. 얌전히 있을게.”

잠시 동안 상대가 대답이 없자 세실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갔네, 인사도 없이.”

또 모른다. 이러다 갑자기 몇 초 뒤에 말을 걸어서는 지시를 하기도 하니.

어쩌면 그 지시가 빠른 시일 내에 찾아올지도 모른다.

‘월드 보스의 조기 출현. 이만한 대형 사건이면 그 결과에 따라 많은 게 바뀌겠지.’

이 대형 사건이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니.

세실리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용사는 그쪽이 하셔야겠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