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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78화 (178/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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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의 예상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성녀는 고위 성직자이니, 벨라의 신성력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는 물건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는 예상 말이다.

이 세계에서 벨라의 영향력이 날이 가면 갈수록 증발해 가는 현재 이만한 별의 기운을 품은 물건은 거의 없는 수준.

하지만 도진이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단순히 수준 높은 사제가 보는 시각과 대대로 성녀에게만 전해지는 성흔을 몸에 지니고 있는 그녀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는 것.

‘이건… 이런 거였어……?’

마리올라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성황청에서 반평생을 보낸 만큼 강렬한 신성력에 노출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것이 과거에 비해 한없이 쇠락한 것에 불과하다 해도 성황청은 성황청이니.

다만 자신들의 별과 이어질 때 느낀다는 끝없는 황홀경은, 그녀의 대에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전대가 아닌 전전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에, 이제는 문헌으로만 남아 있는 별과 인간이 이어지는 순간의 감각.

그건 그저 ‘황홀하였다’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던 시절의 성녀들이 기록한 글귀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리올라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니, 이건 성흔에 남아 있는 전대 성녀들의 기억이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성녀로서 성흔을 물려받은 이후로 마리올라는 자신이 성황청의 부속품이 아닌 진짜 성녀라는 실감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저기요……?”

부들부들 떠는 성녀를 보고 당황한 도진이 그녀를 불렀다.

도진이 바란 건 성황청에 보관 중일 성물보다 더 성물다운 원판을 보여 주고, 이 물건의 출처를 두고 줄타기를 할 생각이었다.

지금의 창세교단과 연결고리가 없다 한들 아주 오래전부터 벨라를 섬기던 종교집단의 존재는 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닐 테니.

이는 활용하기에 따라 현재 흔들리고 있는 창세교단의 위엄과 정당성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종교적 소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성물을 보여 준 뒤에 이것과 이것의 출처 그리고 자신이 아는 정보를 무기로 성황청 내부에 우호 세력을 만들려고 했는데…….

“아니, 왜 갑자기 발작을 하고 그래!”

원판을 보는 순간부터 낌새가 이상하더니, 이제는 몸을 웅크리고는 격하게 떠는 게 아닌가.

옆에 있던 사제 놈도 놀라서 성녀를 부르고 난리가 났다.

한데 성녀라서 만지지도 못하고 손을 허공에서 허우적대면서 ‘성녀님, 성녀님, 왜 그러십니까!’ 하고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었다.

사제라는 놈이 뭐 해 볼 생각은 않고. 하긴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힐러 놈이 뭘 하겠나.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비켜!”

도진은 테이블을 밟고 넘어가며 방해물을 발로 걷어찼다. 염동력으로 가속된 밀어차기에 얻어맞은 케일로는 억 하고 바닥을 굴렀다.

그런 뒤 일단 호흡이라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성녀의 몸을 뒤집었는데.

“……?”

멀쩡했다. 간질 환자처럼 떨어대던 건 그녀가 몸을 웅크린 채로 오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진은 황망함에 말을 잃었다. 얻어맞은 케일로는 벌떡 일어나 ‘성녀님에게!’ 어쩌고 하면서 시끄럽게 구는데, 마음 같아서는 머리통을 구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 당신은 보았군요……! 그분과 직접…….”

두서없는 말을 하던 마리올라의 눈에 더욱 짙은 혼란이 깃들었다.

성흔이 각성하며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볼 수 있게 된 그녀의 눈에, 도진의 양면성이 보인 것이었다.

별이 머물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따스한 별빛 그리고 핏빛을 띠는 어두운 두 눈.

도진은 성녀의 눈동자가 정확히 자신의 눈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이걸 알아챘다고?’

1차적으로는 몸에, 2차적으로는 이 공간에 장막이 씌워져 있을 텐데.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죠?”

인간, 별, 어둠.

어울리지 않는 기운이 뒤섞인 도진을 성녀는 무어라 정의할 수 없었다.

‘이번엔 예상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네.’

급조한 계획이라 그런가.

치솟는 짜증을 삭히며 자리로 돌아간 도진은 잠시 원판을 노려보다가 입을 뗐다.

“일단 이것부터 물어봐야겠군요. 어디까지 보입니까?”

“왜 그런 걸 묻는 거죠? 제가 볼 수 있는 부분까지만 알려 주려고? 전부 말해 줄 수는 없나요?”

“어차피 믿지 못할 테니까.”

“…믿을 수 있다면요?”

“아뇨, 믿을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내 말을 듣고 믿어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난 그 사람이랑 대화를 안 할 겁니다. 볼 것도 없이 미친놈일 게 뻔하니까요.”

도진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성녀는 자신이 보고 느낀 걸 말했다.

원판을 보자 성흔의 반응했고, 이 물건에 별이 머물렀음이 느껴졌다고.

“…그리고 당신에게도 머무셨군요. 한데 어째서 당신의 눈은 그렇게 깊은 어둠을 품고 있는 건가요?”

“마안이니까요. 마안이 원래 다 이렇게 불길하고 어둡고 그렇습니다. 마법사가 괜히 음침해 보이겠어요?”

“아뇨, 그 정도가 아니에요. 그런 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견딜 필요가 없게끔 만들어진 거라 그렇습니다. 제작자가 워낙에 실력이 좋은 마법사셔서요.”

“…….”

성녀는 할 말이 없었다.

시온 그레이스의 제자라는 사람을 앞에 두고 제작자가 누구냐 묻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닌가.

도진이 노린 것도 그거였다.

“그리고 정작 성녀님이 믿는 분께서는 별로 신경도 안 쓰시던데요.”

그런 뒤 바로 마안에서 관심을 거둘 수밖에 없게끔 폭탄을 던졌다.

‘저 벨라 님이랑 만났음!’ 하면 개소리 말라며 뺨 맞을까 봐 일부러 입 다물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알아서 추궁을 해 주니 숨길 것도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그분을 오랜 시간 간절히 부른 건 우리인데…….”

1차적으로는 충격을, 다음으로는 질투 비슷한 감정을 내비친 성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어땠, 어땠나요? 그분께서는 왜 저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 건가요? 그 이유에 말씀은 없으셨나요? 저희의 부름에는 응답이 없으셨으면서 어째서 다른 곳에 강림하신 건가요?”

벨라는 한 번도 이유 없이 지상에 강림한 적이 없었다. 성녀를 통해서든 아니면 다른 경로로든 벨라는 언제나 목적을 갖고 지상을 찾았었다.

그러니 도진이 벨라가 지상을 찾은 시점에 그곳에 있었다면 그 이유 또한 들은 바가 있을 거라고 성녀는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렇고.

“이 성물이 있던 곳은 모종의 이유로 오염된 상태였습니다. 전 그걸 정화했고요. 그 과정에서 많은 일이 있긴 했는데… 어쨌든 결국 벨라 님을 직접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그런 기회가 어째서 당신에게……! 물어봤어야 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저희를 외면하시는 건지를요!”

흥분했는지 성녀의 말은 뒤죽박죽이었다.

아마 마음도 뒤죽박죽이겠지.

그간 쌓인 감정들이 터진 걸지도 모르겠다.

신의 응답이 실존하는 세계에서 말이 없어진 신.

종교인 관점에서는 자신의 세상이 끝나는 느낌일지도 모르니.

“그런 걸 묻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별로 궁금할 게 없는 문제라서.”

“당신……! 그게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요? 이 세계의 존망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묻더군요. 원하는 게 있느냐고.”

성녀의 흥분을 도진이 말로 잘랐다.

“……!”

소원을 물었다는 말에 성녀는 생각했다.

‘그런 기회가 내게 왔다면’ 하고.

지금의 답답한 상황을 말끔히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성녀님이라면 어떤 소원을 비셨을까요?”

도진의 물음에 성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다시 저희의 기도를 들어 달라 말씀드렸을 겁니다. 개인적 소망은 중요치 않아요. 저희가 지은 죄 때문이라면 용서를 구하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간청했을 겁니다. 당신도 그래야만 했어요.”

어떤 것이든, 개인적인 사욕을 채우기 위한 소원을 말했다면 용서치 않겠다는 눈빛.

도진은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성녀쯤 되면 다를 줄 알았는데… 똑같군요.”

“……?”

“왜 벨라가 우리를 외면하는 거라고, 버렸다고 여기는 거죠?”

“그야…….”

우리가 죄를 지어서, 인간의 추악한 모습 때문에 벌을 주시는 거니까요. 하고 성황청에서 신자들에게 베푸는 가르침을 외려던 성녀가 입을 다물었다.

“별에게 더 살아 달라 말했습니다.”

도진이 자신이 빈 소원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뭐… 라고요?”

“더 살아 달라 말했다고 했습니다. 전 한 번도 벨라가 이 세계를 외면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거든요. 희미해지는 별빛을 보며 멀어진다고 표현하지만, 전 그게 그냥 빛을 잃어가는 걸로 보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

“별은 예전처럼 응답하고, 보살피고, 아끼고 싶어 합니다. 지금도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빈 겁니다. 우리가 아니라 본인을 좀 챙기라고.”

성녀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빌고자 하는 소원이 고결하다 생각했다.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쓰는 소원이니.

한데 아니었다.

그것도 결국 성황청, 인간, 세계.

이쪽을 위한 소원이었다.

별을 아끼고 걱정하는 바람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을 믿을 때 기대를 품죠. 사실상 그들에게 신은 소원 자판기입니다. 위안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위안 자판기로 쓰고요. 아무도 신을, 하늘 위에 뜬 별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벨라 님께서는 절대적인 존재이시니까… 그런 걱정 자체가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

“직접 물어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도진은 치트키를 썼다.

그 왜 있지 않은가.

기도를 통해 당사자와 합의를 했다는 전설적인 말.

도진의 말은 그 변형이었다.

별님한테 물어봤음? 난 물어봤는데.

“어디죠? 위치를 알려 줘요. 직접 가서 확인해야겠습니다.”

“안 됩니다. 그분께서 바라지 않거든요.”

“……!”

못 알려 주지. 부유대륙이라고 하는 순간 아주 난리가 날 텐데.

대전쟁의 서막을 혓바닥으로 여는 꼴이 될 거다.

“어쨌든 뱀파이어와 관련된 일로 절 터치하는 건 여기까지만 하시죠. 당신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뱀파이어의 저주에 관련된 힌트를 준 게 그분이니까요.”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될 일을 왜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만든 건가요?”

“농담이죠? 그걸 당신들이 믿을 리가 없잖아요. 제가 엘토마기아 소속이 아니고, 시온 그레이스의 비호가 없었다면 화형대부터 세웠을 게 그쪽인데.”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이유로든 성황청이 들썩이면 멸망교단 놈들이 더 철저히 숨게 될 거다.

그러면 놈들을 추적하는 입장에서 힘들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은밀히 접근해 치명타를 갈긴 후에 우르르 일어나는 건 상관없지만, 지금은 성황청이 얌전할수록 좋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지금 나눈 대화는 우리만의 비밀이었으면 합니다. 적어도 제가 벨라 님께 받은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는 비밀이어야 합니다.”

“임무까지 받았다고요……? 그럼 성황청에서 지원을 받아야죠.”

“그러면 안 되니까 저한테 시킨 거 아닐까요? 뭐, 동네방네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도 됩니다. 대신 벨라 님의 임무를 망치고 싶으면 말이에요.”

도진이 성녀의 입에 걸 수 있는 자물쇠는 이게 한계였다.

이걸로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마도 입을 다물겠지.’

자기가 믿는 신을 훼방 놓는 일이라고 협박했으니 말을 들을 거다.

돼지고기 잔뜩 들어간 요리라고 협박했는데 그걸 열심히 퍼먹을 무슬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아무것도 밝히지 않고서 어떻게 당신의 결백을 증명하겠다는 건가요?”

“원래는 이런저런 계획을 잔뜩 세웠는데… 이젠 필요가 없을 거 같네요. 성녀님이 힘 좀 써 주시죠.”

“……!”

“이 원판은 원래 드리려던 것이니 가져가세요. 엘토마기아에서 보관 중이던 물건이라고 하면 될 겁니다. 이 정도 물건에다 엘토마기아, 시온 그레이스의 이름의 무게면 일을 무마하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진은 막 나가기로 했다.

마, 내가 너희 별님이랑 어? 말도 하고! 사도도 되고! 다 했어!

상태창을 못 보여 줘서 안타깝구만.

“…하지만 이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저는 힘이 없고요.”

아, 맞다. 잊을 뻔했네.

도진은 원판 말고 준비한 카드 하나를 더 건넸다.

“지금 성황청에서 제일 목소리 큰 사람이 브만인가 하는 사람이죠? 호세 푸아디고라는 인물을 추적해 보세요. 웬만한 대도시의 값비싼 사창가는 거의 다 우수고객으로 등록돼 있을 테니 어렵진 않을 겁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죠?”

그게 그 새끼 다른 이름이거든.

신분을 워낙 여러 개를 돌려쓰고, 복상사 당시에 쓴 가명은 기억도 안 나서 알아보느라 돈 좀 썼다.

“제가 맡은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황청이 나서야 할 때가 올 겁니다. 그때까지 성황청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지금 같은 상태여서는 안 되잖아요? 뒤가 구린 놈들은 쳐내야지.”

원래는 벨라니 별의 사도니 하는 걸 밝히지 않고 넘어가기 위해 준비한 비수였으니 쓰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준비한 걸 아낄 필요는 또 없었다. 원래 암덩이는 빠르게 떼어 낼수록 예후가 좋은 법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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