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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77화 (17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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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륙으로 돌아와 엘토마기아 본탑에 도착한 도진의 표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니 기분이 좋을 수 없는 게 맞긴 했다.

하지만 상황 자체만 놓고 보면 도진의 기분이 이렇게까지 최악을 달릴 이유는 없었다.

웬 병신 하나가 성황청에 고발을 넣는 바람에 벌어진 이슈?

짜증은 나지만 이 정도는 전생에 겪은 온갖 수난에 비하면 별거 아니다.

도진이 현재 유독 기분이 더러운 건 다른 이유였다.

‘애가 기가 죽었잖아.’

시온과의 대화를 듣게 된 카린이 보인 모습이 문제였다.

도진이 자신과, 아니 자신들과 얽힌 탓에 성황청에 찍혔다는 소리를 들은 카린은 미안해하다 못해 무슨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그러더니 그 이후로는 볼 수가 없었다. 도진이 중앙대륙으로 돌아올 때까지 카린은 어디로 숨었는지 나타나질 않았다.

“하아…….”

도진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성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대공의 모습.

무표정했지만, 그 안에 꿈틀대는 어둠을 도진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천 년 가까이 가짜 웃음을 입에 걸고 살던 딸이 이제야 진짜 웃음이란 걸 알게 됐는데, 그걸 앗아가려 하니 화가 날 수밖에.

흡혈귀의 왕이라는 이미지에 무표정해서 간과하기 쉽지만, 뱀파이어라는 종의 기원 자체가 딸을 살리겠다는 부성애였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어떤 도움이라도 주겠다.」

시온이 위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대공도 사태 파악은 다 끝냈겠지.

말은 온화했으나 대공의 눈동자 안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길은 그가 말하는 ‘도움’이 절대 온화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줬다.

‘내가 불씨 잡겠다고 땀 뻘뻘 흘리면서 개고생을 했더니. 겨우 고발장 하나도 이 사달을 내?’

진짜 트롤러 새끼들이 문제다.

아무리 열심히 틀어막으면 뭐 하나.

미친놈 하나가 벽돌 하나 쑥 빼 버리면 공들여 지은 성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인데.

그래도 아직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니 열심히 보수공사를 해 봐야지.

“어어?”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 옆에 있던 마법사가 당황한 소리를 냈다.

도진을 안내하던 도중에 갑자기 복도가 휘어지며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

‘시온 님.’

하나 도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신기하긴 해도 이 탑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시온 한 명밖에 없다.

역시나 공간왜곡 현상은 도진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도진 한 사람을 공간에서 분리해 필요한 위치로 보내는 게 목적이었을 뿐.

‘그런데 진짜 예술적이긴 하네.’

도진은 아름답게 접혔다 펴지고, 휘어졌다 이어지고 합쳐지는 공간과 공간을 보며 감탄했다.

하려면 바로 이동시킬 수 있음에도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적 차력쇼’를 벌이는 이유는 아마도 자랑이 목적이겠지만, 그 유치함을 잊게 할 정도로 시온의 능력은 대단했다.

“어- 어- 어- 억!”

그런데 공간왜곡을 통한 이동 중에 이상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웬 모자이크로 분리된 사람 하나가 저 멀리 건너편에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따로따로 분리된 몸뚱이를 열심히 허우적대며 공포를 호소하고 있었다.

‘뭐야?’

동작과 목소리 모두 너무 애처로워서 무심코 손을 뻗으며 괜찮냐고 물어볼 뻔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도진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주변을 이루는 모자이크 조각들이 일제히 합쳐지며, 아주 화려하지만 동시에 정갈하기까지 한 응접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얗게 질린 남녀가 있었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상태로 ‘조립’된 두 사람은 몸은 꼿꼿이 굳은 상태였다.

극심한 고소공포증을 지닌 사람을 4시간쯤 자이로드롭에 태워 놓고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면 저런 상태가 될까 싶다.

“…이, 이…….”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던 젊은 남자 사제가 겨우 말을 뱉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조금 멀미가 날 수도 있다고, 겨우 그 정도라더니! 저야 그렇다 치더라도 성녀님을 상대로 이리 무례해도 되는 겁니까!”

성녀의 수행원쯤 되어 보이는 젊은 사제는 정말 화가 많이 난 거 같았다.

‘하긴 그런 꼴을 당했으면 부처님도 욕부터 튀어나오긴 하겠지.’

도진은 그를 십분 이해했다.

자신은 아주 쾌적하고 안전하게 이동됐으나 저쪽은 아니었다.

분해되었던 공간과 같은 처지로 분해돼서 이동된 뒤 조립됐으니… 그걸 생생하게 느끼게 만들었다면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을 거다.

‘장난이든 힘의 과시든 좀 과한 거 같은데요.’

이건 도와주겠다는 건지 대화든 협상이든 방해를 하겠다는 건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도진은 여전히 사나운 눈빛을 쏘아 대는 젊은 사제와 아직도 하얗게 질려 몸을 옅게 떠는 성녀를 향해 말했다.

“먼저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철저한 보안을 위해 공간을 따로 만들다 보니, 여기에 들어오는 과정 자체가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잠시 잊었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별일 아니어도, 처음 겪는 분들에게는 충격이 될 수 있다는 걸 간과했군요.”

도진은 시온이 벌인 차력쇼를 수습하기 위해 적당히 말을 지어 냈다.

“보안이라니… 적당히 지어 내지 마십쇼!”

새끼… 날카로운데?

젊은 사제의 일갈에 내심 찔린 도진이었으나 숱한 퀘스트로 단련된 그의 얼굴 피부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 공간은 일종의 결계 그 자체입니다. 방금 겪으신 현상은 진입로 자체가 없는 공간에 들어오기 위해 발생한 일이고요. 많이 고생스러우셨겠지만, 그만큼 이곳의 보안은 완벽합니다. 시온 그레이스 님 이상의 마법사가 사흘은 걸려야 풀어낼 암호로 보호되고 있으니까요.”

이성이 마비된 인간을 진정시키는 건 ‘생각’을 하게 만들면 된다.

어떤 방향으로든 이성적 사고를 하게 만들면 일단 1차적으로 화가 가라앉는다.

그런데 그게 개소리라는 걸 들키면 역효과가 발생하는데, 지금은 괜찮다.

왜냐면 얘들은 절대 이게 개소리란 걸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온 그레이스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순간 마법학과 교수도 이 말을 개소리로 치부할 수가 없어지거든.’

하물며 성황청에서 기도만 드리던, 마법과는 결이 다른 신성계 직군이 뭘 알겠나.

“…….”

“…….”

역시나 전혀 모르는 분야에서도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를 했더니 화를 내던 젊은 사제도, 공포에 정신줄을 약간 놓고 있던 성녀도 약간 진정이 된 듯 보였다.

아직 경계심과 적대감은 남아 있지만, 이건 방금 두 사람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젊은 사제가 독백하듯 내뱉은 말은 평소 그를 포함해 성직자 대부분이 품고 있는 생각일 것이었다.

“동감합니다. 마법사 중에 정상인이 드문 편이긴 하죠. 가끔은 있긴 한 건지 저도 의문을 갖곤 합니다.”

그 말에 도진이 적극 동의하자 오히려 젊은 사제가 당황했다.

무의식적으로 내뱉고도 실언이었다고 생각해서 자책하려는데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돌려줄 말이 없었던 것.

“…케일로, 사과드리세요.”

“하지만 성녀님……!”

“우리는 이미 사과를 받았잖아요. 보안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그리고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 해서 상대에게 무례로 돌려주는 걸 당연하게 여겨서야 되겠어요?”

성녀의 말에 젊은 사제 케일로가 감복한 얼굴을 했다.

“제가 미흡했습니다.”

케일로는 자신이 한 발언이 정말 부끄러워졌는지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경솔한 발언을 사과드립니다.”

마치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이 믿는 푸른별을 욕보일 수도 있다고 믿는 듯했다.

‘얘는 진짜네.’

그 모습에 도진은 케일로가 정말 제대로 된 종교인이자 사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즉, 정치적 성향의 인물이 아니다.

이런 사제 하나만 대동하고 나타났다는 건 성녀 쪽에서도 이번 비공식적인 만남이 최대한 조용히 진행되길 원했다는 뜻일 거다.

“괜찮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도 마법사가 정상인이 매우 부족한 집단이란 건 알고 있거든요. 어쨌든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시고. 별로 유쾌한 일로 만난 것도 아니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도진의 말에 성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마법사다우시다고 해야 할까요……? 매우 효율을 중시하는 분처럼 보이네요.”

처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말을 하며 자기 몫으로 보이는 의자에 착석한 도진에게 성녀 마리올라가 물었다.

“듣기로는 이번 일의 당사자가 시온 그레이스 님의 제자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시온 그레이스는 오랜 시간 마탑의 탑주로 지내는 동안에도 절대 직계 제자를 두지 않는 걸로 유명했었다.

그런 그녀에게 제자가 생겼다는 소식이 퍼지면 마법계는 물론 다른 데서도 난리가 날 것이 확실했다.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도진의 대답은 가볍기 그지없었으나 말의 무게는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이건 비밀입니다. 사실 이 탑에서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저도 그렇고, 스승님도 시끄러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성녀를 보며 도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비밀스러운 관계면 나도 얼마 전에 알았다니까? 내가 제자라는 걸.’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마리올라는, 이번에는 진짜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저도 본론에 대해 묻겠습니다. 당신께 걸린 혐의, 그러니까 뱀파이어와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제보가 사실인가요?”

아마 여기서 부정하면 그걸로 끝날 것이다.

여러 이해관계가 뒤섞인 뒤에 뿌연 안개로 가린 듯 이번 일은 무마될 거다.

하지만 도진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네, 사실입니다.”

“…….”

성녀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예상과 다른 대답 때문인지 아니면 뱀파이어와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속이 복잡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겠군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이적행위하는 건 알고 계실 테고. 저는 부름을 받고 이 자리에 왔으니, 듣겠습니다.”

변명이든 제안이든.

이 일을 덮자는 것이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듣고서 전하는 것.

그게 자신의 역할이라 성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서로서로 정치적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앳된 사제 하나만 대동해 보낸 성황청의 속내를 최대한 만족시키는 것.

그게 성녀의 현재 목표였다.

“제가 뱀파이어와 접촉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흡혈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기 위해서죠.”

“뭐라고요……?”

“흡혈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라고요.”

“그걸 왜 당신이 풀려고 하시는 거죠?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인가요?”

도진은 옅은 한숨을 곁들여 말했다.

“성전 이후 이어진 암묵적인 휴전이 가능했던 건 티룬드 대공 스스로가 뱀파이어 전체의 흡혈욕을 억눌러 왔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정말 그렇다면 여기저기서 흡혈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왜 돌겠습니까! 놈들은 피에 미친 괴물입니다. 그러니 밤마다 몰래 인간이 사는 곳으로 내려와 피를 빨고 돌아가고 있는 거고요!”

케일로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 그에게 도진이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천 년 가까이 실제로 잡힌 뱀파이어가 없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

“이 세계에는 뱀파이어 말고도 사람을 죽일 괴물이 흘러넘칩니다. 그렇다 보니 범인이 확실치 않은 사고는 괴담 비슷한 걸로 발전하게 되죠. 그것들 중 몇몇이 뱀파이어를 범인으로 지목한 거고요.”

“혹시 이 자리가 뱀파이어에 대한 변호를 하기 위한 자리인가요?”

성녀가 불쾌한 기색으로 묻는다.

도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뱀파이어와 접촉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얘기하려다 말이 길어졌군요. 짧게 줄이겠습니다. 티룬드 대공이 종 전체를 억제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의구심이 들더군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개인 하나가 종 전체를 짊어지고 있는데…….”

그것에 한계가 오면 어떻게 될지.

“다시 시작되겠죠. 먹으려는 자와 먹히지 않려는 우리의 싸움이.”

“그걸 막기 위해… 저주를 풀려 했다?”

“예.”

“…그런 대의를 가진 행위였으니, 성황청에서는 눈을 감으라는 말인가요?”

성녀의 불쾌함이 짙어지는 게 보였다.

“물론 공짜로 드리는 부탁은 아닙니다.”

도진은 성녀 앞에 어떤 물건 하나를 내려놓았다.

당장 별의 사도니 뭐니 하는 건 미친 소리로 들릴 게 뻔하지만, 실존하는 물건을 이야기가 다르다.

“이건…….”

“현재 존재한 창세교단의 기원이 되는 지점보다 더 예전에 만들어진, 벨라를 섬기던 자들의 성물입니다. 당신들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물건이겠죠.”

이 세계의 성녀는 진짜 성녀다.

불과 며칠 전 벨라와 연결되었던 성물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역시나 성녀의 동공은 겁에 질려 있던 아까보다 훨씬 더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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