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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생각을 밖으로 뱉는 순간 걷잡을 수 없어질 게 뻔해서, 도진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도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칭 스승의 말을 경청하는 척했다.
【알아들었느냐?】
오늘따라 긴 흰수염을 자랑하는 대마법사 같은 말투를 고수하는 시온의 기나긴 설교가 끝났다.
요약하자면 북쪽 꼰대(티룬드 대공)가 선물을 준다고 해서 따라다니고 그러다 보면 꼰대력이 옮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지냈기에 이런 반응인지.
‘적대적 관계는 절대 아니고.’
뭔가 애증이 덕지덕지 묻은 동료 혹은 선후배. 그런 느낌이다.
“참고하겠습니다.”
【음, 그래야지.】
왠지 마법진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럼 네가 부탁한 것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 감사합니다.”
자칭 스승 역할에 심취한 건지 시온은 작별인사에도 무게감을 팍 실었다.
통신 마법진이 사라진 허공을 잠시 바라보던 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그… 누구야? 시온……?”
이 상황도, 도진이 대화를 나눈 상대의 이름과 정체도 모르는 파티원들이 궁금한 눈초리를 보냈다.
“엘토마기아 수장.”
도진이 간단히 답했다.
테레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토… 마기아?”
그것도 모르는구나.
“마법사 집단입니다. 마탑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이라고 예전에 퀘스트를 하다가 들은 적 있어요.”
조용히 있던 탄토가 대신 답해 줬다.
그러자 테레사가 헉- 하고 놀라며 도진에게 말했다.
“도진이 너 그런 데 대장이랑도 아는 사이였어? 어떻게?”
자세한 설명이 귀찮았던 도진은 가지고 있는 엘토마기아 증표를 보여 줬다.
“내가 엘토마기아 소속이거든. 자기 식구 챙기는 거지.”
엘토마기아가 어딘지도 모르는 테레사도 ‘그게 다가 아닌 거 같은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탄토도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재벌집 외동딸 소소만 ‘그럴 수 있지, 뭐’ 하고 있었다.
“그거야 뭐 그렇다 치고. 직접 해결하겠다니.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내가 도울 건 없을까?”
테레사는 현재 사태가 벌어진 이유 중 상당 지분이 자신이 부유대륙에서 방송을 켠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틈만 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찾는 중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테레사가 맡을 역할은 없었다.
“방금 들었잖아. 어차피 성황청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기 전까지는 할 게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도 그때 생각해야 하고.”
도진은 테레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걱정 마. 정 힘들면 엘토마기아 뒤로 숨으면 그만이니까.”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복잡한 마음을 갈무리하는데 뭔가 찜찜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아, 카린을 잊고 있었다.
카린은 아직도 시온이 만든 새장에 갇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소리는 들렸는지 얌전히 있긴 했지만, 그 모습이 매우 처량해 보였다.
결국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대공이 검은 안개를 보내서 결계를 풀어 준 뒤에야 카린은 새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도진은 왠지 서재에서 피곤한 눈으로 고개를 젓고 있을 대공이 보이는 거 같았다.
‘확실하네. 이쪽이 꼰대가 아니라 저쪽이 철이 없는 거였어.’
아이러니하지 않나.
인간을 벗어난 괴물이라 불리는 대공이 도진이 아는 마법사 중에서 가장 멀쩡한 인물이다.
마법계의 미래가 어둡다.
* * *
며칠 뒤.
도진은 하늘을 날아온 서류철 하나를 받아 볼 수 있었다.
받기 직전 퍼진 신경질적인 시온의 색채로 가득한 마력장은 아마 장거리 공간도약을 방해하는 대공의 결계에 대한 짜증이 아니었을지.
두 대마법사 간의 신경전이야 어찌 되었든 도진은 원하는 정보를 생각보다 빠르게 손에 넣게 됐다.
지시자가 시온 그레이스여서 그런지 정보가 정리된 서류의 정갈함은 거의 강박증 환자가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인물 리스트는 이걸 만든 자들이 얼마나 갈려 나갔는지 보여 주는 거 같았다.
목록 가장 위에는 역시나 현 상황이 자리하고 있다.
하테스타.
딱히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름만 아는 정도지.
‘내가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죽은 사람이기도 하고. 게임하는 동안 성황이 한두 번 바뀌었어야 하나하나 기억을 하지.’
도진이 기억하는 것만 따져도 성황은 세 번이 바뀌었다.
하테스타의 사망으로 바뀐 걸 제외해도 그렇다.
‘이 할아버지는 제외한다고 치고.’
중요한 건 오늘 내일 하는 성황이 아니라, 그로 인해 약해진 성황파의 정치적 영향력이다.
서류에도 적혀 있었다.
갑작스레 우두머리가 휘청이는 바람에 성황파가 많이 위태롭다고.
현 성황 하테스타가 권력 분산을 병적으로 기피했던지라 그 현상이 더욱 심하다고.
‘현재 성황청에서 힘 좀 쓴다는 게 추기경파. 성황이 건재할 때는 찌그러져 있던 놈들이군. 이것들 수장이…….’
도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추기경파의 수장이 ‘브만’이란 걸 보자마자 나온 표정이었다.
‘이놈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였어?’
로스타니아가 본격적으로 막장극으로 접어들기 얼마 전까지 성황직을 차지하고 있던 게 브만이다.
전생에도 마법사였던 도진은 성황청과는 딱히 연이 없었지만, 성황청의 오합지졸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브만이라는 것 정도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새끼 사망 사유가 복상사였다. 지구로 따지면 교황쯤 되는 놈이 여자 위에서 헐떡이다 억! 하고 죽어 버린 것이다.
차라리 성황청 내에서 몰래 하다가 죽었으면 또 모를까. 값비싼 고오급 사창가에서 놀다가 가시는 바람에 소문이 마법계에까지 파다하게 퍼졌었다.
‘기본적으로 강경파에다 이번에 엘토마기아에 직접 통보를 한 게 이놈이란 말이지. 이 새낀 말이 통할 놈이 아니야.’
결을 따지자면 강경파에다 원리주의자에 가까운 인물이라 적힌 것만 봐도 안 된다.
그런 놈 사인이 복상사라는 게 웃기긴 하네.
‘마법계만 위태로운 게 아니네.’
이 세계가 괜히 망해 가던 게 아니구나.
‘다음은… 성녀라. 마리올라?’
이 여자는 이름마저 희미할 정도였다.
성황이 그러하듯 성녀도 몇 번이나 바뀌었기 때문.
그래도 기억을 열심히 뒤적여 보니 건질 게 있긴 했다.
‘의식을 진행하다 탈진해서 죽었다던 성녀가 이 여잔가.’
별의 뜻을 읽지도 듣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성녀라는 생각에 무리해서 의식을 진행하다가 사망.
그쪽에서는 숭고한 희생이자 순교였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어쨌든 마법사 입장에서 보면 무리하게 마법진 돌리다 마나 고갈 및 마법회로 파열로 죽는 흔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런 죽음을 맞았다는 건 어떻게 보면 가장 성직자다운 인물이 이 마리올라라는 여자가 아닐까.
도진은 성녀 밑에 적힌 글귀를 보았다.
「현 성황 하테스타가 권력 유지를 위해 성녀 자리에 앉힌 인물.
성녀 본인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는 것으로 사료됨.
성황파의 몰락과 함께 정치적으로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음.」
믿음이 깊은 건 마이너스다.
이성적 대화 상대로 신실한 종교인만큼 골치 아픈 게 없거든.
하지만 또 정치적으로 위태위태한 자는 아쉬운 게 많은 법이라 파고들 여지가 충분하다.
‘무리한 의식을 진행해야 했던 이유가 종교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압박에 의한 것이었다면…….’
성녀만이 아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건 성황파 전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대화를 나눌 상대로는 성황파 쪽이 적당해 보였다.
‘브만 이후로 성황 자리에 앉았던 자들은 보이질 않네.’
하긴 브만이 트롤링을 하면서 분산되고 여기저기 떨어진 권력 조각을 주워 먹고 자란 새싹들이 다음 기회를 얻게 될 테니.
지금 이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해서 이상할 건 없겠지.
“아, 진짜. 이런 머리 아픈 건 나중으로 미루고 싶었는데.”
던전 공략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건 좋다.
하지만 이런 쪽으로 머리를 굴리는 건 질색이었다.
꼭 공부를 하는 거처럼 머리에 쥐가 날 거 같다.
“스킬 하나라도 던져 줬으면 일이 쉬웠을 거 아닙니까. 예?”
도진은 괜히 벨라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듣고 있는지부터가 의문이긴 하지만.
‘일단 얘들한테 조용히 말부터 걸어야 하는데…….’
혼자면 어렵겠지만, 뒷배가 있는 이상 어려울 게 없는 일이다.
시온 그레이스의 이름을 팔면 그만이다.
도진은 서류철 마지막 장을 펼쳤다.
역시나 백지다.
이건 여기다 글을 쓰면 저쪽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예스런 방식의 마법 소통 방식이었다.
-성황파 인물들과 만나 보고 싶습니다. 아주 조용히.
도진의 요청은 실시간으로 엘토마기아에 전해졌다.
* * *
성녀 마리올라는 불안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성황청의 얼굴로 살아왔다.
대외적인 행사가 있으면 그곳에 참석해 밝게 웃고 좋은 말을 하는 게 일이었다.
성황청에 누군가 방문하면, 그곳에서도 ‘성녀’라는 이름으로 얼굴을 비추는 게 일이었고.
한데 최근 들어 그런 일이 계속 줄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아채기 힘들 만큼 사소한 것부터 줄어 갔으나 이제는 확연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많은 곳에서 자신이 배제되고 있었다.
‘벌써부터 날 정리하려는 건…….’
한번 싹튼 불안은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 갔다.
기댈 곳이 필요했다.
성황파는 지금 성녀를 지킬 힘이 없었다.
각자가 몸을 사리고 제 살기 바쁜 와중에 그녀를 위해 무언가 해 줄 사람이 있을 거 같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마리올라도 그러고 싶었으나 성녀라는 직책이 몸을 사린다고 안위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그런 와중에 성황파에 속한 자가 은밀히 성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성녀님, 엘토마기아에서 전언이 있었습니다. 뱀파이어와 관련된 인물이 엘토마기아 소속 마법사라 하더군요. 그것도 그 시온 그레이스의 제자랍니다.」
아마 브만 측도 골치가 아플 상황일 거라 말한 그는 엘토마기아의 제안에 대해 언급했다.
「그쪽에서 은밀히 저희와 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수락만 하면, 정식으로 성황청에 중재를 요청하며 중재자로 성녀님을 지목하겠다는군요.」
얘기를 들은 성녀는 덜컥 겁부터 났다.
브만을, 추기경파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 자신이 연루되면 괜히 밉보이는 건 아닐까 하고.
「중재가 되었든 조사가 되었든 많은 게 오갈 사안입니다. 들어는 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엘토마기아에 줄을 댈 수 있다면 우리에게 절대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맞는 말처럼 들렸다.
성녀는 불안한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걸 하는 게 언제나 그녀가 해 왔던 일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