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카린과 함께 대공의 성으로 귀환했다.
하얗던 곳과 달리 온통 검은 세상은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퍽 괜찮은 고요함과 차분함을 제공하는 장소였다.
‘원래는 적당히 며칠 머무르다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하나 더 처리하면 좋을 과제가 생겼다.
‘문제는 이게 벌집을 건드리는 게 될 수도 있다는 거야.’
도진이 하고자 하는 건 뱀파이어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뱀파이어를 만든 게 티룬드 대공이란 건 역사에 떡하니 기록되어 있으나 ‘어떻게’에 대한 건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건 미래에도 마찬가지다. 뱀파이어는 인류의 적이었고, 티룬드 대공은 끝끝내 모습조차 드러낸 적이 없었던 것.
한데 이번 퀘스트에서 도진은 뱀파이어의 기원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창세성 벨라와 정반대에 선 힘.’
이건 라베스 말고는 떠올릴 게 없다.
그렇다고 대공이 멸망교 애들이랑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왜냐면 멸망교 애들도 여기 들어왔다가 싹 다 털린 전적이 있거든.
‘그런데 이거 물어보기가 너무 껄끄러운 주제라…….’
말을 꺼내는 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도진은 눈치를 보며 며칠이나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있으니 카린이 물어왔다.
“도진 님, 무슨 근심이라고 있으신가요?”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티가 난 건가.
도진은 카린의 눈치가 생각보다 좋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걱정할 거 없어. 그런데 용케 눈치챘네? 딱히 티를 낼 생각은 없었는데.”
“동공 크기랑 심장박동 소리가 달라지면 모를 수가 없답니다.”
음. 눈치가 좋은 게 아니라 눈이랑 귀가 좋은 거였구나.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네.”
대답하는 카린은 전혀 걱정 안 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도진은 카린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아네모네를 불렀다.
“아네모네랑 잠깐 놀고 있어. 아네모네, 카린한테 성 구경시켜 달라고 해.”
【정말 구경해도 돼?】
“물론이죠!”
질문은 아네모네가, 대답은 카린이 했다.
신이 난 둘은 고요하기 짝이 없는 복도를 시끌시끌하게 만들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둘을 보내고, 혼자 남은 도진은 허공을 보며 말했다.
“대공,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을 꺼내기 무섭게 검은 안개가 시야를 덮었다.
* * *
이동된 곳은 익숙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대공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
호기심 어린 대공의 눈을 마주한 도진은 바로 입을 떼려 했다.
한데 워낙 무거운 주제라 그런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침묵이 대공에게는 더 큰 호기심을 제공한 모양이었다.
“무슨 말이기에 그렇게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지 궁금해지는군. 내가 아는 한 넌 그런 인간이 아닐 텐데 말이지.”
길고 긴 시간이 얽힌 가족사도 망설임 없이 건드렸던 도진이 하기 어려워하는 말이 무엇일지 대공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긴 시간은 권태를 강제한다. 권태에 찌든 대공 입장에서 도진은 권태를 잊게 하는 흥미로운 객체였다.
물론 이 순간 도진은 그러한 대공의 관심과 눈빛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그냥 말하자.’
후. 짧고 강하게 숨을 뱉은 도진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위에서 뭘 했는지 혹시 아시나요?”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아예 모를 리는 없다.
그만한 힘이 터졌으니, 대마법사인 대공은 적어도 위에서 작지 않은 일이 벌어진 건 알고 있을 터였다.
‘정말 아무것도 못 느꼈다면 그건 그것대로 놀라운 일이지. 거기서 발생한 힘이 바깥으로는 전혀 퍼지지 않게끔 되어 있었다는 거니까.’
어느 쪽이든 일단 벌인 일을 이실직고는 해야 했다.
“옛 신전을 찾았습니다.”
대공의 눈썹이 움직였다.
놀라움보다는 흥미의 연장선이었다.
“그곳에서 벨라… 라고 생각되는 존재와 대면했고요.”
“…뭐라고?”
하지만 이 대목에서는 대공도 놀라고 말았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이라는 정도만 추측이 가능한 옛날, 그곳은 벨라를 섬기는 자들의 성역이었습니다.”
“사고를 치고 다니는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크군.”
대공의 표정은 복잡했다.
마치 딸자식 친구 놈이 알고 보니 매우 엄청난 사고뭉치라는 걸 깨닫게 된 부모의 얼굴쯤 됐다.
거기다 뱀파이어 된 입장에서, 집 앞마당에 벨라의 성역이었던 장소가 있었다는 말을 들으니 그쪽으로도 심란하긴 했다.
티룬드 대공 본인이야 벨라에 대해 악감정이 딱히 없지만, 창세교단과의 관계를 생각하니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
“지금의 창세교단과는 연관이 없는 성역이고 신전입니다. 연결고리라고는 같은 별을 섬긴다는 것뿐. 그들 사이에 연결고리는 없습니다.”
“…하긴 창세교단 놈들의 성역은 중앙대륙에 따로 있으니.”
거기다 여기에 창세교단의 옛 성역이 있었다면, 성전은 현재진행형일 터였다.
“한데… 이런 주제가 내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건 너도 잘 알 테고. 뭐, 놈들이 발작하는 수준에 비하면 나는 무관심 쪽이기는 하다만. 어쨌든 이런 이야기를 굳이 꺼냈다는 건 필요에 의한 것이었겠지?”
“그렇습니다. 전 중앙대륙에서 발견한 희생된 자들의 영혼을 성역으로 운반했고, 벨라는 그 대가로 원하는 걸 말하라 했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군. 그래서, 무슨 소원을 빌었기에 이리 장황히 이야기를 늘어놓는 거지. 이젠 정말 궁금해질 지경이야.”
“뱀파이어들의 흡혈 욕구를 잠재워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티룬드 대공의 얼굴이 굳었다.
불쾌함이 아니라 너무나 허를 찌르는 대답이었기에 반응을 못 한 것이었다.
“…왜 그런 걸 대가로 요구했지? 너와는 상관이 없는 일일 텐데.”
“카린과 처음 만났을 때 그에 대한 걱정을 하는 걸 듣기도 했고, 저도 개인적으로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걱정되는 부분? 인간인 네 입장에서 걱정할 게 뭐가 있다고…….”
“현재 흡혈에 대학 욕구를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뱀파이어를 대공 홀로 제어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대공께서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걱정입니다.”
미래가 바뀌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뱀파이어가 확정적으로 인류의 적이 되는 미래가 바뀐 것일 뿐.
도진은 아직 그 가능성 자체가 사라졌다고 믿진 않았다.
대공의 의지와 별개로, 다른 뱀파이어는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티룬드 대공이라는 단단한 족쇄가 묶어 두고 있다 해도, 언젠가 그 족쇄를 풀어낼 정도 뱀파이어들의 집단 광증이 심해진다면…….
“그 말인즉 나만을 믿기에는 불안하다는 뜻이군.”
“이미 오랜 세월 뱀파이어 전체를 통제한 것만 해도 필멸자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신에 가까운 업적을 이뤘다 봐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공께서 진짜 신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
티룬드 대공은 씁쓸함을 느꼈다.
도진의 말이 다 맞는 말이어서.
뱀파이어의 인간의 피를 향한 욕구는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욕구만 따로 제어를 해 주는 정도로, 평범히 생활하게 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고 자체를 하지 못하게끔 꼭두각시로 전락시키거나, 심한 몇몇은 아예 정신도 육체도 완전히 정지시켜 식물인간처럼 만드는 수밖에 없을 정도가 됐다.
이제는 정말 때가 되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최근이었다.
‘나의 죄책감에 묶여 있는 자들에게 안식을 줄 때가…….’
아니, 안식이라니. 결국 그들 모두를 희생시키는 거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생각을 정리하며 대공이 말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구나. 아직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네. 그건 제가 빌 수 있는 소원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더군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 뭔가 도움이 될지도 모를 말을 들었습니다. 뱀파이어에게 내려진 저주가 라베스와 얽혀 있다는 듯이 말하더군요.”
“…라베스?”
“혹시 짐작 가는 부분이 없으십니까?”
“모른다. 다만… 그때 당시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을 긁어모았었다. 치료와 관련된 지식은 물론이고, 네크로맨시, 저주와 축복까지. 그런 과정에서 기원을 알 수 없는 마법도 많이 접했지. 그러다 결국 완성한 그것이 라베스와 연관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하겠군.”
혼란스러워하는 대공을 보며, 도진은 이렇게 생각했다.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대공에게 멸망교단 놈들이 접근했을 수도 있어.’
대공은 닥치는 대로 지식을 긁어모았다고 했다.
그러고 있는 대공에게 독약과도 같은 지식을 전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거대한 마법의 일부에 아주 지독한 트랩을 설치하는 그런 짓은, 멸망교단 놈들이 할 법한 짓거리였다.
확실히 이렇다 하는 답을 못 얻은 건 아쉽지만, 이 정도면 됐다. 대마법사 티룬드 대공이 머리를 굴린 끝에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한 정도로도 파볼 여지는 충분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정말 벨라의 말대로 라베스와 관련된 거라면 그쪽으로 파보면 뭐라도 나올 테니까요.”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자네에게 있나? 어차피… 자네가 걱정하는 때가 오더라도 인간에게는 피해가 갈 일이 없게 할 것인데.”
여기서 세계의 안녕 운운하는 건 좀 그렇고.
“친구 일이니까요.”
도진은 대공한테 가장 크게 점수를 딸 말을 골라서 했다.
“제가 걱정한 일이 벌어지고, 대공께서 그걸 해결하더라도 카린은 많이 슬퍼할 거 같아서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대공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벨라의 성역이란 곳에 카린을 데려간 걸 좀 주의를 주려 했더니…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녀석이군.”
혼잣말하시는 척하면서 이미 타박을 주신 거 같은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도진은 입을 다물었다.
‘집에 가라고 했는데 걔가 고집부렸다니까요? 님 딸이 고집을 부렸다고요!’
속으로는 투덜거렸지만.
대공이 물었다.
“성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릴 위해 일해 주겠다니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라면 주고 싶군.”
도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확실히 혼자서는 힘든 일이 될 거 같습니다. 그래서 동료들이랑 같이하려고 하는데요. 제 동료 몇 명만 부유 대륙에 들어오는 걸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부유 대륙은 인간 출입 금지 구역이다.
대공의 허락이 있으니 도진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거지.
“다른 인간들을?”
역시 대공은 내키지 않는 눈빛을 했다.
하지만 도진이 하는 말이라 마지못해 허락했다.
“많이는 안 돼.”
“저를 포함해 5명을 넘지 않을 겁니다.”
“공국에는 안 돼.”
“위에만 돌아다니겠습니다.”
이제 제대로 된 파티로도 이 노다지 대륙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