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70화 (17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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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간이 더 길어지는 겁니다.”

도진의 소원이 담담히 이어졌다.

“이 세계는 온 뒤로 이 로스타니아가 두 별 아래 성립한 세계란 걸 알게 됐습니다. 벨라와 라베스. 이 세계는 두 별 중 어느 별이 더 밝게 그리고 더 오래 빛나는지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되더군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 푸른색은 저물어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금 언급한 별 벨라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벨라와 관계된 존재일 푸른빛이 일렁이며 떨렸다.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모습이었다.

【그게… 당신이 바라는 보상이라고요?】

별빛은 당황스러움을 담아 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수많은 종족과 문명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별에게도 이건 생소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신을 찾는 자들은 많고, 그들이 바라는 욕망과 구원은 셀 수 없었으나 신의 안녕을 바라는 인간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신적인 존재와 직접 대면하여 크든 작든 자신의 소망을 말할 기회를 얻은 순간에 바라는 것이 신적 존재의 안녕인 자라니.

“로스타니아에 갈수록 몬스터가 늘어나고, 인간의 영역이었던 곳이 괴물의 땅이 되어 가는 게 당신이 이 세계를 버려서라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건… 아니-】

“하지만 그건 아니죠.”

별빛과 도진의 말이 겹쳤다.

빛은 더욱 당황스러운 파장을 만들었다.

“이 세계에서 한 경험들. 그것들을 돌이켜 보면 당신이 우릴 버렸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이건 1년도 채 되지 않는 이번 생의 경험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미래에서 이미 경험했던, 도진 개인에게는 과거가 되는 시간의 경험을 포함한 이야기였다.

“이 세계를 버렸고, 또 포기했다면 이 세계 곳곳에 당신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틈날 때마다 빛을 비추어 주려고 하지도 않을 테고. 그러니 지금 상황은 창세성에게도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다. 이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 눈에 당신은 소멸해 가는 것처럼 보여요. 소멸해 가는 와중에도 우리를 저버리지 못해 마지막까지 빛을 비추고 있는 거처럼.”

도진은 미래를 겪으며 느낀 것을 말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 끝에, 별빛의 의지가 다시 전해졌다.

【그것이 당신의 소망인가요? 제가 빛날 시간이 늘어나는 것. 그것이요.】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그게 이 세계에 더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전 이 세계가 망가지는 걸 원치 않거든요. 꽤 마음에 드는 곳이라.”

도진의 담백한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내가 강해지는 것도 좋다.

그래서 닥칠 위기를 수월하게 막아 내고, 그 결과 로스타니아를 보호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겠지.

하지만 그 교환비가 겨우 장비 하나, 특성 하나면 이런 기회를 그런 데다 쓰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이런 식으로 기여를 해 두면 어디선가는 도움이 될 거고.’

지은 죄가 언젠가 업보가 되어 돌아오듯 이런 밑밥은 언젠가 이득으로 돌아올 것이다.

‘멀리 가서 찾을 거도 없잖아.’

이번 퀘스트만 해도 대공과 카린의 호감도를 잔뜩 올려 둔 덕에 깰 수 있었으니.

그러고 보면 이것도 나름 호감작 아닌가?

【한 번 더,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이곳에 모인 힘이, 제 소망이 창세성 벨라가 더 오래, 더 밝게 빛나는 데 도움이 되는 겁니다.”

구체화된 말이 힘을 얻었다.

벨라는 세계에 직접적인 의지를 투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지금 도진의 소원으로 아주 잠시나마 힘과 의지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부탁이 있습니다.】

원래라면 이제는 사라져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도진 덕에 잠시 더 머물 여유를 얻었다.

그 힘과 시간을, 별은 지금 이 자리에서 쓰기로 했다.

【조금 더 지켜보고, 조금 더 신중히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더 오래 기다리고 살핀다 해도 이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하기는 힘들 것만 같군요.】

부탁이 있다더니, 웬 선택? 도진이 의문을 담아 물었다.

“부탁이라니… 그리고 이어진 말은 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잠깐. 부탁이면 퀘스트다.

지금 하는 선택이 나중에 이득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돌아올 모양이다.

도진은 그렇게 기대하며 집중했다.

【말을 꺼내기 전에, 사과부터 하고 싶어요. 당신은 자신의 바람을 이룰 기회를 세계와 저를 위해 썼는데… 저는 당신에게 큰 부담을 지우려 하고 있군요.】

“듣겠습니다.”

【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기 위한 불씨가 되어 주세요.】

도진은 퀘스트 메시지가 뜰 걸 기대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창세성 벨라가 자신의 사도를 선택하려 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제안을 받아들이는 즉시 숙명 클래스 ‘별의 사도’가 추가됩니다.]

도진에게 뜬 것은 새로운 클래스에 대한 메시지였다.

‘서브 클래스도 아니고 숙명 클래스라니.’

말로는 들어봤었다.

클래스라기보다는 길게 이어지는 숙명 퀘스트를 얻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던가.

특정한 퀘스트 라인을 따라가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자격증 같은.

‘별의 사도라는 건 처음 듣지만.’

애초에 전생에서 창세성은 이렇게 멀쩡한 상태로 마주해서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픈부터 이어진 월드 이벤트를 다 조져 버리는 바람에 창세성도 덩달아 골골댔던 것이다.

이미 이 세계는 도진이 알던 전생의 세계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로 인해 바뀌었으니, 내가 계속 바꿔 나가야지.’

도진은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그 부탁, 받아들이겠습니다.”

[숙명 클래스 ‘별의 사도’가 추가되었습니다.]

즉시 메시지가 떴다.

상태창에는 클래스란 아래에 숙명 클래스가 추가됐다.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요?】

그럼.

퀘스트가 다발로 들어오고, 운 좋으면 어떤 능력이 들어올지 모를 복권인데.

문제는 복권이 아니라 폭탄일지도 모른다는 거지만… 안 긁고 남 주기엔 당첨금이 너무 크게 책정된 복권이라서 놓을 수가 있어야지.

“말했잖아요. 이 세계가 꽤 마음에 든다고. 세상을 멀쩡히 유지시키는 데 필요한 게 저라면, 어쩔 수 있겠어요. 해야지.”

【다행이에요. 적어도 이 선택을 후회할 일은 없을 거 같군요.】

결국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가고, 모든 게 끝이 난다 해도 이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아닐 테니.

별빛의 일렁임이 멎었다. 지금껏 보인 모든 감정을 갈무리하듯 고요함을 되찾은 별빛이 작별을 고했다.

【언제가 될지. 아니면 다시 오지 않을지. 만남을 기약할 수는 없으나, 진리를 쫓는 그대의 걸음과 걸음이 가혹한 운명을 바꾸기를.】

빛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설원에 혼자 남은 도진은 한동안 빛이 내린 지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래와 현재, 많은 것이 뒤섞여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서.

* * *

카린은 도진의 말을 어겼다.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지만, 어떻게 그러겠는가.

카린은 도진이 눈치채기 힘든 거리에서 그를 따라갔다.

‘전 뱀파이어에다 엘더인걸요.’

은신해서 살금살금 추적하는 뱀파이어 엘더를 어떻게 발견하겠나.

거기다 거리도 충분히 벌렸다.

들킬 일은 없었다.

도진이 걸음을 멈추는 소리에 카린도 발을 멈췄다.

일정한 거리 유지는 은밀한 추적의 기본이었다.

“…보아하니 길게 대화를 할 여유는 없어 보이네요.”

멀리서 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헉- 하고 놀란 카린은 귀를 쫑긋 세웠다.

산에 부는 바람의 방해에도 무서울 정도의 청력을 지닌 카린은 먼 거리를 넘어 도진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은 벨라인가요?”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거지? 하고 궁금해하던 카린은 더더욱 크게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선 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을 정도였다.

‘베, 벨라면 신, 아니 별님이잖아요!’

성역에 성물에… 설마 별님이랑 연결이라도 되신 걸까요?

성녀를 통해 신탁을 내릴 때 성녀의 입을 빌려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하던데…….

두서없이 떠오르는 서적에서 접한 지식들을 카린은 휘휘 저어 흩어 버렸다.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시간이 길지 않다 했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저한테는 벨라 님의 목소리를 들리지 않네요.

역시 뱀파이어는 미워하시는 걸까요.

시무룩해하는 카린.

“제가 원하는 거라고 하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소린가요?”

그래도 도진 님이 별님한테 보상을 받는 거 같으니 다행이에요.

‘도진 님 소원이 뭔지 궁금해요.’

카린이 귀를 더욱 쫑긋 세웠다.

“혹시 뱀파이어들의 흡혈 욕구를 잠재우는 것도 가능한가요?”

카린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도진이 이런 소원을 빌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째서…….”

카린은 알 수 없었다.

도진이 왜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건지.

카린은 울컥 솟은 감정에 깜짝 놀랐다.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책에서 읽은 많은 표현들 중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걸 표현한 건 무엇이었을까.

“모르겠어요.”

도진이 걸어간 방향으로 보며 카린은 조용히 말했다.

‘아쉽군요.’ 하는 도진의 말이 귀를 간질였다.

안 되는구나.

아쉬움이 크진 않았다.

도진이 이런 소원을 빌어 주고,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해 준다는 게 고맙고 기쁜 게 더 컸다.

“…죄송해요.”

저런 분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난 이렇게 졸졸 따라오기나 하고.

카린은 부는 바람 소리에 집중했다.

저 멀리서 들리는 도진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도진이 무슨 소원을 빌지 궁금하긴 했으나 이젠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미 저를 위해 하나의 소원을 쓰신 거나 마찬가지인걸요.’

카린이 기억할 그의 소원은 단 하나이니까.

새로운 소원은 듣지 않기로 했다.

카린은 걸어왔던 길을 돌아갔다.

* * *

[카린 티룬드의 호감도가 ???포인트 상승하여 ???이 되었습니다.]

할 걸 다 하고 돌아가려는데 메시지가 떴다.

“뭐야?”

창세성이랑 있었는데 왜 흡혈귀 공주님 호감도가 올라?

도진은 뜬금없는 메시지에 당혹감마저 느꼈다.

‘그런데 얘 호감도는 지금도 물음표네.’

이유를 찾자면 당사자인 카린이 감정이란 것에 서툴러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는 거지만.

갑작스럽게 올라간 이유도 그렇고, 물음표도 그렇고, 역시 이 게임에서 가장 복잡한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호감도’답다.

“잘 기다리고 있었어?”

걷고 걸어 카린이 있는 곳에 도착한 도진이 카린을 불렀다.

카린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네! 여기서 얌전히 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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