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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69화 (16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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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카린이 걱정되어 최대한 빠르게 전투로 복귀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완벽한 기우였다.

도진이 열심히 설원을 달리고 있을 때, 무너진 신전 앞에서의 전투는 이미 마무리된 상태였다.

“그르륵, 커흑…….”

카린은 자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과 노인의 혼탁한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 어째서 네가 나를, 우리를 방해하는 거지……?”

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핏물이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도진이 위로 올라가서, 그가 보지 못하게 되자마자 카린은 자신의 전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노인의 새로 얻은 육체는 거대한 피웅덩이에 잠겨 갈기갈기 찢겨 나간 상태였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 너에게선 끝에서 빛나는 붉은 별 라베스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런데 왜 네가……!”

노인의 육체가 붕괴를 시작했다.

공급되는 에너지가 사라지자 육체적 손실을 복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에 비례해 노인의 사고능력도 함께 떨어진 건지 그녀는 정신을 못 차리고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너는 분명 우리와 같은 꿈을 꾸는… 아니, 그런가. 네년, 라베스 님의 은총을 독차지하려는 거구나. 내가… 가장 커다란 축복을 받는 걸 시샘한 거겠지! 날 여기 버리고 도망간 배신자 녀석들이 보낸 거였어!”

점점 미쳐 가는 노인을, 카린은 조용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무리 악을 써도 반응이 없는 카린이 두려웠던 걸까.

아니면 다가오는 죽음이 무서웠던 걸까.

“사, 살려 줘. 내가 여기 갇혀 있는 동안 많이 연구하고 그랬을 거잖아. 너만 봐도 알 수 있어. 목표에 다가선 거잖아! 살릴 수 있지? 그렇지?”

노인이 카린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답니다.”

“거짓말하지 마! 너, 너라고 끝까지 멀쩡할 거 같아? 날 봐. 아니, 나한테 붙어 있는 이것들을 봐. 이것들도 처음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 너도 알잖아. 근데 결국 이렇게 됐다고. 너라고 다를 거 같아? 너도 결국 이렇게 될 거다!”

“혹시 저에게 말을 거셨던 분이 당신이신가요?”

카린은 산을 오르는 동안 계속해서 말을 거는 목소리에 고통받았었다.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흡혈 욕구를 강하게 자극하는 그런 속삭임이었다.

바로 옆에 걷고 있는 인간의 피를 빨고, 살점을 씹고,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어 마시라는 유혹.

“보통 인간들은 우리를 이해 못 해. 별의 은총을 이해 못 한다고!”

“아닌가 보네요.”

지속적으로 자기 할 말만 하는 노인을 본 카린은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차피 너나 나나 다른 것들이 보기엔 괴물이긴 마찬가지야! 위로 올라간 그 녀석도 그렇게 생각할걸?”

노인의 말에 카린이 덜컥 멈추었다.

괴물. 맞는 말이다.

인간들이 쓴 책에 항상 흡혈귀는 괴물로 묘사됐다.

그림자 공국의 다른 흡혈귀들도, 본능을 완전히 억눌러 인형 같은 상태여서 그렇지 조금만 제어를 풀면 치솟는 흡혈 욕구를 참지 못해 괴물처럼 변해 버린다.

‘괴물처럼이 아니라… 괴물이 맞죠.’

카린은 자신이 괴물임을 인정했다.

인간과 흡혈귀의 차이를 인지한 순간부터 그녀는 그걸 부정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그녀는 더 이상 그 사실이 슬프거나 아프지 않았다.

“저는 괴물이 맞아요.”

노인은 듣지 않았다.

여전히 자기 할 말만 늘어놓으며 악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답니다.”

그래서 카린도 자기가 할 말만 했다.

노인은 듣지 않는 거 같지만, 이 자리에 듣는 사람이 노인 하나는 아니었다.

“저에게는 마음이 있는걸요.”

카린 본인이 듣고 있었다.

너는 괴물이라고. 본능을 거부하지 말라고. 그 말로는 비참할 거라고.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던 그것이 무엇인지 카린은 몰랐다.

벨라, 라베스, 이곳에 고여 있는 사념, 그것도 아니면 정말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괴물.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몰라도 상관없다.

“아무리 마음 없는 괴물이라 말해도, 이미 저는 훨씬 더 믿을 만한 분께 인정을 받았답니다.”

카린은 요즘 많은 걸 새로 배우는 중이었다.

하루를 채우는 그리움과 아쉬움, 기대와 기쁨.

없는 게 아니었다.

깨어날 계기가 없어 침묵하고 있었을 뿐.

다채로운 감정은 연일 카린의 뛰지 않는 심장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정말 괴물이 될 거 같은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할지는 이미 정해 뒀으니까요.”

예전과 달리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만, 그래도 괴물이 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생각을 이어 가고 있으려니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이 아릿해졌다.

우울해지려는 찰나 절벽 저 위쪽에서 익숙한 숨소리가 다가오는 게 들렸다.

마음이란 게 신기하다.

겨우 1초 전에 우울해지던 기분이 갑자기 활짝 피어나는 걸 보면.

카린은 방긋 웃으며, 여전히 들을 가치 없는 말을 늘어놓는 노인에게 말했다.

“당신은 사람이었지만 결국 괴물이 되어 돌아가시지만, 저는 괴물로서 죽더라도 사람으로서의 마음만은 지키며 죽을 거랍니다. 그럼 안녕히.”

굉음이 울렸다.

이미 무너졌던 절벽이 한 번 더 무너졌다.

* * *

급히 돌아온 도진은 허탈하게 아네모네를 돌려보냈다.

‘이건 뭐 폭격기라도 지나간 거야, 뭐야.’

전투 현장은 그야말로 폐허 그 자체였다.

광선이 훑고 지나간 자리야 그렇다 치고, 여기저기 생긴 크레이터에 잘게 분쇄되다시피 한 신전이었던 것들의 파편…….

보스는 갈린 고기가 저럴까 싶을 정도로 아주 갈리고 눌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엘더라 해도 이 정도라니.’

하긴 엘더라도 다른 엘더랑 다른 핏줄이 아닌가.

무려 대공의 직계이니 뱀파이어 2인자라고 해도 좋을 카린이다.

전력을 다하면 어디까지 강한지 가늠도 안 되는 강자인 것이다.

“도와주려고 열심히 달려왔더니 소용없는 짓이었네.”

다가오며 하는 도진의 말에 카린이 방긋 웃었다.

“이미 도와주셨는걸요. 아까 보였던 빛, 도진 님이 하신 거죠? 그 이후로 훨씬 더 움직이기 편해졌었답니다.”

“그 정도로 도왔다고 하기엔…….”

말을 흐리며 도진은 완전히 초토화된 주변을 둘러봤다.

“아앗! 뭔가 부끄러워요!”

자기가 만든 폐허를 도진이 보는 게 부끄러운지 카린은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금 더 세밀하게 힘 조절을 할 걸 그랬다.

‘아버님한테 마법을 배워 둘 걸 그랬어요!’

도진이 위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잠깐 돌아가야 하는데…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저도 갈래요.”

“안 돼. 혹시 모르잖아.”

“위험할지도 모르잖아요.”

“난 안전해. 넌 위험할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안 돼.”

카린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도진의 단호한 태도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카린이 포기했다.

“알겠어요. 그럼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좋아.”

도진은 다시 성물을 놔 둔 장소로 향했다.

* * *

아까보다 훨씬 희미해지긴 했지만, 별빛은 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아 걱정했는데 다행이군요.】

설마 보스전을 빠르게 마무리 못 하면 보상이 날아가는 그런 시스템인 건가.

카린이 있어 망정이지. 정말 악독한 퀘스트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지만, 보아하니 길게 대화를 할 여유는 없어 보이네요.”

【안타깝게도 그래요. 그래도 이 말은 꼭 하고 싶군요. 당신들, 부름에 응해 준 여러분에게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벨라인가요?”

【일단은… 그렇다고 대답해야겠군요.】

애매한 대답이었다.

하나 반문하진 않았다.

어차피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리가 없으니.

“시간이 길지 않다 했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그게 좋겠군요. 그럼, 원하는 것이 있나요? 당신의 도움으로 약간의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걸 활용해 당신이 원하는 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려 별님께서 주시는 백지수표.

퀘스트가 아주 지랄 맞았던 이유가 다 있었다.

이 정도면 그 난이도를 인정해 줘도 될 거 같았다.

하지만 도진은 흥분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보상일수록 신중하게 접근해야 낭비 없이 완벽하게 뽑아먹을 수 있는 법이었다.

“제가 원하는 거라고 하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소린가요?”

【쓸 수 있는 힘은 이곳에 남아 있던 정도. 그러니 한계는 명확합니다. 다만 그 힘을 활용하는 방향은 그다지 제약을 두지 않아도 돼요. 귀한 물건, 더 강한 힘, 작은 기적을 빚을 기회 등…….】

아이템, 특성, 특수 사용 아이템 정도를 말하는 건가.

‘근데 또 그런 뻔한 걸 말하기에는 좀 많이 아쉬운데…….’

도진은 더 좋은 게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저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카린이 떠올랐다.

‘카린이 없었으면 이번 퀘스트는 절대 못 깼겠지.’

그럼 그녀에게도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혹시 뱀파이어들의 흡혈 욕구를 잠재우는 것도 가능한가요?”

과거 카린은 일반 뱀파이어들의 흡혈욕을 잠재울 방법을 찾겠다고 가출을 했었다.

사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쨌든 표면적 이유는 그랬다.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거다.

거기다 대공이 막 나갈 이유가 없어졌다고는 해도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불씨 하나를 완전히 해결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었다.

‘보상은 티룬드 대공이 해 주겠지.’

이런저런 계산이 깔린 소원이었다.

【…안타깝지만,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건 그들의 소멸이 아닐 테니까요.】

하지만 벨라일지도 모를 빛은 난처한 기색으로 불가능을 언급했다.

【지금 쓸 수 있는 힘은 한계가 명확해요. 그들에게 걸린 저주는 저와 정확히 반대되는 힘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온건한 방법으로 그 저주를 풀어내는 건 지금으로서는 힘들어요.】

“아쉽군요.”

여러 가지를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소원이었는데.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정확히 반대되는 힘에 기원을 둔 저주’.

대공이 뱀파이어라는 종족을 만들 때 쓴 힘의 기원이 그쪽이란 건 확실해진 셈이니.

예상도 했고, 미래를 아는 입장에서 뻔한 거기는 했지만, 그래도 별피셜로 확언을 받는 건 또 느낌이 달랐다.

‘그러면 음…….’

결국 뻔하디뻔한 걸 보상으로 받아야 하나.

무슨 병이든 완치할 만능약을 달라고 할까?

그걸 이용해서 그 퀘스트랑 연계하는 건…….

아냐, 그건 다른 방법이 있어.

그럼 그 퀘스트에 필요한 걸 요구해서, 아냐 그것도 그냥 내가 해결하면 되는데 굳이?

‘아는 게 너무 많아도 피곤하다니까.’

이럴 때 다른 방법으로는 못 얻을 무언가가 팍 떠오르면 좋을 텐데.

‘…다른 방법으로 절대 못 얻을 거.’

그때 도진의 머릿속을 무언가가 확 스쳤다.

미래.

갈수록 힘을 잃고, 빛을 잃어가던 벨라의 모습.

로스타니아는 연일 밝아지는 라베스의 빛에 유린당했었다.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 얻기 힘든 것이.

‘시간.’

도진은 별에게 비는 소원으로 시간을 얻기로 했다.

“제 소원은…….”

로스타니아와, 로스타니아를 비추는 창세성의 수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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