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67화 (16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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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정상이라고 해 봐야 신전이 지어진 지점 위로는 산 자체가 싹둑 잘려 나가 있었다.

그러한 탓에 신전이 위치한 절벽을 기어 올라가자 완만한 경사를 가진, 거의 평원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평평한 지형이 나타났다.

과거 모종의 사건으로 잘리고 뭉개질 당시 만들어진 지형일 것이었다.

‘그 성물 조각인지 뭔지가 여기 어디 있다는 거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딱 이런 걸까 싶은 막막함이 몰려왔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찾아야 잘 찾았다고-”

무의식적으로 푸념이 튀어나온 순간이었다.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예의 아래에서 보았던 눈안개로 만들어진 환영이 다시 사위를 뒤덮은 것이다.

「위로, 위로 올라가!」

「제기랄, 성물이 반쪽밖에 없잖아!」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어.」

환영들은 반달 모양의 성물을 들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갈팡질팡하던 그들은 반쪽짜리 성물을 들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이 계단으로 산 정상까지 이어져 있던 모양이군.’

지금은 지형이 바뀐 탓에 환영 계단은 허공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방향을 잡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도진은 계단과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리 위로 계단이 계속에서 높이를 더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계단이 끝난 지점에서 한참 먼 거리에 희미한 푸른빛이 보였다.

다가가 보니 고풍스런 문양이 음각된 원판의 반쪽이었다.

‘반쪽짜리여도 성물은 성물이다 이건가.’

푸른빛의 정체는 성물이 만든 빛기둥이었다.

작은 빛기둥 안에 둥둥 떠 있는 성물 주변으로는 눈도, 돌조각도, 잔해도 없었다.

‘그런데… 뭐 없나?’

도진은 주변을 경계했다.

지금쯤 뭐라도 튀어나와서 방해를 해야 정상인데.

이렇게 쉽게 이런 중요한 오브젝트를 손에 넣게 할 게임이 아니었다.

혹시 저기 손을 대면 번쩍- 하고 보스 몬스터든 뭐든 나타나는 게 아닐까.

걱정은 됐지만, 진행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도진은 언제든 싸울 준비를 마친 상태로 성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혹시 몰라 카린은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서.

“뭐야?”

그런데 정작 도진의 손이 장막에 막혔다.

푸른 유리관 같은 기둥이 성물 조각에 닿는 걸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그럼 이거겠지.”

하나 도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십중팔구 퀘스트 아이템을 내밀면 해결이 되기 때문이다.

역시나.

【아아아아!】

<신의 모루>에서 얻은 ‘별빛 영혼 주괴’와 닿자 푸른 기둥이 서서히 사라졌다.

환희에 찬 소리는 주괴 안에 담긴 영혼들이 내는 소리인 듯했다.

성물과 접촉하면서 의식이 각성된 건지도 모르겠다.

바라 마지않던 성역에 돌아온 걸 느꼈다면 기쁠 만도 하지.

“…이러고도 아무 일이 없어?”

반쪽짜리 원판은 지나치게 순탄히 도진의 손에 들어왔다.

뭐 이런 경우도 없진 않다.

허망할 정도로 쉽게 가서 당혹스러웠던 경험이 가끔 있긴 하니.

도진은 성물을 들고 돌아섰다.

멀찍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카린이 보였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소리치는 그녀를 안심시킨 도진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보였던 환영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밤이었던 시간은 어느새 해가 뜬 시간으로 변해 있었다.

카린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도진은 마음에 좋지 않아 염동력과 눈으로 차양막을 만들어 줬다.

“어둠은 충분히 있으니까 괜찮아요.”

“가뜩이나 약해진 상태인데 혹시 모르잖아.”

카린은 도진의 배려가 기꺼운지 밝게 웃었다.

도진은 속도를 높였다.

태양 아래 흡혈귀를 오래 둘 수는 없으니.

빠르게 신전으로 돌아온 도진은 다시금 벽에 고정된 노인 앞에 섰다.

“가지고 왔습니다.”

발소리에 이미 고개를 들고 있던 노인은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오오… 드디어……!”

눈이 멀쩡했다면 눈물이라도 흘렸을 거 같은 목소리였다.

안구만이 아니라 그 주변 자체가 상해 버려 눈물은 흘리지 못했지만.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성물을 완전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성역이 안정화될 거야.”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노인.

도진은 나머지 반쪽의 소재를 물으려다 말았다.

저런 상태인 사람한테 물어봐야 답이 나오겠나.

태도를 볼 때 알고 있었으면 벌써 얘기해 줬겠지.

도진은 무너진 신전 내부를 돌아다니며 원판의 반대쪽 피스를 찾아다녔다.

결과적으로, 성물의 나머지는 무너진 신전 안쪽에 있었다.

힘센 흡혈귀가 커다란 기둥과 바위를 치워 준 덕에 진입이 어렵지는 않았다.

갈라진 성물의 양쪽 조각을 챙겨 노인 앞에 선 도진이 말했다.

“카린, 멀리 물러나 있어. 가능하면 밖으로 도망갈 준비도 하고.”

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하지만 표정을 보아 무슨 사달이 나도 얌전히 도망갈 눈치는 절대 아니었다.

‘내가 힘만 더 셌어도.’

한숨을 내쉰 도진은 갈라진 성물을 이어 붙였다.

그러자 단단한 돌조각이 마치 찰흙이라도 되는 거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우우웅-

약간의 진동과 함께 성물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와 신전 전체로 퍼져 나갔다.

노인도 그걸 느꼈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전율한다.

“됐다, 됐어……! 드디어 나도 자유를 되찾겠구나!”

성물은 계속해서 푸른색 힘을 토해 냈다.

그것 전부가 아래로 가라앉으며 빠르게 어디론가 흘러갔다.

그러한 현상에 맞춰 노인의 눈도 재생되기 시작했다.

“보인다, 앞이 보여!”

멀쩡해진 눈으로 눈물을 흘리는 노인.

노인은 가는 팔을 움직여 자신을 고정하고 있는 검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그걸 뽑아낸다.

놀라운 힘이었다.

털부덕- 하고 바닥에 떨어진 노인은 전신을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흐, 포기하지 않고 버티길 잘했구나. 네 덕이다.”

비척이며 몸을 일으킨 노인은 고개를 팍- 하고 들었다.

도진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광기가 일렁였다.

오랜 시간 고생해서 피어난 감정이라기엔 너무나 확고한 광기.

이쯤에서 도진은 확신했다.

저 노인, 뭔가 있다.

그래도 도진은 참았다.

성물을 합치기 전부터 이미 만반의 공격 준비를 마쳤지만, 당장 저 할머니에게 마법을 퍼붓고 싶지만, 참았다.

혹시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아아- 별이시여!”

노인이 손을 들어 올리며 기도를 올렸다.

성물에서 흘러나온 힘이 그녀 주변을 휘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푸른색 빛이 붉은빛으로 바뀌는 게 보였다.

‘이젠 확신해도 돼.’

그걸 보자마자 도진은 마법회로에 걸어 뒀던 잠금을 풀고, 장전해 놓은 마법을 발사했다.

“……!”

수상함이란 수상함은 다 뿜어 놓고는 노인은 도진이 공격할 거란 예상은 못 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다짜고짜 이게 무슨……!”

퍼버벙.

뒷말은 마법이 터지는 소리에 묻혔다.

폭염이 가라앉고 나타난 노인의 모습은 멀쩡했다.

당황은 가시고, 어느새 그녀는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너희의 헌신은 보답받을 것이다. 그러니 기다리거라. 이제 와서 무엇을 깨닫든 이미 저지른 어리석음을 되돌릴 순 없지 않겠느냐.”

도진은 혀를 찼다.

보스 각성을 방해해 보려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아까 죽여 버렸어야 했나.’

노인은 대놓고 수상했었다.

해서, 도진은 처음부터 저 노인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공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말 무고한 NPC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었고, 퀘스트의 정상 진행을 위해서는 알면서도 속아 줘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각성하고 적당히 보스몹 잡고 끝났으면 좋겠는데.’

노인과 대치한 상태로 생각하며, 도진은 카린에게 경고하려 했다.

한데 카린은 이미 차분하게 노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저 노인이 흑막이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하긴 카린도 소설책으로 단련된 방구석 전문가다.

클리셰를 꿰뚫어 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두려워 말라!”

어쩌고저쩌고.

예정된 멸망은 곧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같은 대사를 치는 노인.

혼자서 격앙되어 중얼대는 노인 주변으로 점점 더 붉은 기운이 강렬하게 모여든다.

정확히는 성물에서 흘러나오는 벨라의 힘을 라베스의 힘으로 바꾸는 거 같은데.

“언제까지 할 거예요?”

스킵도 안 되고, 재미도 없는 뻔한 컷신을 도진은 싫어했다.

해서 당사자한테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물어보니 이번에는 정말 당황한 눈치였다.

“…지금 상황이 파악이 안 되는 거냐?”

“상황 파악은 처음부터 했고, 그래서 언제 끝나는 건데?”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던 노인은 도진의 시큰둥한 반응에 진심으로 화가 났는지 파들파들 떨었다.

“금방 끝날 것이다. 모든 것이.”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노인이 딛고 선 바닥이 무너졌다.

‘어? 이건 예상보다 좀 더 나가는 건데?’

덩치나 커질까 했지 지반 붕괴는 또 다른 이야기다.

균열이 커지는 걸 본 도진은 재빨리 물러났다.

그런데 균열이 계속해서 쫓아왔다.

“카린!”

카린에게 경고하며 도진은 신전 밖으로 탈출하려 했다.

그런 그를 카린이 낚아챘다.

“힘이 돌아왔답니다!”

주변을 채운 힘의 균형이 라베스 쪽으로 기운 덕에, 억눌렸던 힘이 돌아온 카린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도진을 데리고 신전을 빠져나온 카린은 높게 치솟았다. 카린의 도움이 없었다면 신전이 붕괴하기 전에 탈출하는 게 아주 빠듯했을 거 같다.

‘눈사람 좀비 떼에 눈사태에 이젠 절벽을 붕괴시켜서 압사시키려 들어?’

퀘스트 꼴이 아주 죽인다.

이쯤 되니 도진은 정말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 끝에 받을 보상은 얼마나 대단한 걸지가 말이다.

“하.”

붕괴된 신전에서 기어나오는 걸 본 도진은 한층 더 기대를 높였다.

“멸망교 애들 맞네.”

보스 몬스터의 정체는 커다란 살덩이였다.

학살당한 자들의 시체에서 살점을 고이 발라 뭉쳐 놓은 끔찍한 고기 덩어리.

그 위에 반쯤 파묻힌 노인이 보였다.

“하하하! 그저 밑바닥 사제였던 내가 결국에는 여기까지 왔구나!”

시체를 가지고 이런저런 언데드 장난질을 하는 건 멸망교단의 전매특허다.

LOST에 언데드 쪽 몬스터 비율이 높은 게 괜히 그런 게 아닌 것이다.

저건 그 특징적 전통의 시발점쯤 될 거다.

‘그래도 다행이네. 이쪽도 밀리진 않으니.’

딱 봐도 사이즈가 혼자 잡기에는 힘들겠지만, 이쪽도 언데드하면 밀리지 않는다.

최상위 언데드인 뱀파이어, 그중에서도 또 최상위에 자리하는 엘더.

이쪽도 봉인이 풀린 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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