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어느 정도 상태가 회복됐다고 판단될 때쯤 도진은 지상으로 향했다.
쌓인 눈을 뚫고 터널을 내는 건 카린이 도맡았다.
카린은 정말 고성능 두더지였다.
그녀는 마법을 써도 이만큼 빠르게는 올라가지 못할 거 같은 속도로 지상으로 향하는 길을 냈다.
“후압!”
새하얀 설원에 쇽 하고 카린의 머리가 등장했다.
재빠르게 지상으로 올라간 그녀는 자신이 나온 구멍으로 다시 머리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제가 올려드릴게요!”
안쪽에서 기어 오던 도진을 붙잡아 공깃돌처럼 휙 꺼내는 카린.
눈밭에 올라온 도진은 그대로 드러눕는 순간.
[성역이 돌아온 순교자들의 영혼을 맞이해 과거의 모습을 투영합니다.]
사방에서 눈안개가 일어 거대한 건물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와아……!”
“이건…….”
순식간에 카린과 도진이 있는 장소가 단순한 설원에서 눈안개로 만들어진 거대한 도시 한복판으로 바뀌었다.
눈안개가 만든, 아니 투영한 건 건물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살았던 자들의 모습까지도 생생하게 재현해 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성역의 정상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아아악! 너, 너……! 네가 왜……?】
【무슨 짓이에요! 왜 우리를……!】
뭉쳤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위태로운 도시 안에서 수많은 인영이 학살당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는 소리가 사방에서 쉼 없이 울렸다.
카린은 그 소리가 듣기 싫은지 눈을 꼭 감고 귀를 막았다.
“이건 뭐… 성역보다는 학살로 인해 사념이 똘똘 뭉친 귀신의 집 같은 느낌인데.”
학살당하고, 학살하는 쪽 모두 인간만 있는 게 아니었다.
눈안개로 어설프게 만들어진 인영이라 하나하나 정확히 짚어 낼 수는 없어도, 종족이 다 다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덩치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인간과 비슷한 자도 있고, 난쟁이처럼 보이는 자, 월등히 덩치가 큰 거인까지.
【우리는 불멸할 것이다! 선택받을 것이다!】
【선택을 거부하는 자, 두려워하는 자, 너희는 죄인이다!】
격앙된 학살자들의 목소리에는 신앙적 광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겨우 바람에 나부끼는 눈발로 재현된 광경이 이렇게 기분이 나쁘다니.
실제로 저 현장을 봤다면, 아마 미친 광신자들을 향해 마법을 난사했을 거다.
‘쓸데없이 리얼하게 만들어 놨네.’
아이를 안고 달려가던 여자의 등에 창이 꽂히는 장면을 본 도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창을 던진 광신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도진은 광신자의 형상을 불로 휩쓸었다.
불쾌함을 덜기 위한 무의미한 행위였다.
“가자, 카린.”
끝날 줄 모르는 학살의 재연 현장에 계속 머물 이유는 없다.
도진은 카린을 일으켜 세웠다.
“카린, 미안해. 이런 데 데리고 와서.”
도진의 말에 카린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대답했다.
“…아뇨, 전 그런 게 아니라…….”
말을 하던 카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주변에 보이는 장면 때문에 그런 줄 알았더니, 정작 그쪽에는 신경도 못 쓰는 눈치다.
“설마 아까처럼 힘이 제한되고 있는 건-”
“아뇨. 아니에요.”
카린이 빠르게 부정했다.
“오히려 처음보다 나아졌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도진은 더 캐물으려 했지만, 카린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몸에 문제가 생긴 거면 강제로라도 돌려보낸다고 협박도 해 봤으나 발로 땅을 굴러 눈밭에 크레이터를 만들며 멀쩡하다고 주장하니 할 말이 없었다.
“…좋아. 하지만 조금이라도 문제 생길 거 같으면 바로 내려가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카린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렇게 다시 한 사람과 한 흡혈귀의 산행이 재개됐다.
물리적인 방해는 더는 없었다.
주변에서 계속 시끄럽게 울리는 비명이 눈보라에 실려 왔으나 어느새 익숙해질 수 있었다.
지속적으로 쌓이는 육체적 피로가 그쪽으로 신경이 쏠리는 걸 막기도 했고.
그러다 어느 지점을 넘어가자 산을 깎아 만든 인공적인 절벽과 절벽을 뚫어 지은 신전 같은 것이 나왔다.
‘눈사태가 저걸 드러내려고 일어난 거였나?’
신전 입구는 열려 있었다.
정확히는 막고 있어야 할 문이 부서진 상태였다.
새까만 구멍이 마치 산이 입을 벌리고 있는 거처럼 보였다.
한없이 불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을 일.
도진은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꼴이 말이 아니군.’
안은 온통 눈과 얼음과 잔해뿐이었다.
여기저기 다 무너져 내려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력을 동원해도 복원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뼈가 있어요.”
잔해에 섞인 뼈들이 보였다.
“이들이 살아 있던 시대엔 거인도 나름 흔한 종족이었나 보네.”
도진은 천장에 인테리어처럼 걸려 있는 거대한 팔뚝 뼈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런 추위 속에서 시체가 썩긴 하나?’
밖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신전 내부는 따뜻하기라도 했던 걸까.
그런 궁금증을 품으며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자 확 트인 공간이 나왔다.
여전히 다 무너져 있긴 하지만 뭉개진 와중에도 고풍스런 장식이 눈에 띄는 걸 보니 뭔가 특별한 장소 같았다.
“도진 님, 저기!”
거기다 아주 특이한 장식품도 있었다.
기둥에 못 박힌 할머니였다.
“…너희는 누구냐?”
심지어 할머니는 살아있었다.
눈이 뽑히고, 심장에 박힌 검에 의해 기둥에 고정되어 있음에도 살아 있다니.
‘퀘스트 내용 갱신은… 없군.’
수상함게 경계부터 하고 보는 도진이었으나 카린은 달랐다.
그녀는 냉큼 달려가 검부터 뽑으려 했다.
파지직-
그러나 그녀는 기둥에 닿지도 못했다.
밝은 섬광과 함께 카린이 튕겨져 나왔다.
“카린!”
깜짝 놀란 도진이 카린을 불렀으나 다행히 그녀는 균형을 잡고 멀쩡하게 착지했다.
돌발행동에 화가 난 도진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
“그리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봉인은 약해지지 않은 것인가…….”
의문의 노인이 착잡하게 중얼댔다.
그녀는 안구가 없어 움푹 파인 눈을 돌려대며 말했다.
“다시 물으마. 너희는 누구고,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냐?”
도진이 대답했다.
“우린 평범한 모험가고, 어느 던전에서 만난 영혼에게 부탁을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자신들의 성역에 자신들의 유해를 운반해 달라고 하더군요.”
“평범한 모험가라…….”
노인은 카린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녀의 정체를 아는 듯이.
그러나 무언가 더 말하진 않았다.
“당신은 누굽니까.”
도진이 물었다.
노인은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별을 모시던 사제 중 한 명이지.”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단순히 유해를 가져다 놓는 걸로 마무리될 퀘스트면 벌써 반응이 왔어야 했다.
그런데 일어나는 현상도 그렇고, 갱신되지 않는 퀘스트 정보까지…….
뭔가 더 찾아야 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생존자 사제는 유일한 실마리나 다름없었다.
“아주 많은 일이 있었지…….”
얼마나 오래 이곳에 홀로 있었을지 가늠도 안 되는 노인은 순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말을 나눌 상대가 간절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별에게 생명을 받아, 별을 모시며 시간을 보내고, 그 끝에 생명을 별에게 돌려드리는 삶을 당연히 여기며 살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지.”
노인은 덤덤한 어투로 ‘새로운 별’을 섬기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말을 했다.
“그들은 창조가 아닌 죽음과 멸망을 상징하는 붉은 별에 신앙을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믿는 자’는 죽음과 멸망을 겪지 않을 거라고.”
노인이 말한 건 흔한 사이비 종교의 교리와 닮아 있었다.
세상에는 필연적인 멸망이 찾아올 것이고, 그건 피할 수 없겠지만, 믿음이 확고한 신자들은 구원받고 영원히 윤택한 삶을 누릴 거라는 개소리.
‘벨라와 라베스. 벨라 교단과 멸망 교단의 전신쯤 되는 거겠군.’
전신이라기에는 아예 중간 지점이 뚝 끊어져 문명과 역사가 리셋된 거 같지만, 어쨌든.
“그러한 믿음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창조의 별께서 만든 것. 어떠한 현상마저도 그러하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그들은 존중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들의 믿음은 어떤 역치를 넘어 버렸다.”
노인은 경건한 성서의 한 구절을 읽듯 말했다.
“우리는 믿음과 헌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예정된 멸망에서 구원받을지니.”
그것이 학살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창조를 믿는 자들은 그들을 포용했으나 멸망을 믿는 자들은 다른 모든 걸 재물로 삼고자 했다. 멸망을 하루라도 앞당기는 게 자신들의 사명이라 여기기 시작했지.”
멸망을 앞당겨 자신들의 신에게 잘 보이고, 자신들은 더 빨리 구원과 영광을 맞이하게 되는 것.
그게 그자들의 절대적 교리이자 목적이 됐다고 했다.
“그 결과가 이 꼴이라는 말이군요.”
“…….”
도진은 생각했다.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은 시대에 벨라 교단의 명맥은 완전히 끊어졌다.
하지만 멸망 교단의 명맥은 얇게나마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게 아닐까 하고.
“우리가 도울 방법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좀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퀘스트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알려 달라는 말이었다.
노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지금 이곳은 여러 힘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이곳이 완전한 성역이던 시절 쌓였던 창조의 별빛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여기서 죽어간 자들의 원한과 사념도 남아 있지. 그것이 뒤섞여 날 이렇게 만든 것이고.”
“해결할 방법은…….”
“모른다. 다만… 부서진 성물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성역이 정상화될 가능성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드디어 나왔다. 퀘스트 진행할 떡밥이.
“그들은 성물의 일부를 떼서 산 정상으로 가져갔다. 자신들의 별에게 바치겠다며 말이다. 하나 그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 언제나 온화했던 창조의 별의 분노가 그들을 덮쳤거든.”
그게 산이 싹둑 잘려 나간 이유였나.
노인에게 물어도 거기까진 알 수 없을 거다.
저 할머니는 그때도 여기서 이러고 있었을 테니.
“그럼 더 위로 올라가서 성물 조각을 찾아서 가지고 오면 된다는 거죠?”
“…확신할 수는 없지만, 품을 수 있는 희망은 그것뿐이구나.”
“가져오겠습니다.”
이거 말고는 딱히 퀘스트를 진행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 일단 들쑤시고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