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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65화 (16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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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 님, 저쪽 아래에 뭔가 꿈틀거려요!”

위쪽을 보며 착잡해하는 도진을 카린이 불렀다.

돌아보니 그녀의 말대로 눈밭이 꿈틀대고 있었다.

[묻힌 자들이 깨어납니다.]

적색과 청색 기운이 요동치며 뭉치더니, 검게 물들고, 그게 다시 눈밭에 깃들었다.

꿈틀거리며 솟아오른 하얀 눈덩이들이 검은색 인영이 되어 포효한다.

-그아아아!

포효를 마치기 무섭게 ‘묻힌 자’들은 도진과 카린에게 달려들었다.

“시발.”

멀쩡히 돌아가는 게 없네.

도망가고 뭐 하고 할 새도 없이 전투가 시작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도진의 마법이 놈들에게 통한다는 거였다.

지역 레벨에 맞춰서 적이 등장했으면 기스도 못 냈을 텐데, 퀘스트 레벨에 맞춰 조정이 된 덕이다.

“카린 괜찮아?”

“넵! 멀쩡-”

쾅-!

카린의 주먹질에 묻힌 자 셋이 동시에 터져 나갔다.

성역에 억눌려 힘 일부가 봉인된 상태에서도 그녀는 상당한 전투력을 보존하고 있었다.

‘성역이 이 꼴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정황상 성역이 온전치 못해서 엘더의 힘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이유야 어쨌든 중요한 건 눈앞에 닥친 상황이다.

이대로 싸우다간 끝이 없을 기세다.

“도대체 몇 마리야!”

아래쪽 전체가 검은색 눈사람으로 가득했다.

지금도 계속 눈밭에서 일어나는 중이고.

숫자를 헤아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제가 세어 볼까요?”

정말 일일이 숫자를 셀 것처럼 순진하게 묻는 카린이 도진의 속을 뒤집어 놨다.

“세긴 뭘 세! 뛰어!”

아무리 양심이 뒤진 게임이라지만, 수백, 수천을 넘어 만 단위까지 봐야 될 듯 밀려오는 저 몬스터들을 다 잡으라는 건 아닐 거다.

그러면 남은 선택지는 몬스터 웨이브로 꽉 막힌 아래쪽이 아닌 위쪽으로 진행하는 것뿐.

도진은 카린을 데리고 위쪽을 향해 달렸다.

-그어어어!

목을 칼로 난도질한 듯 쇠긁는 소리를 내며 위쪽 방향에서도 묻힌 자들이 솟아났다.

그래도 아래쪽보다는 숫자가 훨씬 적었다.

도진은 방해하는 놈들을 처치하며 빠르게 전진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검은 기운 덩어리였다.

‘저 주변에서 눈사람이 만들어지는 거 같은데.’

이런 전투에서 눈에 거슬리는 게 있으면 그게 바로 사태의 원흉이다.

도진은 검은 소용돌이를 향해 섬광창을 시전했다.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검은 소용돌이가 소멸했다.

그러자 그쪽 주변의 묻힌 자 수십이 동시에 무너져내린다.

“검은색 기운이 뭉쳐 있는 게 보이면 그것부터 부숴!”

“네, 저도 봤어요!”

도진이 하는 걸 본 카린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검은 소용돌이를 발견하고는 손을 뻗었다.

피를 뿜어내 전방을 초토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앗!”

하지만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간 피는 그대로 촥 하고 뿜어져 설원을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몸 밖으로 나간 피는 바로 힘을 잃어버리는 듯했다.

카린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힘은 세답니다.’

카린은 옆에 솟아 있는 뾰족한 바위를 걷어찼다.

콰직.

눈과 얼음에 덮여 있던 바위를 부러뜨린 카린은 그걸 움켜쥐고는 그대로 집어던졌다.

퍼어엉!

묻힌 자 다수를 휩쓸며 날아가 검은 소용돌이와 충돌한 바위가 눈폭발을 일으켰다.

“어때요!”

자랑스레 외치는 카린.

“그래, 힘세서 좋겠다!”

도진은 화염으로 벽을 세워 한쪽 방향을 막았다.

묻힌 자를 일으켜 세우는 검은 소용돌이가 너무 멀어서 저쪽은 처리할 수가 없었던 것.

도진은 길을 막으려 드는 놈들을 빠르게 저승길로 보내며 위로 올라갔다.

위로 올라갈수록 생성되는 적의 수가 줄어들었다.

반면 아래쪽은 더 숫자가 불어나 있었다.

이젠 하얀색보다 검은색이 더 많이 보일 지경.

흡사 흰색 아이스크림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개미 떼를 보는 듯했다.

‘이딴 게 성역이라고?’

뭔 사달이 나서 이 모양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거지같았다.

추워 죽겠어야 정상인 동네에서 땀 뻘뻘 흘리며 불로 검정색 눈사람들을 녹여 대고 있는 현실이라니.

“도진 님!”

속으로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발로는 뛰고, 손으로는 마법을 시전하고 있을 때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카린이 도진의 허리춤을 붙잡고 높이 도약한 것이었다.

콰지직.

이유는 갑자기 솟아오른 거인 때문이었다.

묻힌 자와 마찬가지로 검은색 눈이 뭉쳐져 일어난 거인의 손이 도진과 카린이 있던 곳을 휩쓸었다.

“저기 가슴이요!”

공중에서 카린이 눈짓으로 거인의 심장부를 가리켰다.

응집된 검은 소용돌이가 있었다.

《화염포탄》

공중에 뜬 채로 날린 커다란 불덩이가 빨려 들어가듯 거인의 심장부에 꽂혔다.

소용돌이치는 검은 기운에 불길이 함께 휘몰아치다가 퍼엉- 하고 터져 나갔다.

그 즉시 거인도 같이 무너졌다.

탁.

땅에 안착한 카린이 도진을 내려줬다.

이걸로 위기 하나는 넘긴 건가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아주 가지가지하네.”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커다란 덩치들이 앞다퉈 몸을 일으킨다.

허리 밑으로는 눈밭에 파묻힌 거인들은 검까지 빼들고 방문자를 반겼다.

[잊힌 자들이 깨어났습니다.]

묻히고 잊히고.

그냥 계속 그대로 잠들어 있고, 잊힌 채로 있어 줬으면 좋았을 걸 괜히 일어나서 사람 힘들게 만들고 있어.

도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린, 오른쪽 것들 처리할 수 있지?”

“물론이죠!”

그래, 아까 보니까 힘이 아주 넘치더라.

고개를 끄덕인 도진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바닥을 쓸고, 위에서 찍고, 찔러 들어오는 공격들.

적의 덩치가 커진 만큼 그것 하나하나가 범위 공격으로 들어온다.

「염동강화」를 있는 대로 끌어 올린 도진은 닥쳐오는 공격을 구르고, 도약하며 회피했다.

그러면서 가까운 순서대로 잊힌 자들의 심장에 마법을 섞어 넣어 터뜨렸다.

‘약한 마법으로는 부족한가 보네.’

검게 휘몰아치는 놈들의 심장은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이 섞이면 스스로 과부하를 일으키며 터지는 거 같았다.

말이 이렇다는 거고, 결국 어느 정도 위력이 나오는 마법으로 약점을 두드리면 알아서 터져 나간다는 소리다.

누군가에게는 살인적이다 못해 아예 통과가 불가능할 그런 난관이었지만, 마법사의 높은 공격력에 마법사답지 못한 기동력이 더해지니 흑설거인(黑雪巨人)들은 도진의 이동속도와 비례하는 속도로 무너져갔다.

“흐압! 흐압! 합합합!”

카린 쪽은 아예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격 수단을, 그것이 칼이 됐든 창이 됐든 주먹이 됐든 다 뭉개면서 덩치 큰 눈사람들을 말 그대로 짓뭉개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전진했을까. 낙하지점에서 훨씬 더 높은 곳까지 올라오자 변화가 일어났다.

어디까지라도 추격할 기세로 달라붙던 작은 눈사람(묻힌 자)들이 어느 선을 경계로 더 이상 접근을 못 하게 된 것이었다.

정신없이 도진과 카린을 추격하다 그 선을 넘긴 놈들은 달리던 기세 그대로 눈으로 돌아가며 팟- 하고 부서졌다.

‘저것들은 오염된 거고, 저길 경계로는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는 건가 본데.’

덩치 큰 놈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이제 숨 좀 돌려도 되는 건가.”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 저놈들이 저 경계를 넘어 달려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게 LOST다.

옆에서 다시 새로운 적이 튀어나올 수도 있는 거고.

“후우. 일단 회복부터 제대로 해 놔야지.”

쉴 틈이 생겼으니 정비부터 해야겠다 생각한 도진은 HP와 MP부터 챙겼다.

꿀꺽꿀꺽 빠르게 포션을 마시면서도 계속해서 적을 경계했다.

언제든, 무슨 상황이 벌어지든 빠르게 대처하겠다는 생각으로-

쿠그그그긍.

그때 후방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다.

아래쪽을 보던 시선을 위로 급히 옮기자 저 멀리 하얀 먼지 같은 게 보였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눈사태였다.

새로운 적이 나타날까 걱정했더니 이 빌어먹을 성역께서 더한 걸 선물로 던진 것이다.

“카린!”

도진은 카린을 부르며 마법을 준비했다.

피할 곳도 마땅찮은 개활지에서 저 정도 규모의 눈사태에 휩쓸리면 거의 무조건 죽을 거다.

피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고.

《얼음벽》

그래서 도진은 피할 장소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도진이 바닥에 손을 대고 마법을 시전하자 주변 눈이 얼어붙으며 작은 돔을 형성했다.

‘이걸로는 절대 못 버텨.’

얼음벽 하나로 버티기엔 자연재해의 규모가 너무 크다.

《암석 방패》

도진은 암석 방패도 연속으로 시전에서 강도를 보강하고, 다시 얼음벽으로 한 번 더 작은 돔을 만들었다.

얼음, 암석, 얼음 순으로 3중 격벽을 만든 것이다. 마지막 「얼음벽」 주문은 「파멸 룬」까지 써서 위력을 올렸다.

거기까지 하고, 눈사태가 밀려오는 방향에 손을 댄 도진은 버틸 준비를 하며 말했다.

“카린, 무너지지 않게 버텨야 돼! 이거 무너지면 끝장이다!”

쿠우웅-

말을 끝내기 무섭게 충격이 일었다.

눈사태가 도착한 거다.

1차 충격에 이어서 계속해서 눈이 밀려오면서 쌓이는 어마어마한 눈의 무게에 도진이 만든 작은 피난처가 비명을 질렀다.

꾸지직, 꾸지직- 하며 뭉개지려는 걸 도진은 실시간으로 보강하면서 버티고 버텼다.

“저도 도울게요!”

카린도 합세했다.

그녀는 천장에 손을 대고 그대로 쭉 밀어 올리는 자세를 취했다.

놀랍게도 그녀의 힘이 보태지니 터져 나갈 듯이 고통을 호소하던 마법회로가 조금 여유를 되찾았다.

‘이번 퀘스트 끝나면 따뜻한 동네에서 일주일은 그냥 누워만 있어야지.’

더위도 추위도 질색인 도진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차라리 더운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쿵, 콰직, 쿠웅.

연속으로 울리던 압사를 암시하는 소리가 어느 순간 멎었다.

“…끝난 거 같은데요?”

반쯤 내려앉은 피난처에서 구겨진 자세로 눈을 굴리며 카린이 말했다.

붕괴 현장 구조물 틈에서 겨우 살아남은 꼴을 한 도진이 말했다.

“잠깐만 쉬자.”

피곤해서 손가락을 까닥하기도 힘들었다.

이런저런 고생은 종류별로 해 본 도진이지만, 오늘은 진짜 그중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거 같았다.

하늘을 날다가 추락하고, 수만이 넘는 몬스터한테 쫓겨서 눈 덮인 오르막을 미친 듯이 뛰고, 눈으로 만들어진 거인들 수십을 상대로 드잡이질… 그다음에는 눈사태에 휘말렸다.

인생에서 하나만 겪어도 레전드로 남을 사건을, 아무리 가상현실이라 해도 하루도 아닌 15분 사이에 이걸 다 겪는 게 말이 되나?

“그래도 재밌는 거 같아요! 저 이런 건 소설에서도 읽은 적이 없거든요! 이렇게 좁은 곳에 갇혀 보는 것도 처음이랍니다!”

카린의 말이 도진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소설에서도 읽은 적 없는’ 게 지금 하고 있는 개고생이란 소리잖아.

도진은 생글거리며 웃는 카린에게 힘없이 말했다.

“…너라도 재밌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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