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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뜰 때쯤 잠든 도진은 밤이 되어 눈을 떴다.
카린이 있으니 밤에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부유대륙의 지상으로 올라온 도진은 카린에게 물었다.
“여기서 가장 높은 곳이 어디야?”
<신의 모루>에서 얻은 히든 퀘스트에서 도진이 주목한 키워드는 ‘창조의 별과 가장 가까운 그곳’이었다.
은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식으로 꼬아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세상 어디든 그들의 성역이 될 수 있으니 답이 없다.
그래서 도진은 심플하게 물리적으로 가장 별과 가까울 장소. 즉,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장소로 목적지를 정했다.
‘로스타니아에서 가장 높은 장소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그 장소가 있는 곳은 무조건 부유대륙일 수밖에 없지.’
이미 거대한 땅덩이를 하늘에 띄우고, 공기를 붙잡아 두고 있는 불가사의한 마법적 현상이 아니면 숨 쉴 공기마저 부족해야 할 높이.
다른 대륙에 아무리 까마득한 산이 있다 한들 해발고도는 부유대륙의 뒷동산이 더 높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 있다면 이 땅덩이 위에 있을 거다.
“가장 높은 곳이요?”
카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진이 그런 데를 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궁금한 듯이.
“음… 워낙 높은 곳이 많아서 잘 모르겠어요. 저쪽으로 가도 산맥들이 잔뜩 있고, 저쪽은 아예 높은 산이 수백 개가 밀집된 곳도 있거든요.”
“눈으로 봐서 알 정도로 확 차이 나는 높이는 아니라는 건가…….”
압도적으로 높은 곳이 있으면 좋았을 것을.
“어쩔 수 없지. 네가 생각하기에 가장 높을 거 같은 데 위주로 둘러보는 수밖에.”
“저만 믿으세요!”
카린의 고개가 북쪽을 향했다.
부유대륙은 위험천만한 곳이지만, 200, 300, 400… 아무리 레벨 높은 몬스터가 여기저기 분포하면 뭐 하나. 어차피 하늘을 날아서 이동할 건데.
하늘이라고 마냥 안전한 건 아니지만, 이동수단이 뱀파이어 엘더면 위협이 될 존재는 매우 드물었다.
“저기랍니다!”
길잡이 역할을 맡게 된 게 신이 나는지 카린은 날개를 팔락거리며 전방을 가리켰다.
산이 더럽게 많다.
험준함이 과장을 좀 보태면 지구에서는 보기 힘들고, 저기 화성쯤 가야 볼 수 있을 거 같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거 퀘스트 난이도가 말이 안 되잖아.’
자신이야 대공과 카린이라는 인맥이 있어서 이러고 있다 치자.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부유대륙에 발을 딛는 것부터가 문제에다 그게 해결된다 해도 직접 발품을 팔아 제일 높은 곳이 어딘지 확인하고 다녀야 한다는 건데…….
‘막막함이 과한데.’
아마 퀘스트를 얻자마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른 어딘가에서 추가적인 단서와 정보를 수집해 가며 진행해야 할 퀘스트가 아니었을지.
‘뭐, 결과적으로 깰 수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내가 감당하기 힘들면 치트키도 있고.’
레벨이 몇인지도 모를 엘더를 내세우면 아무리 히든 보정을 받아도 보상에 페널티가 덕지덕지 붙긴 하겠지.
하지만 퀘스트를 실패하거나 기약 없이 미루는 것보다는 당장 깨는 게 훨씬 낫다.
‘역시 인생은 인맥이야.’
인생의 진리를 모르겠으면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인생은 인맥이고, 호감작은 무적이다.
“대충 봐서는 저거랑 저거… 그리고 저쪽에 세 개쯤이 제일 높아 보이는데.”
“가장 가까운 곳부터 가 볼게요!”
도진은 엇비슷하게 솟아 있는 산들 중 제일 높아 보이는 것들을 골라냈고, 카린은 그것들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날아갔다.
휘익- 하고 고도를 급격하게 올리는 카린. 부유대륙 지표면에서마저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되니 숨을 쉬는 게 쉽지 않았다.
“얼어 죽기 딱 좋은 날씨네.”
바로 산 정상에 도착한 도진의 감상.
초인과 다를 바 없는 이쪽 세상의 몸뚱이여서 망정이지 현실의 육체였으면 바로 급속냉동 참치꼴이 됐을 것만 같은 추위였다.
“많이 추운가요?”
추위를 느낄 일 없는 카린이 걱정스레 물었다.
도진은 고개를 저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추위에 대한 대비는 나름 철저하게 하고 왔어.”
추위 내성을 뚫고 들어오는 한기가 거슬리긴 해도 견딜 만은 했다.
정 견디기 어려우면 마나 소모를 감내하고 화기를 돌리면 그만이고.
어쨌든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반응이 없네.’
히든 퀘스트도, 퀘스트 아이템인 ‘별빛 영혼 주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년설 쌓인 이 산 어딘가에 뭔가가 있다면 뭐가 됐는 반응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다는 건 이곳이 퀘스트랑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곳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거다.
“여기가 아닌-”
‘-가 봐’ 하고 카린을 향해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가 허공에 주먹을 뻗었다.
쾅!
도진 바로 옆이 터져 나갔다.
전방으로 부채꼴 눈보라가 몰아쳤다.
한데 흰색 눈보라에 새빨간 물감이 함께 튄다.
“…….”
확인해 보니 설표였던 가죽 쪼가리가 흩어진 게 보였다.
은신해서 사냥감(도진)을 노리다가 카린에게 걸려 비명횡사를 한 것이었다.
“죄송해요. 다른 애들은 눈치를 주니까 알아서 도망갔는데, 쟤는 끝까지 갈 생각을 안 해서…….”
거참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네가 째려보는데도 어떻게든 먹어 보겠다고 살금살금 다가오다 저 꼴이 나고.
생각하는 걸 방해했다고 여겼는지 눈치를 보는 카린에게 고맙다 말한 도진은 다른 산으로 이동했다.
“여기도 아냐.”
하지만.
“여기도…….”
높아 보이는 곳을 찾아다니고 찾아다녀도 히든 퀘스트에 진전은 없었다. 실마리 또한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본 거라고는 설표, 곰, 백색 트롤에 오우거, 스노우 골렘……. 각종 지역 특산 일반 몬스터 세트뿐이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끝에 후보로 추렸던 곳은 물론이고 애매하게 걸쳐 있는 곳도 다 확인했다.
없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물리적인 높이를 말한 게 아니었나?’
심각한 표정으로 솟아 있는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는 도진.
“다, 다른 곳에도 높은 산은 정말 많이 있답니다!”
눈치를 보던 카린이 위로를 했다.
그러나 크게 위안이 되진 않았다.
부유대륙에서 가장 높은 곳이 있다면 여기일 거다 하고 찾아온 곳에서 허탕을 쳤다.
그러면 남은 후보군에서는 별다른 수확이 없을 확률이 더 높겠지.
‘그래도 일단 돌아보긴 해야겠지만.’
안 되면 다른 방향에서 단서를 찾아보는 수밖에.
다만 그렇게 되면 빠르게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건 불가능해질 것이다.
앞으로 게임을 하다가 운 좋게 단서를 입수하고, 퀘스트가 풀려 나가길 기대해야 하니.
‘기약 없는 퀘스트에 매달리기보다는 그냥 묵혀 뒀다가 얻어 걸리면 다시 진행하는 방향으로…….’
미리 마음의 정리를 하면서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도진의 눈이 한 방향에 고정됐다.
지금까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눈 덮인 평원이다.
아래로 깔려있지만, 저것도 엄연히 높은 산 위에 펼쳐진 설원이었다.
다만 도진이 있는 곳이 워낙 높아 상대적으로 아래에 있을 뿐.
‘그런데 저거 형태가…….’
근처에 있을 때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모르고 지나쳤으나 거리가 멀어지니 보이는 게 있었다.
“카린, 저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저 산 모양이… 꼭 뭔가 뭉개진 거 같잖아. 잘린 거처럼 보이기도 하고.”
도진의 말에 카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원래는 아주 높았던 산이 뭉개지고 잘려서 그 위가 평평해지고, 그래서 오랜 세월 끝에 평평한 평지처럼 변해 버린 듯한…….
“앗, 자세히 보니까 뭔가 울퉁불퉁한 거 같기도 해요!”
카린은 자신이 발견한 점을 보여 주기 위해 도진을 들고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고도를 평원과 수평이 되게끔 조정했다.
그러자 눈 쌓인 모양이 정말 울퉁불퉁했다.
마치 수많은 크레이터가 파여 있는 듯이 말이다.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과거에서 시작됐을 사건, 거기서 파생된 히든 퀘스트.
그렇다면.
‘과거에는 저게 가장 높은 산이었을 수도 있어.’
도진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카린, 저기로 날아가 줘.”
말을 하기 무섭게 목적지가 훅훅 하고 다가온다.
그만큼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푸른 별의 성역-]
거리를 다 좁히기도 전에 메시지가 떴다.
푸른 별의 성역.
됐다. 역시 높은 곳을 찾는 게 맞았던 거다.
다만 그게 현재가 아닌 과거에 가장 높았던 곳을 찾는 거여서-
[-이 부정한 것의 접근을 거부합니다.]
잠깐. 그런데 메시지가 뭔가 불안한데.
도진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날아가던 카린이 휘청했다.
“아앗!”
그녀의 날개가 사라졌다.
당황한 카린은 급하게 날개를 새롭게 만들어 보았으나 날개 모양으로 뭉쳤던 날개는 얼마 못 가 바로 무너졌다.
“카, 카린!”
“죄송해요! 뭔가가 제 힘을 억눌러서-”
날개와 함께 비행 능력까지 상실한 카린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미친, 이 높이에서 추락이라고?’
추락하고 있는데 바닥이 가까워지는 기색이 없다.
너무 지면이 멀어서 그런 거다.
마치 스카이다이빙을 할 때와 마찬가지다.
자유낙하 끝에 감내해야 할 충격이 더럽게 클 거란 뜻이었다.
염동력을 방출한다 해도 중력가속도를 상쇄하기에는 턱도 없을 테고.
‘날 수 있는 레벨이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빠르게 죽음을 피하기는 어려울 거란 결론을 내린 도진은 카린을 붙잡으며 말했다.
“카린, 너 혼자서라도 살아남아. 난 어차피 죽어도-”
말을 하는 도진을 카린이 꽉 끌어안았다.
어마어마한 완력에 숨이 막혀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헛소리 마세요.”
뱀파이어 엘더에 어울리는 차가운 목소리.
평소와 완전히 괴리된 한마디였다.
카린은 정신을 집중했다.
‘힘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냐.’
그걸 적절히 사용하면 살릴 수 있을 거다.
카린은 날개를 만들었다.
평범한 날개가 아니라, 최대한 넓게 펼친 피막 같은.
그것은 일종의 낙하산처럼 카린과 도진의 낙하 속도를 순간적으로 확 줄이는 역할을 했다.
카린은 넓은 피막을 계속해서 만들었다.
없어지면 또. 무너지면 또. 흩어져도 다시.
최대한 속도를 줄인 카린은 낙하 속도와 지면과의 거리 그리고 피막의 유지 시간을 계산했다.
‘지금이랍니다!’
피로 만든 낙하산이 마지막으로 펼쳐졌다.
덜컥- 하고 걸리는 순간적인 감속의 충격.
성역의 힘이 개입하며 피막이 찢기며 흩어진다.
카린은 몸을 뒤집었다.
도진을 위로 향하게 하고, 자신이 지면에 충돌하게끔.
쾅- 카드드득.
충돌하는 순간 피의 장막으로 도진과 자신을 감싸는 카린.
넓게 펼쳐야 했던 날개나 피막과 달리 몸에 두르는 피막은 조금 더 길게 유지가 가능했다.
얼음과 눈이 부서지며 붉게 물든다.
평소였다면 바로 회수됐을 카린의 피가 그대로 남아 흔적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 덕에 도진은 무사할 수 있었다.
“…크하악!”
갈비뼈 세 대가 나가고, 팔과 어깨가 부서지긴 했지만, 상황을 생각하면 ‘무사’하다고 해도 될 것이었다.
“카린……! 카린, 괜찮아?”
도진은 자신의 부상에도 카린의 안위부터 찾았다.
최대한 염동력을 방출해 그녀를 돕긴 했지만, 낙하의 충격 대부분을 받아낸 게 그녀였다.
게다가 성역이 카린의 힘을 억제하기까지 했으니……!
“전 멀쩡하답니다!”
분명 큰 부상을… 아니네.
도진은 정말로 멀쩡해 보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맥이 탁 풀렸다.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방해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 엘더인걸요!”
도진은 통증을 인내하며 몸을 뒤집었다.
그러자 카린이 보였다.
“야, 멀쩡하긴……!”
그런데 그녀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통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꼴을 하고도 도진이 무사한 게 마냥 좋은지 헤실헤실 웃는 카린.
“걱정 마세요. 이런 것쯤 금방 낫는답니다.”
카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했다.
그러자 정말 흐르던 피가 역행하며 상처가 아문다.
속도가 느려서 문제지.
도진은 자신도 포션으로 부상을 치료했다.
“중턱쯤에 처박힌 거 같은데.”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충 중턱쯤에 처박힌 거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죽어도 날로 먹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거지.’
수틀리면 카린을 치트키로 써먹으려 했던 도진이었다.
하지만 성역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카린의 능력은 억제당했고, 지금 도진이 있는 곳은 목적지까지 한참은 올라가야 하는 산 중턱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