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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62화 (16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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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앙 사람 만들기를 마치고도 며칠을 더 쉬었다.

충전은 이쯤하면 됐다 싶어서, 도진은 다음 목표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라고 해 봐야 특별할 건 없었다.

평소처럼 소모품과 각종 도구 등을 인벤토리에 챙기는 일이다.

다만 이번에는 그 양이 평소보다 훨씬 더 많았다.

‘거기선 보급이 쉽지 않을 테니까 많이 챙겨 둬야지.’

틈틈이 사서 모아 놓은 마법 스킬북도 챙겼다.

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친 뒤 도진이 향한 방향은 북쪽.

카린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 * *

중앙대륙 중부에서 북부까지 가는 길은 제국 영토는 물론이고 인간의 영역마저 벗어난 구간이 대부분이다.

아직 레벨 150도 못 넘긴 도진은 잘못 걸리면 일반 몬스터한테도 처참히 찢겨 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인물이 달리 고인물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레벨의 몬스터의 약점을 공략해 전투를 쉽게 이끌어 가는 거?

거기까지만 하면 적당히 고인 숙련자쯤 된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썩었다는 소리를 들을 때쯤에는 싸움을 피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서 몸 비틀면서 터득한 거지만.’

처참한 생존력에 더 처참한 전투 지속력을 지녔던 전생 시절에는 싸우면서 돌아다니면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퍼지는 게 일상이었다.

대륙 곳곳을 ‘비교적’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는 샛길과 중간에 쉴 수 있는 거점 등을 찾아내며 게임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살아남기 위해 몸 비틀어 가면서 찾아낸 루트들이 지금 이렇게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도움을 주고 있었다.

문제는 그 샛길이란 것들이 하나같이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 할 만큼 위험천만한 게 대부분이라는 거지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쾌적하다.’

지금도 도진은 절벽에 달라붙어 점프를 준비하고 있었다.

위도 아래도 까마득한 이곳은 몬스터들도 접근할 생각조차 안 하는 지랄맞은 곳이었다.

아래로는 음지에 사는 흉악한 절지동물들이, 위로는 와이번과 하피들이 서식하지만, 여기에는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놈들도 먹을 게 있어야 접근이나 하지.

아래로 100미터, 위로 100미터쯤 되는 절벽 딱 중간지점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접근하겠나.

“후우… 흡!”

심호흡을 한 뒤 몸을 날린 도진은 2미터쯤 떨어진 지점에 겨우 안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전생보단 쉬웠다.

레벨은 낮아도 그때보다 근력, 민첩도 높고, 체력 스탯 페널티를 발생시키는 저질 몸뚱이가 아닌 데다 「염동체술」도 있어서.

“윽, 진짜 뒤질 뻔했네.”

그렇다고 마냥 쉬운 건 당연히 아니었다.

실수 한 번이면 바로 자유낙하 이후 피떡이 될 상황에 놓여 있는 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몰리는 일이었다.

차갑고 거센 바람이 계속 불고 있음에도 식은땀이 뻘뻘 나는 건 그런 이유였다. 그래도 도진은 꿋꿋하게 절벽을 벌레처럼 기어서 중간에 뚫린 토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이제 낙사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토굴은 조금만 뚱뚱하거나 덩치가 큰 사람이면 통과하는 게 불가능할 만큼 비좁았다. 이제부터 여길 한참이나 기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온몸이 쑤시는 기분이다.

아니, 실제로 쑤시고 있는 거구나. 절벽에 몇 시간을 붙어 있었으니 몸이 멀쩡하면 이상한 일이지.

방금 전까지 고소 공포증과 싸워야 했다면, 이제부터는 폐소 공포증과 싸워야 하는 시간이었다.

가상현실이 이래서 힘들다. 그냥 모니터 보면서 하는 게임이면 이 시간도 그냥 지루한 이동에 불과할 텐데.

느끼는 바가 현실과 다를 게 없는 가상현실에서는 개고생을 내 몸으로 직접 해야 했다. 도진은 토굴을 기어가며 인생이라는 게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여기만 통과하면 당분간은 쉽게 갈 수 있어.’

길고 길었던 토굴 통과가 끝나고 나온 공간은 끈적끈적한 점액으로 뒤덮인 동굴이었다.

-그르르르르.

동굴 전체를 낮게 울리는 숨소리.

이 동굴의 주인이 내는 소리였다.

‘밖으로 나간 타이밍이길 바랐는데…….’

필드 보스 ‘라마코스의 뱀’이 내는 소리다.

도진은 조심조심 엄폐물 사이를 이동하며 출구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똬리를 틀고 자고 있는 거대한 뱀이 보였다.

저놈은 도진이 방금 지나온 루트를 발견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라마코스의 뱀에게 쫓기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들어갔던 작은 구멍이 방금 나온 토굴이었고, 살고 싶어서 기고 기다 보니 절벽 중간에 던져졌던 것.

‘저걸 잡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당장은 건드리는 즉시 저승길 확정이니 따돌려야겠다.’

자고 있다고 옆을 지나쳐서 가려 했다가는 바로 한입에 꿀꺽 당할 테니…….

《악령 소환》

미끼를 쓰자.

도진은 악령 하나를 소환해 동굴 깊숙한 곳으로 보냈다.

생물도 아니고, 소리도 안 나는 악령은 무사히 아주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쿵쿵쿵.

도진의 명에 따라 벽을 마구 두들기기 시작한 악령.

-쉬익.

라마코스의 뱀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쉬이익!

보금자리를 침범당했다 생각했는지 라마코스의 뱀은 신경질적으로 울며 동굴 안쪽으로 빠르게 기어갔다.

‘됐다!’

놈을 유인해 출구를 비우는 데 성공한 도진은 재빠르게 달렸다.

어차피 격하게 움직이면 놈의 진동 감지 능력에 걸릴 수밖에 없다.

‘아네모네!’

최고 속도로 동굴을 나오자마자 도진은 아네모네를 소환했다.

【진, 빨리 타!】

도진의 다급함을 인식한 아네모네는 등에 도진이 닿는 게 느껴지자마자 내달렸다.

달리는 둘을 위협하는 적은 주변에 없었다.

이 주변은 라마코스의 뱀의 영역.

근방에 살던 놈들은 라마코스의 뱀에게 먹혔거나 먹히기 싫어 도망간 탓에 주변은 텅텅 비어 있었다.

도진의 속도 계산은 완벽했다. 뒤늦게 뱀이 추적에 나섰으나 이미 벌려 놓은 거리 덕분에 무사히 따돌릴 수 있었다.

“아네모네, 그냥 앞만 보고 계속 달려!”

뱀의 영역을 벗어나자마자 나온 라마코스 늪지대.

달리는 아네모네를 감지한 ‘늪지 거머리’가 늪 아래에서 촉수처럼 튀어나왔다.

멈추면 잡혀서 늪 아래로 끌려가겠으나 놈들은 고정형 몬스터였다.

본체가 늪에 잠수한 상태라 빠르게 지나가면 공격 범위 밖으로 벗어날 수 있다.

【진! 너 왜 맨날 이런 데만 돌아다니는 거야! 좀 안전한 곳으로 다니면 안 돼?】

아네모네가 꽁지가 빠져라 달리면서 외쳤다.

원망보다는 걱정이 한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마치 매우 위험한 곳만 찾아다니는 악동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 같은 투였다.

“이 길이 제일 안전한 길이야!”

【그게 말이 돼?】

“당연히 말이 안 되지. 근데 말이 안 되는 게 이 세상이거든.”

【하아.】

웃음기 묻어나는 도진의 말에 아네모네도 한숨을 섞어 웃었다.

이렇게 위험한 곳을 뛰어다녀도 즐거운 게 신기해서.

“여기부턴 같이 가자. 천천히 구경하면서 갈 만한 동네거든.”

늪지대를 벗어나자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은 모래지대가 나왔다.

여긴 밤이 아니면 위험하지 않은 곳이다.

시간을 계산해 가며 이동했기에 도진은 마지막 난관도 리스크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기어코 대륙 최북단까지 올라온 도진은 숨어서 밤을 기다렸다.

* * *

밤이 되기만을 기다리던 카린은 지상으로 올라갔다.

가끔 낮에도 올라가긴 하지만, 이젠 자주 그러진 않았다.

도진과 달이 뜬 날 설원을 본 이후 태양보다는 달이 좋아진 카린이었다.

“아버님, 다녀올게요!”

허공을 향해 말한 카린은 즐겁게 지상으로 날아갔다.

그런 뒤 하늘에 뜬 대륙 끝자락에 걸터앉았다.

“흐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저 멀리 중앙대륙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아주 먼 곳에 있는 산봉우리도 잘 보였다.

한참 바다와 바다 건너 있는 중앙대륙을 바라보던 카린은 책을 꺼내들었다.

어렵사리 찾아낸 책으로, 자신이 아직 읽지 않은 몇 안 되는 소설이었다.

‘결말이 너무 기대가 돼요!’

흔한 용사물이지만, 카린은 재미있게 소설을 읽는 중이었다.

몇 페이지 남지 않은 분량에, 카린은 아껴 가며 소설책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왜 용사님이 죽는 결말인가요!”

허공에 작가라도 있는 것처럼 주먹질을 한 카린은 입을 오리처럼 내밀었다.

“이런 결말, 인정 못 한답니다!”

용사가 죽으면 고향 마을에서 기다리는 연인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인상을 찌푸린 카린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소설의 결말부가 적힌 페이지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엘더의 피를 잉크로 써서 페이지를 적셔 버린 것이었다.

그런 뒤 카린은 결말을 새롭게 써 내려갔다.

「용사는 죽지 않고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왔답니다. 그곳에는 용사를 기다리는 연인과 친구, 가족이 있었어요. 그리고 용사는 그들과 함께 행복하게 남은 인생을 보냈답니다. 그는 행복했어요. 단 한순간의 불행도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답니다.」

자신이 쓴 글귀를 다시 읽은 카린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 작가님께 이 결말을 인정받고 싶지만, 이미 돌아가셨겠죠. 아쉬운 일이에요. 그래도 분명 정중히 부탁드리면 이걸 진짜 결말로 인정해 주셨을 거예요!”

엘더급 뱀파이어가 피로 물든 책을 내밀고 결말을 바꿔 달라고 하면 인정 안 할 작가는 드물 테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책을 다 읽어 버려서 할 게 사라진 카린은 다시 중앙대륙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기 어딘가에 그가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젠가 다시 오겠다 말했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걱정은 없었다. 자신은 흡혈귀이니까 아주 오래 기다릴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예전과 달리 하루가 너무 길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멍하니 있다가 ‘하루가 지났나?’ 하면 한 달이 흘러 있고, ‘한 달쯤 지났겠지’ 하면 1년이 지나 있고 그랬는데…….

‘요즘은 하루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져요.’

기다리는 사람이 생기니 시간감각이 달라졌다.

흐르는 1분 1초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루는 길어졌고, 가끔 뛰지 않는 심장 부근이 저릿하기도 했다.

이게 그가 말했던 사람의 마음인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 또 그때가 떠올라서…….

“어?”

멍하니 허공을 보던 카린이 벌떡 일어났다.

방금 분명 뭔가 반짝였다.

별빛과 달빛을 해수면이 반사한 것도 아니다.

순간 예전에 성에서 도진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네 시력이면 네 방 창문으로 중앙대륙도 볼 수 있지?」

「네! 거꾸로 보이긴 하지만 보인답니다!」

「그럼 여기 올 일 있으면 거기서 신호를 보내면 되겠다. 나 혼자서는 바다를 건너서 여길 올 방법이 아직 없거든.」

「앗! 제가 놓칠 수도…….」

「괜찮아. 시간을 정하면 되지. 네가 깜빡해도… 우연히 볼 때까지 신호를 보내면 그만이고.」

엘더의 눈이 아니면 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고 어두운 밝기의 빛.

하지만 카린에게는 그 어떤 빛보다 밝게 느껴지는 빛이었다.

그다. 그가 돌아왔다.

카린은 피로 만들어져 한없이 붉은 날개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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