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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디테일하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물이 차오른다는데 무슨 생각을 한단 말인가.
이제부터 시간이 곧 목숨이고 시간을 낭비하는 건 열심히 죽음을 향해 달리는 짓거리였다.
살기 위해선 물리적으로 뛰어야 한다는 소리다.
“달려요!”
비단 도진의 외침 때문이 아니라, 파티원들은 상황이 뭐 됐음을 인지하고는 자발적으로 뛰었다.
천천히 내려가던 계단을 거의 구르다시피 내려간 도진 파티를 반긴 건 세련된 디자인의 골렘이었다.
경장 갑옷 같은 외골격은 세분화된 파츠로 분리되어 있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관절 가동성을 보였다.
그것들은 거북한 금속음이 뒤섞인 목소리로 ‘침입자다! 침입자가 여기까지 내려왔어!’ 하고 소리쳤다.
“꺼져! 지금 바빠!”
도진은 멈추지 않고 골렘 무리로 뛰어들었다.
「염동체술」을 활용한 근접 마법 박투로 최소한의 적을 처치하며 길을 만든다.
“비켜, 비켜, 비켜!”
테레사도 방패를 앞세운 돌격에 이어 망치로 골렘들의 무릎이며 정강이를 마구잡이로 두들겼다.
탄토는 단검과 도끼를 화려하게 휘두르며 외골격에 보호받지 않는 관절 등을 자르고 찌르고 찍었다.
소소는 그들 뒤를 열심히 따라갔다. 평소와 달리 그녀의 걸음걸음에는 다급함이 잔뜩 묻어나왔다.
‘다른 사인도 아니고 익사라니……!’
소소는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깊이의 물이 싫었다.
원래도 싫었지만, 예전에 도진 때문에 라브르 호수 밑바닥 구경을 한 뒤로는 더 싫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 때문에 싫다고 하는 거지 사실 무서웠다.
‘익사는 안 돼!’
어디서 물이 들어오고 있는 건지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벌써부터 바닥에 찰박찰박 얕게 물이 고이고 있었다.
워낙 넓은 던전이라 물이 가득 차려면 시간이 좀 걸리기야 하겠지만, 그건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뛸 때마다 얕은 물웅덩이 차는 소리가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 더 무섭게 도진 일행을 압박해 왔다.
계속해서 달려드는 가지각색의 형태를 한 골렘들을 때리고 부수고 도망치던 도진 일행 앞에 굳게 닫힌 문이 나왔다.
“저기, 저 아래에 뭐가 있을 거 같습니다!”
탄토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좁은 틈에 계단 같은 게 있는데, 그 안쪽으로 기계 장치 비슷한 것들이 보였다.
문제는 아래쪽으로 파여 있는 위치라 물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제가 들어가 볼게요!”
그러나 탄토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탄토가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어어! 골렘들이!”
젠장, 탄토 씨가 살펴보는 동안 저것들이나 정리해야겠군.
상대할 시간이 아까워 달고 다니다 보니 꼬리가 너무 길고 두꺼워졌다.
도진은 큼직한 불덩이를 날리며 골렘들을 맞이했다.
전투가 얼마나 지속됐을까.
쿠그그긍.
굳건히 파티를 막아서고 있던 문이 열렸다.
탄토가 해 낸 것이다!
“됐어!”
테레사가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도진도 안도했다.
한데, 10초가 넘게 흘러도 탄토가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저 안쪽 깊이가 깊은 건가?’
조금 더 싸웠다. 문이 열린 지 30초가 넘게 흘렀다. 그러다 1분을 채웠다.
뭔가 잘못됐다.
“아네모네, 잠깐만 내 대신에 버텨 줘!”
적들과 상성이 좋지 않아 소환을 지양했던 아네모네까지 동원해서 시간을 번 도진은 탄토가 들어간 곳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이런 시발!”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하자마자 욕을 했다.
“탄토 씨!”
탄토가 들어간 구멍이 폐쇄된 것이었다.
안쪽에서 장치를 작동하면 발동되는 함정인지 뭔지는 몰라도, 투명한 강화 유리 같은 것으로 구멍이 막혀 있었다.
투명한 벽에 저편에 호흡을 참고 있는 탄토가 보였다.
퍼어엉-!
도진은 다급한 마음에 마법을 난사했으나 애꿎은 물기둥만 펑펑 터질 뿐 유리벽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밖에서 뭔가를 찾아야 하는 건가?
생각하며 돌아보는데, 눈에 띄는 무언가가 없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빌어먹을 골렘 새끼들과 그것들에게 고전하는 파티원들의 모습뿐.
그때.
유리벽 안쪽에서 탄토가 어떤 제스처를 취했다.
자긴 버리고 가라는 제스처였다.
[탄토: 먼저 가세요.]
파티 메시지도 왔다.
[도진: 개소리 말고 나올 궁리나 해요.]
도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탄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 삼킨다.
[탄토: 방금 삼킨 건 도핑용 독단입니다. 익사하느니 깔끔하게 가는 저한테도 낫겠죠. 그래도 파티에 도움이 된 거 같아 억울하진 않네요. 재밌었습니다.]
탄토가 남은 숨을 뱉어 냈다.
“…아주 가라고 등을 떠밀다 못해 칼로 찌르네.”
도진은 돌아섰다.
탄토가 죽는 모습까지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안일했어.’
좀 더 신중했다면 이런 일이 애초에 벌어지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분명 저 유리벽을 여는 방법도 있을 거다.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지.
다 방법은 있고, 길도 있다.
그걸 못 찾으면 죽게 되는 거고.
도진은 살아남은 둘을 이끌고 탄토가 열어 준 길을 따라 던전을 진행했다.
테레사는 탄토가 게임 오버됐다는 소식에 눈에 띄게 침울해졌고, 소소는 현실로 다가온 익사 앞에서 겁에 질렸다.
그래도 다행히 길은 제대로 들었는지 주변의 장식물이나 앞을 가로막는 골렘이 점점 더 웅장해졌다.
골렘과 병장기를 제조하는 공장 같은 구역도 나왔다. 적들의 저항이 가장 격렬했던 그곳을 지나자 도진 일행을 보스 몬스터가 반겼다.
커다란 모루에 걸터앉은, 전형적인 대장장이를 연상케 하는 우람한 체격으로 만들어진 골렘이었다.
[히든 던전 <신의 모루>의 보스 몬스터 ‘영원의 대장장이 켈루온’이 눈을 떴습니다.]
짧은 시간에 꽉꽉 담긴 고생을 들이마시며 이곳에 도달한 도진은 자신을 응시하는 켈루온의 안광을 보며 연초에 불을 붙였다.
“…빌어먹을 새끼들. 좀 고상하고 여유 있게 살게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마법으로 피우는 불은 습기를 무시하고 마법사용 연초를 태웠다. 날뛰던 마법회로가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켈루온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모루 옆에 기대 세워져 있는 손잡이가 짧은 망치를 들어 올린다.
“이곳은 스스로 신께 바칠 검이 될 자들의 신전이다. 너희 같은 자들이 더러운 발자국을 남길 곳이 아니다.”
도진은 타다 만 마법사용 연초를 바닥에 버렸다. 물과 만난 불씨가 힘을 잃고 꺼져 가는 걸 보며 도진은 생각했다.
‘그런 설정놀음은 난 모르겠고.’
뭐가 됐든 빨리 끝내자. 기분 안 좋다.
* * *
[세실리아 님, 구독 중인 ‘도진’ 채널에 새로운 영상이 업로드되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뜬 알림.
[히든 던전 <신의 모루> 공략]
영상을 확인하니 히든 던전 공략 영상이었다.
“…벌써 깨 버린 거야?”
어이가 없네.
여자는 스마트폰을 휙 소파 위로 집어던졌다.
“샤워부터 하려고 했는데.”
투덜대며 캡슐이 있는 방으로 걸어간다.
걸음마다 옷가지를 대충 벗어대던 여자는 캡슐 앞에서 잠옷을 걸친 뒤 캡슐에 누웠다.
“하아……! 역시 좋아.”
피로에 찌든 현실의 몸에서, 싱싱한 가상현실의 ‘세실리아’로 갈아탄 여자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세실리아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왜 조용히 하고 있어? 그 사람, 내가 전달한 지도로 히든 던전 깼잖아.”
이에, 그녀에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답했다.
【…지금 막 하려던 참이다. 그래, 그자가 위험한 대장장이의 작업을 훼방 놓는 데 성공한 모양이더구나.】
“말투가 또 바뀌었네. 또 담당 바뀐 거야?”
【…그건 중요치 않다. 그런데, 어떻게 그자와 접촉하지도 않고 지도를 전달한 거지?】
“다 방법이 있지요.”
세실리아는 도진에게 <신의 모루> 지도를 후원한 장본인이었다.
다만 본인의 의지로 한 건 아니었다.
지금 대화에서 알 수 있듯 도진에게 지도가 전달되기를 바란 건 세실리아의 계약 상대였다.
‘상대’라기보다는 ‘집단’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거 같지만.
“어쨌든 난 제대로 전달했고, 그 사람이 던전도 제대로 클리어했으니까 퀘스트는 성공한 거지?”
【그래. 잘해 주었다.】
무뚝뚝한 대답과 함께 히든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세실리아 앞에 떴다. 정체되어 있던 그녀의 레벨이 확 하고 올라갔다.
오른 레벨을 확인하며 세실리아가 물었다.
“그런데 도진 그 사람한테 지도를 주라고 한 거야?”
【운명을 바꿀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보이는 자이기 때문이다.】
“섭섭해, 섭섭해. 계약자니 뭐니 하면서 막 빛나고 그럴 땐 내가 용사라도 되나 했단 말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너는 운명을 바꾸기 위한 말이 아니다. 뒷수습을 위한 비상용 말이지.】
“…쳇. 정체도 들키면 안 된다면서 조심하라고 하고. 뒷수습인지 뭔지는 하라고 한 적도 없으면서.”
【재앙이 크기를 키우기 전에 그자가 막아 냈으니까. 우리로선 기대할 생각조차 못 했던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지.】
히든 클래스 「계약자」가 됐을 때만 해도 엄청 설렜던 세실리아였다.
텔레파시 같은 걸로 정체불명의 인격들이 말도 걸어오고, 그들이 시키는 퀘스트만 해도 최상위권 레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이 게임의 주인공이라도 된 건 줄 알았더니… 현실은 용사 육성 시뮬레이터 잡일꾼 비슷한 위치였다.
‘하긴. 며칠에 한 번씩 접속하는 나 같은 사람보다는 그 사람이 더 어울리긴 하지.’
정말 게임에 목숨 건 거 같던데.
심지어 괴물처럼 잘하기까지 하는 거 같고.
세실리아는 괜히 재능충이랑 경쟁 말고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열심히 줍기로 했다.
“뭐 더 시킬 건 없고?”
【지금은 없다. 이번 개입으로 당분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사라졌다.】
그럼 할 일 생길 때까지는 여유롭게 여행도 하고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면 되겠다.
‘그 전에 일단 영상 좀 보고.’
퀘스트 보상 때문에 바로 접속하긴 했지만, 그 던전이 어떤 곳인지, 도진이 어떻게 던전을 공략했는지 등이 궁금했다.
‘사람들은 또 난리가 났겠네.’
대화 상대에게 별다른 통보도 없이 뚝 접속을 종료한 세실리아는 캡슐에서 나와 영상 시청 준비를 했다.
냉장고에서 꺼낸 치킨을 데우고, 시원만 맥주를 준비한 뒤 유튜브 채널에 접속했다. 영상을 재생하기 전에 일단 스크롤을 내려 댓글 반응부터 확인했다.
-솔직히 이젠 할 말도 딱히 안 떠오른다. 그냥 이쯤 되면 진한테 침략당한 던전 몬스터가 불쌍해질 지경이다.
-몬스터들은 할 수 있는 걸 모두 했다. 다만 그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을 뿐이다.
-내가 로스타니아의 몬스터였다면 머리맡에 샷건을 두고 잠들었을 거야. 언제 그가 올지 모르니 말이야. 물론 그걸로 충분하다는 확신은 들지 않겠지만.
난리법석을 떠는 댓글을 보고 기대감이 더 올라간 세실리아는 맥주를 홀짝이며 영상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