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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급반전됐다.
네임드부터 쫄까지 모든 어그로가 탱커에게 쏠리니 전투가 순식간에 안정된 것이다.
방금 전까지 힐러 하나 살려 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도진은 어이가 없었다.
【죽기 전에 어디 다시 한번 말해 봐!】
눈이 돌아가서 테레사를 미친 듯이 공격하는 단죄의 무녀와 무녀가 소환하고 살린 유령들.
테레사는 그런 무녀를 상대로 벽을 등지고 서서 ‘돼지! 돼지! 돼지!’ 하며 탱킹을 하고 있었다.
‘말로 도발하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탱커 도발 스킬까지 씹힐 정도로 어그로가 강하게 작용한다니…….’
보고 있으려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걸 기믹이라고 하는 게 맞긴 하는 건지.
어쨌든 위기를 흘렸으니 됐다.
「초월」을 여기서 쓰게 된 게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나.
‘이왕 켰으니 꺼지기 전에 마무리나 지어야지.’
도진은 가혹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마법회로를 혹사시켰다.
분노에 눈이 멀어 마법사에게 등을 보인 단죄의 무녀는 쏟아지는 마법에 당황했다.
【아악-! 이, 이 무례한……! 숙녀에게 이 무슨 짓이… 아악!】
숙녀는 무슨.
도진은 무녀가 하는 말을 폭음으로 덮어 버렸다.
무녀의 머릿속에서 분노가 증발하고, 그 자리를 생존본능이 대체했다.
【뭣들 하는 거야! 저 무례한 녀석을 당장 죽여!】
몹들의 어그로 대상이 도진으로 바뀌었다.
‘애초에 어그로 관리가 거의 불가능한 네임드네.’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됐다.
도진은 본체인 무녀에게 극딜을 꽂았고, 무녀는 꼼짝도 못 하고 부하들만 닦달했다.
그러나 부하들은 탄토와 테레사의 방해로 무녀의 명을 제때 수행하지 못했다.
결과는.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이리 허망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아, 신이시여!】
당연히 네임드의 죽음이었다.
도진도 멀쩡하진 않았으나 「초월」의 여파는 「한정회귀」로 말끔히 지울 수 있었다.
“후아, 죽는 줄 알았네!”
분노한 무녀의 맹공을 버텨 내느라 진땀을 뺀 테레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소소를 노려봤다.
‘하여간 어릴 때부터 저 입이 문제야.’
모양만 예쁘게 생겨먹었지. 완전 악마의 조동아리가 따로 없다.
말 한마디로 이 사달을 만들다니.
‘에휴, 어쩌겠어.’
테레사는 이미 소소의 사회성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사실 이번 일은 사회성 운운할 게 없는 일이기도 했고.
몬스터 상대로 역겹다 한마디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거 자체가 사고지.
모르겠다. 쉴 수 있을 때 1초라도 더 숨이나 돌리자. 재벌집 따님이 사회성 좀 없으실 수도 있지.
그리 생각하며 방패에 턱을 괴고 숨을 돌리는 테레사.
“미안.”
그런데 그때 믿기 힘든 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소소 목소리로 ‘미안’이라는 말이 들린 것이다.
세로로 세운 방패 위에 걸쳐 둔 머리통을 획 하고 꺾어 소소를 보는 테레사.
“너 김소소 아니지! 겨우 이런 걸로 나한테 사과하는 게 김소소일 리 없어!”
“뭐라는 거야. 너한테 한 거 아니야.”
소소는 그리 말하며 도진을 봤다.
“상처는 없어졌네.”
“아, 그거요?”
도진은 자신의 오른팔을 쓸었다.
아까 소소를 끌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막바지쯤이었나.
공격에 스치는 바람에 조금 다쳤었다.
지금은 「시간 여행자」 특성 덕에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괜찮아요. 사고가 날 뻔하긴 했어도 결과적으로 잘됐으니까. 따지고 보면 누나 덕분에 저 기분 나쁘게 생긴 네임드가 가진 히든 기믹을 찾은 셈이기도 하고.”
이미 죽어 버려서 알 수 없게 됐지만, 아마 단죄의 무녀는 어그로 관리가 불가능한 몬스터였을 거라는 게 도진의 생각이었다.
다수의 유령을 되살리고 소환하면서 그것들이 불규칙하게 이 사람 저 사람 마구잡이로 공격을 하는 패턴을 보였겠지.
위험하긴 그쪽이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도진은 그런 의미로 괜찮다 했고, 소소도 더 이상 별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뚱하다 싶을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절망적인 수준인 소소의 사회성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기미가 보이는 장면인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닌 듯한 기분이…….
‘어?’
순간 테레사는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뭔지 깨달았다.
‘소소 쟤 언제부터 반말을……?’
사실 소소는 도진이 자연스럽게 ‘누나’라는 호칭을 쓰고부터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워낙 말수가 적고, 테레사가 둔해서 지나쳤을 뿐.
어쨌든 소소와 도진의 거리감이 확 줄어든 걸 알게 된 테레사는 기분이 묘했다.
사교성에서 김소소에게 밀렸다고 생각하니 절망적이라고 해야 하나.
‘난 아직도 어색한데…….’
테레사는 쭈글거리는 눈으로 도진을 힐끗 바라봤다.
던전 진행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좋아. 나도 이제 편하게 하는 거야.’
김소소도 하는데 내가 못할 수야 없지.
그때 방향을 정한 도진이 말했다.
“일단 움직이죠.”
테레사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네!”
음, 말 편하게 하는 건 좀 나중에 해야겠다.
테레사는 자신의 쫄보력을 빠르게 인정했다.
* * *
단죄의 무녀를 처치한 후로 몬스터 무리를 소탕하며 던전을 헤매다 보니 새로운 네임드 몬스터가 나타났다.
돌아다니며 적극적으로 플레이어를 사냥하는 로밍형 네임드 몬스터였던 단죄의 무녀와는 아예 반대되는 놈이었다.
【여긴 못 지나간다!】
아예 벽에 박혀 있는 고정형 네임드였다.
【선을 넘지 마라. 나는 지키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는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네임드의 이름은 ‘절망의 벽’.
벽과 통로 자체가 몬스터인 놈이었다.
영역에 발을 들이면 바로 상하좌우는 물론 위아래에서도 강철 병사가 솟아나 창과 검을 휘두르고 화살을 쏴 댔다.
문제는 놈의 본체로 보이는 커다란 보석이 마법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통로 끝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탄토의 은신도 소용없었다. 은신이 얼마나 은밀하든지 간에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위치가 들통나 버렸다.
‘특별히 다른 공략 방법이 있거나 다른 길이 있을 수도 있긴 하지만…….’
도진은 굳이 물러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레사 누나, 여기서 쓰죠.”
이 파티엔 아직 쓰지 않은 카드가 많이 있었다.
테레사의 「청금석 방벽」이 지닌 「수호영역」처럼 말이다.
“…후우. 드디어 써먹는구나.”
「수호영역」의 쿨타임도 24시간이었기에 테레사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걸 아끼고 아꼈다.
테레사는 비장한 얼굴로 방패를 어루만졌다.
아쉽다. 이 멋진 장면을 방송으로 시청자들한테 자랑하지 못하다니.
“소소 누나는 여기 있어요. 방패 스킬 유지되는 시간 안에 저기 도착하려면 빨리 뛰어야 하는데 누난 발이 느리니까.”
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파티원들에게 버프를 돌렸다.
“먼저 뛰어 들어가고,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발동하고, 앞만 보고 달려요. 최대 속도로.”
“좋아요. 그럼 정말 믿고 뜁니다?”
방패를 꽉 잡은 테레사는 전신에 힘을 모았다가 한 번에 터뜨리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수호영역》
그리고 도진 말대로 적의 공격이 닿기 전 「청금석 방벽」의 고유 스킬을 발동했다.
지금까지 적의 공격을 흡수해 충전해 두었던 힘이 푸른색 방어막을 형성했다.
아름다운 보석처럼 각인 방어막은 들어오는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내고, 또한 반사하는 하나의 결계가 되었다.
“으아아아아!”
테레사는 방패를 앞세워 전속력으로 달렸다.
전사의 돌진은 꽤나 속도가 빠르다.
하지만 파티원이 잘 따라올 수 있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도진이나 탄토나 전사보다는 빨랐다.
동레벨을 상대로는 거의 완전히 무적 상태를 만들어 준다고 보면 되는 「수호영역」의 자연 소멸까지 걸리는 시간은 10초.
그 10초 동안 세 사람이 좁힌 거리는 150미터를 훌쩍 넘겼다.
“이제 꺼져요……!”
그럼에도 거리가 좀 부족했다.
“이거면 충분해요!”
방어막이 사라지는 타이밍에 맞춰, 도진이 준비했던 마법을 발사했다.
뇌전이 번쩍 하고 쏘아졌다.
전격계 마법은 거리에 따른 위력 감소가 심한 편이지만, 유효 사정거리 안에서의 속도와 위력은 발군이었다.
남은 거리를 빛의 속도로 쪼갠 푸르게 점멸하는 창이 보석 모양을 한 네임드의 심장에 꽂혔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통로 전체에서 울렸다.
그러나 절망의 벽은 죽지 않았다.
방어막이 사라진 도진과 테레사를 노리고 발작에 가까운 총공세를 펼치는 절망의 벽.
하지만 그 공격은 일시에 덜컥- 하고 허공에 멈췄다.
어느새 남은 거리마저 주파한 탄토가 도끼와 단검으로 심장을 공격한 것이다.
짧은 시간이라도 준비라는 게 필요한 도진과 달리 그런 게 전혀 필요 없는 입장인 탄토는 스탭을 밟으며 심장을 난도질했다.
이어서 도진의 마법 공격까지 연속으로 꽂히기 시작하니 통로 전체가 덜컹덜컹 경련을 하다가, 보석이 터져 나감과 동시에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이게 템빨이고, 이게 날먹이고, 이게 팀워크지!’
펑 터지는 보석 파편을 보며 도진은 속이 뻥 뚫리는 거 같았다.
시키면 시키는 거 딱딱 잘하고, 시키지 않은 것도 알아서 센스 있게 잘하고.
실력빨에 유물빨까지 더해지니 분명 어려운 난이도의 던전이고 골치 아픈 형태의 네임드도 날먹하는 거처럼 처리가 가능했다.
“테레사 님 방패 성능이 엄청나네요. 제 건 옵션이 패시브라 효과가 그렇게 극적이진 않은데.”
“그죠? 그죠? 우리 방벽이가 진짜 대단하다니까요.”
탄토가 감탄을 하자 테레사가 자식 칭찬받은 엄마 같은 표정으로 뿌듯해했다.
“아래로 더 내려가야 하는 거 같네요. 길이 또 아래로 뚫린 걸 보니. 일단은 내려가서 눈치 좀 보고, 본격적인 공략은 저랑 레사 누나 쿨 돌린 다음에 하는 걸로 하죠.”
가진 건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법.
안전 공략을 위해 도진은 사기 능력을 쓸 수 있을 때까지 몸을 사리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던전의 더 깊은 곳을 향해 내려갔다.
그런데.
쿠그그긍- 쿠웅.
저 위쪽에서 무언가 불길한 소리가 났다.
마치 아주 육중한 문이 닫히는 듯한 소리였다.
그리고 이어서.
쏴아아아-
어디선가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모루>가 물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불길한 소리가 한 줄로 정리됐다.
“이건 또 뭔 개 같은 소리야!”
쿨타임을 기다려서 날로 먹어 보겠다는 도진의 계획을 비웃듯 <신의 모루>는 침입자들의 익사를 향한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