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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는 꼭두새벽부터 눈을 떴다.
“김소소, 일어나! 우리 늦었어! 빨리, 빨리!”
같이 사는 친구를 닦달해 깨우는 테레사.
“…죽여 버린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뜬 소소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살벌하게 읊조렸다.
새벽 5시.
도진과 약속된 시간은 현실 시(時)로 오전 9시.
아직 4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어제부터 소풍을 앞둔 유치원생인 양 호들갑을 떨고 설렘에 빠져 익사할 거같이 굴더니…….
“아아아아아! 소소야, 빨리, 빨리이!
소소가 뭐라고 하든 테레사는 소소를 흔들었다.
친구의 손길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소소는 고민했다.
‘…이번에 가는 데가 바다에 있다고 했었지.’
이 원수를 정말 바다에 담가 버릴까 하는 고민이었다.
* * *
소소는 극적 타협을 통해 2시간의 추가 수면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협상 수단은 진심을 가득 담은 등짝 스매싱 3대.
덕분에 테레사는 가상현실에 접속한 지금도 등짝이 얼얼했다.
어쨌든 이런저런 준비 시간을 제하고 1시간은 일찍 접속할 수 있었다.
테레사 입장에서는 만족스런 결과였다.
‘1시간 정도 일찍 나오려면 적어도 4시간 전부터 난리를 피워야 겨우 움직이는 애니까.’
테레사는 잠을 설쳐 뾰로통한 소소를 이끌고 선착장을 걸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바다와 배들을 구경하면서 걸으니 금방 도진이 알려 준 선착장 번호가 나왔다.
‘32번 선착장이랬지.’
그럼 여기서 기다리면 되나? 하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제대로 연결된 거 맞죠?”
익숙한 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배들 사이에서 선원들과 함께 있는 도진의 모습이 보였다.
“어?”
도진도 테레사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돌아봤다.
“두 분 다 일찍 나왔네요?”
여상한 모습으로 인사하는 도진.
“도진 씨도 약속 시간보다… 아.”
테레사는 하던 말을 삼켰다.
굳이 이유를 물을 것도 없었다.
미리 나와서 출발할 준비를 서두르는 게 눈앞에 딱 보이는데 일찍 나온 이유를 물어 뭐 하나.
“미리 준비할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 저희도 도왔을 텐데요.”
“별거 없어요. 그냥 출발 전에 잠깐 둘러보는 거예요.”
“저게 이번에 탈 배예요?”
테레사가 큰 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도진이 고개를 젓는다.
“저건 우릴 안내해 줄 배고. 우리 배는 저기 저 배 뒤에 묶여 있는 거요.”
도진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테레사 눈에 훨씬 작은 배가 들어왔다.
작긴 해도 엄청 튼튼해 보였다.
거기다.
“배가 떠 있어?”
당연히 배니까 떠 있는 게 맞다.
어디까지나 물에.
하지만 도진이 구한 배는 무려 공중에 떠 있었다.
“돈 좀 썼죠. 부유, 인식 저해는 물론 밑바닥에 보강 마법까지 걸려 있는 배예요.”
도진의 설명에 멀찍이서 신경을 끄고 있던 소소도 슬쩍 와서 배를 구경했다.
공중에 뜬 배는 소소에게도 생소하며 신기한 것이었다.
“오오……!”
테레사는 아예 바다에 빠질 기세로 배를 구경했다.
그러는 사이 배불뚝이 중년 남자가 도진에게 다가왔다.
배만 나왔을 뿐 구릿빛 팔뚝을 가득 채운 근육이 인상적인 남자는 도진이 고용한 예인선의 선장이었다.
“고용주 양반, 연결은 다 마무리됐소. 출발은 2시간 뒤에 할 테니, 그때까지 다 당신들 배에 타 있으면 되오.”
“2시간 뒤.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되면 우린 바로 출발할 거요. 계약된 시간에 맞춰 목적지에 짐을 내려주려면 출발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하거든. 끌고 가다 안개 해역이 보이는 지점에서 견인줄을 끊을 테니, 그때부터는 알아서 하시오.”
“거기까지만 해 주시면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장은 뒤쪽에서 배를 구경하는 테레사와 소소를 보더니 끄응 하는 신음을 흘렸다.
“일행이오?”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미치겠군. 다시 생각해 볼 생각 없소? 당신만 거기 던져 두는 것만으로도 며칠은 꿈자리가 사나울 텐데. 저런 여자애들까지……. 젠장, 도대체 뭘 하겠다고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그만둘 생각 없소? 돈은 다 돌려줄 테니 말이오.”
“걱정 마세요. 다시 두 발로 육지를 밟을 자신은 있으니까요.”
“…바다는 땅이랑 전혀 다르오. 땅에서나 마법사고 기사고 성직자지. 바다 위에선 다 같은 한낱 인간일 뿐이지. 당신이 가겠다는 안개로 가득한 바다는 특히 위험한 바다고.”
베이먼이라 했던가.
도진은 자신이 고용한 안내인이 꽤나 선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돈만 챙기면 그만인 일을 이렇게까지 만류해 주는 것만 봐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하지만 그에게는 미안하게도 도진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후우, 그러시겠지. 제기랄. 어쨌든 죽어도 가겠다니 데려다주긴 하겠소. 하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최대한 빨리 뱃머리를 돌리시오. 그리고 살아 돌아오면 날 만난 술집 주인장에게 생존 신고 정도는 해 주고. 직접 얼굴은 못 봐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도는 알아야 찜찜함이 덜하거든.”
“그렇게 하죠.”
도진은 선장과 악수를 나눴다.
그런 뒤 테레사와 소소 둘을 데리고 근처 식당에서 배를 불린 뒤 배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
그러자 가면을 쓰고 그늘진 곳에 서 있는 탄토가 보였다.
‘저 인간은 왜 저러고 있어.’
가면, 그늘, 어둡고 펑퍼짐한 흑색 의복이 어우러지니 마치 음지에 핀 곰팡이나 버섯쯤으로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도진 일행을 발견한 곰팡이, 아니 탄토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밝기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 테레사가 쪼르르 달려가 인사를 받았다.
월드 보스 레이드 때 같이 고생한 사이라 보이지 않는 유대감이라도 쌓인 걸지도.
대충 인사를 나눈 도진 일행은 배에 탑승했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예인선 역할을 맡은 상선이 출항했고, 자연히 도진 일행의 배도 상선에 이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할 정도로 안정적이네요. 배니까 좀 출렁거릴 거라 생각했는데.”
테레사는 공중에 떠서 움직이는 배의 탑승감에 감탄했다.
소소는 어느새 고개를 배 밖으로 내밀고 햇빛을 난반사하는 바닷물을 보고 있었다.
탄토는… 테이블 위에 단검과 각종 독병을 꺼내 놓고 그걸 노려보고 있다.
도진은 딱히 할 게 없어 수평선만 바라봤다.
가끔 육지 쪽을 보면 착실하게 거리가 멀어지는 게 보였다.
무난한 항해가 6시간 넘게 이어졌다.
그러다 저 멀리 안개로 자욱한 해역이 눈에 들어올 때쯤 예인선 역할을 하던 상선이 줄을 끊었다.
베이먼 선장의 배는 안개 해역과 멀어지는 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제 우리끼리 가야겠네요.”
도진은 눈에 보이는 안개 해역 쪽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배를 몰았다.
안개 해역은 멀리서 보면 구름이 밑으로 자리를 옮긴 거처럼 보였다.
그만큼 안개가 짙다는 소리다.
마석을 연료로 삼는 마력 추진 선박은 오히려 범선에 끌려갈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순식간에 안개 해역의 경계를 넘었다.
순식간에 제한되는 시야.
한 치 앞도 보기 힘들게 제약되는 시계는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저기… 이런 데서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을까요?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테레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걱정 마요. 우리가 찾아가는 게 아니라 지도가 우릴 그곳으로 인도할 겁니다.”
도진은 인벤토리에서 지도를 꺼냈다.
우웅, 우웅, 우웅.
안개 해역에 들어서자 지도는 일정한 주기로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그때 거대한 마력원들이 도진의 눈에 들어왔다.
수면 아래에서 배로 접근하는, 엄청난 크기의 바다 생물들이었다.
‘저런 놈들한테 걸리면 바로 난파선 되고 익사체가 되는 거지만…….’
괜찮을 거다. 이 지도가 있는 한 저놈들이 습격할 일은 없을 테니.
그래도 눈에 보이는 마력원이 워낙 거대하니 간담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도 못한 거 같지만.
그렇게 거대한 괴물들이 수면 아래에서 가까워지다 돌아가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하는 사이 도진 일행의 배는 안개 해역의 아주 깊숙한 곳까지 도달했다.
“어……? 지금 뭔가 이상한 기분 안 들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끈적한 장막을 통과하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저도 느껴졌어요.”
“…기분 나빠.”
“결계를 통과한 겁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요.”
말하며, 도진이 전방을 가리켰다.
허억, 하는 놀라는 소리가 일행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할 안개 너머로 어떤 거대한 실루엣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도착한 거 같네요.”
도진은 거대한 실루엣을 향해 배를 몰았다.
안개로 가득한 바다 위에 나타난 것의 정체는 강철로 만들어진 성이었다.
아니, 성보다는 강철 구조물? 아니면 섬?
전체적인 모양새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안개가 짙어서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그것이 대단한 위압감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배를 세울 곳부터 찾아보죠.”
도진은 배를 몰아 강철섬 <신의 모루> 주변을 돌며 배를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다 배를 세우기 적당한 움푹 들어간 곳을 발견했다. 배를 정박하고 두꺼운 홋줄로 강철섬에 배를 묶어 고정했다.
“그 던전이 여기 어디에 있다는 거죠? 던전 입구 찾는 거도 장난 아니겠는데…….”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도진이 지도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더 강하게 자주 울리는 마력 반응.
표시한 지점.
즉, 던전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더 강하게 반응하는 듯싶었다.
“아직 던전 안은 아니지만, 일단 위험할 수도 있으니 경계 확실히 하면서 움직이죠.”
“네.”
테레사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천천히 전진하는 파티.
지도의 반응이 약해지면 방향을 바꾸고, 반응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걸어가고 하다 보니 던전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히든 던전 <신의 모루>를 최초 발견하였습니다!]
이어지는 자잘한 최초 발견 보너스 메시지는 천장 높이가 50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강철의 신전의 위용에 묻혀 버렸다.
파티는 강철로 만들어진 터널 같은 공간을 걸으며 던전 안으로 진입했다. 무겁고 고요한 공기에 숨이 막힐 때쯤.
“잠깐.”
도진이 파티원들에게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서 손을 뻗어 앞을 가리킨다.
그곳엔 강철로 만들어진 기사 조각상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에이, 설마요.”
너무 뻔한 전개잖아요. 테레사가 어색하게 웃었으나.
도진은 아니었다.
설마는 무슨.
‘저거한테 털려서 이 던전이 영원히 사라졌는데.’
저 쌍둥이 기사 조각상은 이 던전의 첫 번째 네임드 몬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