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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고 보니 익숙한 뒷모습이 둘이나 보였다.
가장 앞에서 충격파를 버텨 주는 탱커 중 하나가 테레사고, 그녀 뒤에 딱 붙어 있는 건 소소였다.
‘잘 버티고 있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있는 게 중요하다고 독려하긴 했다.
하지만 그게 말이 쉽지.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고 싶다고 살아남을 수 있으면 그게 대단한 일이다.
‘반쪽짜리 탱커라 제일 위험한 순간에는 뒤로 빠져야 했던 게 오히려 생존으로 이어진 건가.’
전용 힐링팩처럼 따라다니는 소소도 한몫했을 것이고.
온몸에 걸친 장비의 가격만 따지면 소소는 S급을 넘어 SSS급쯤 되는 힐러이니 말이다.
이유야 어쨌든, 살아 있으면 됐다.
충격파가 지나간 후 도진은 테레사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제부터 나한테 따라붙어요.”
살아 있으면 써먹어야지.
도진은 테레사를 전용 방파제로 쓸 생각이었다.
주변에 항상 탱커 하나가 배치되어 있으면, 조금 더 자유로운 포지셔닝이 가능해지고, 딜각을 잡는 것도 훨씬 쉬워질 것이었다.
“네……!”
대답하는 테레사의 턱이 잘게 경련한다.
그만큼 이를 악물고 있었다는 뜻이고, 긴장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잔뜩 긴장한 그녀와 달리 평소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소소가 도진을 힐끔 봤다.
그리고 전방을 다시 본 그녀는 도진에게 버프를 잔뜩 걸었다.
“빨리 퇴근해야 하니까 저것 좀 어떻게 해요.”
그녀의 말에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었다.
다들 죽네 사네 하는 전장도, 16개의 눈깔에서 광선을 뿜어 대는 노답 괴물도, 재벌가 무남독녀 외동딸 앞에선 그저 퇴근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인가 싶어서.
툭.
마지막으로 테레사의 어깨를 친 도진이 움직였다.
보스의 측면을 돌며 마법을 난사하는 도진.
그런 도진을 보스의 눈동자 하나가 따라붙었다.
아기의 동공이 좁아졌다가 확 하고 확장한다.
그걸 본 도진은 순간적으로 가속했다.
주욱 하고 광선이 지면을 긁었다.
이것과 비슷한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기가 지닌 16개의 눈동자는 각각 다른 목표물을 좇으며 계속해서 레이저를 긁어 댔다.
중간에 돌발적으로 섞어 넣는 손바닥 충격파의 간격도 갈수록 짧아졌다.
보스와 가깝든 멀든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지옥 같은 패턴이었다.
‘또 충격파냐……!’
열심히 딜을 하던 중 다시 올라가는 아기의 왼팔을 본 도진이 인상을 쓰며 눈을 돌렸다.
방파제로 쓸 테레사를 찾기 위해서였으나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달려와 앞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그때 팔을 들어 올리던 아기가 마치 팔을 들어 올리는 게 버거워진 듯이 주춤했다.
도진의 눈에 보이는, 손에 응집되는 마나도 이전과 달리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섬광창》
도진은 본능적으로 공격 마법을 캐스팅했다.
노린 곳은 아기의 왼팔. 거기서도 손바닥으로 흘러 들어가는 마나가 정체되어 있는 지점이었다.
1차적으로 광점이 터졌다. 이 소리는 전장의 소음과 지속적으로 흐르는 아기의 기괴한 울음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퍼어엉-
하지만 이어지는 폭음은 전장에 깔린 소음을 밀어내고 존재감을 과시하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충격파 공격을 위해 모으던 힘이 도진의 공격에 의해 역류하며 안쪽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팔꿈치 어림이 터져나가며 아기의 왼팔이 박살 났다.
-끄에에에엥!
한쪽 팔을 잃은 아기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고꾸라져 바닥에 턱을 처박았다.
그걸 본 모두가 달려들어 아기를 공격했다.
“팔! 팔 재생 못 하게 팔을 노려!”
팔이 재생되는 걸 본 도진은 상처 부위를 불로 지져 버렸다.
여기에 기타 등등 치유 감소 능력을 지닌 사람들의 공격도 그곳에 집중됐다.
-끄에엥!
통증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아기는 남은 발로 바닥을 쓸며 가까이 붙어 있는 인간을 붙잡으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런 패턴에 익숙해진 탱커 및 근거리 딜러들은 구르고 달려서 잡기 공격을 흘려 냈다.
가장 위험한 거리에서 줄타기를 하던 탄토는 아예 쓰러진 아기의 신체 부위 이곳저곳을 타 넘으며 등 위로 올라가 버렸다.
흡사 도시를 누비는 파쿠르 전문가 같은 움직임.
그런 탄토를 눈동자 하나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동공이 좁아지려는 찰나 그곳에 광점이 찍혔다.
섬광이 번쩍이며 아기의 눈동자가 폭발했다.
‘이것도 되네.’
보스가 레이저 패턴을 쓰기만 기다리고 있던 도진이 손을 쓴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무슨 공격이 들어오든 우직하게 충격파든 광선이든 만들어 내더니.
이젠 그게 한계에 봉착한 모양이었다.
보스는 발악을 하듯 다른 눈으로 광선을 쏘려 했으나 그중 절반 이상이 도진에게 가로막혔다.
보스의 커다란 머리통은 역류와 폭발로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다.
‘이대로만 가면 무난하게 죽일 수 있겠지만…….’
그럴 리는 없고. 뭔가가 더 있을 텐데.
그게 뭘까, 하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
아기의 몸뚱이가 갑자기 크기를 줄여 나갔다.
그러면서 육체의 형태가 바뀐다.
훨씬 더 많은 수의 팔다리가 뻗어 나온 것.
새로운 공격 패턴이 시작되는가 싶어 우르르 물러나는 사람들.
그러나 보스의 목적은 공격이 아니었다.
놈은 지네처럼 돋아난 팔다리로 가벼워진 몸을 들어 올리더니, 저 멀리 다른 몬스터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돌진했다.
-끄에에에엥……!
배고픈 아이 같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이다.
처음 태어날 때처럼 다른 놈들을 흡수하려는 속셈이 훤히 보였다.
‘지금이다!’
필사적으로 영양분으로 쓸 것들을 향해 달려가는 아기를 본 도진은 지금이 승부가 갈릴 순간이란 것을 직감했다.
거의 본능만으로 움직이던 놈이다.
그런 놈이 공격도 포기하고, 제 덩치까지 스스로 줄여 가며 다른 슬라임을 흡수하려 든다?
그건 곧 저놈이 현재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 못 죽이면 끝장이야.’
한계에 다다른 건 더욱 끔찍하게 변모한 보스만이 아니다.
이쪽도 이미 한계는 진즉에 넘었다.
여기서 끝내야 했다.
“지금이에요.”
근처에 있는 테레사에게 한마디를 남긴 도진이 튀어 나갔다.
항상 유지하던 일정한 거리를 깨고, 선을 넘어 보스를 향해 달린다.
보스의 눈동자 몇 개가 휙 하고 도진을 주시했다.
눈동자에 잠시 망설임이 스쳤다.
학습된 통증과 공포가 공격을 주저하게 한 것.
그러나 곧 눈동자에 힘이 몰린다.
4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도진에게 광선을 뿜으려 했다.
그걸 본 도진이 크게 외쳤다.
“이건 피할 겁니다!”
도진은 4개 중 하나의 눈동자를 공격해 안전지대를 만들었다.
지이잉- 하는 소리가 뒤로 흘러간다.
광선이 뒤쪽을 긁은 거다.
무시하고 달렸다.
도진은 달리면서 마법을 준비했다.
그런 도진을 다시 6개의 눈이 노린다.
일제히 좁아지는 아기의 동공.
하지만 지금 도진의 마법회로는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느라 모두 사용되고 있었다.
보스의 공격을 견제하거나 저지할 수단을 쓸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도진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열심히 발을 맞춰 옆을 달리는 테레사를 믿기로 한 것이었다.
「다른 놈들이랑 마찬가지로 월드 보스도 죽을 때가 되면 발악을 하겠죠. 그때 물러나지 않고 마무리를 지으러 들어갈 거예요. 그때 누나가 몸으로 막아 줘요. 딱 한 턴만 벌어 주면 됩니다. 그렇게만 하면 되는데, 할 수 있겠어요?」
도진이 테레사에게 해 놓았던 말.
이를 테레사는 이누스 초원에서 굴러다닌 기간 내내 한순간도 잊지 않았었다.
“으아아아!”
테레사는 「희생의 돌진」 스킬을 사용했다.
달리던 속도에 스킬 가속도가 더해져 도진과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좁아졌던 아기의 눈동자가 일제히 확장했고.
퍼어엉.
광선 줄기에 얻어맞은 테레사가 즉사했다.
방패를 앞세웠고, 쓸 수 있는 모든 스킬과 수단을 동원했음에도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테레사가 광선을 가로막아 왜곡시킨 덕에 도진은 무사히 그 지점을 통과했고, 근거리 딜러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었다.
볼품없게 작아진 팔을 휘두르려는 월드 보스였으나 그보다 도진의 공격이 빨랐다.
《그림자 가시》
사정거리가 형편없이 짧아서 근접해서 박아 넣어야만 하는 마법이지만, 그만큼 공격력이 강력한 「그림자 가시」가 엎드린 자세를 한 아기의 가슴팍에 꽂혔다.
고통에 찬 비명이 아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도진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확 펼쳤다.
아직 도진의 손과 연결되어 있는 그림자 가시에서 수많은 가지가 팍 하고 솟아났다.
아기의 체내에서 폭발하듯 돋아난 그것 하나하나는 풀차징 된 파멸 룬의 힘을 품고서 치명타 대미지를 입혔다.
퍼억.
도진이 커다란 충격을 입고 하늘을 날았다.
고통스런 아기의 몸부림에 휩쓸린 탓이었다.
마지막 순간 본능적으로 염동력을 방출해 방어했으나 완벽하진 못했다.
뇌가 흔들린 탓에 흔들거리는 시야에 월드 보스를 담으며 도진은 이를 악물었다.
‘회로가 먹통이 될 정도로 꽉 채운 일격이었는데, 이걸로도 모자라다고?’
아기는 죽지 않았다.
죽기 직전으로 보였으나 아직 살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기다시피 움직이는 아기에게 공격을 집중했다.
저 멀리 다른 슬라임 몬스터들은 슬금슬금 자신들에게 기어오는 아기를 피해 물러나고 있었다.
마치 먹이 신세가 되기는 싫다는 듯이.
‘이기긴 했네…….’
도진은 안도와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이 정도면 마무리 일격으로 충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막타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야 할 듯싶었다.
“하…….”
마비된 마법회로에서 전해지는 저릿함을 느끼며 탄식을 뱉는 도진.
저 멀리서 가슴에 뚫린 상처에서 검붉은 액체를 줄줄 흘리던 월드 보스 태고의 인류가 쿵 하고 쓰러졌다.
잠시 동안 눈동자를 돌려 도진을 노려보던 놈은 고개를 치켜들고 끔찍한 단말마를 지르더니 16개의 눈을 동시에 감았다.
[월드 보스 ‘태고의 인류’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면서 뜬 메시지.
‘뭐야?’
사실상 막타를 포기하고 있던 도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하지만 곧 어떤 이유로 자신이 마지막 일격의 주인공이 됐는지를 깨닫는다.
‘도트딜!’
「멸망의 집행자」에 달린 지속 피해가 월드 보스의 숨통을 끊은 것이다.
전투가 가능한 인원이 다 달려들어 집중 공격을 펼치는 와중에 마지막 생명력 수치를 0으로 만든 게 하필이면 도트딜이라니.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지속 피해로 다른 사람들의 딜을 밀어 내고 막타를 차지한 딜을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어느 쪽이 맞는지 도진 본인도 헷갈릴 정도로 당혹스런 상황이었으나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과정부터 결과까지 자신이 바란 모든 게 이루어졌다.
“완벽하네.”
모든 게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