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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은 지체 없이 진행하기로 했다.
시간을 끈다고 뭐 하나 나아지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적에게 시간을 더 주기도 싫었다.
‘그래도 통보 정도는 해야겠지.’
다른 데는 몰라도 명목상으로나마 동맹을 맺은 길드들에게는 작전에 대해 알리긴 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일단 저지르고 보고 싶다.
하지만 서로 담당 구역이란 걸 정해 둬서 이쪽이 멋대로 자리를 비워 버리면 사소한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다.
‘운이 좋으면 각 보던 데서 뒤늦게나마 따라 들어와서 어그로 좀 끌어줄 수도 있고.’
지금은 외곽에서 사냥하며 돌아다니는 데 만족하고 있지만, 이름값을 올리고 싶은 길드는 이미 리스크 대비 리턴을 계산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먼저 들이받았다간 피를 볼 거 같고, 어디 다른 놈들이 먼저 들어가서 장렬히 산화하면서 데이터를 좀 줬으면 하고 있겠지.
근데 또 이게 누가 먼저 앞으로 치고 나가 버리면 저놈이 다 먹을 거 같아서 조바심이 드는 게 사람이란 동물이다.
‘됐다.’
도진은 길드장들에게 심플한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부터 우리 낙하 중심지로 진격할 겁니다’ 하고.
신라를 포함해 메시지를 받은 동맹 길드장들이 당혹스러운 티가 팍팍 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도진은 그들에게 일괄적으로 ‘바빠서 이제부터 답장이 어렵다’라는 메시지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런 뒤 방송을 켜고, 자기 몫의 축성부를 꺼내 사용하며 말했다.
“축성부 사용하겠습니다.”
그에 맞춰 공격대원 전원이 지급받은 축성부를 사용했다.
200명의 공격대원 전원의 몸에서 은은한 빛의 기운이 퍼져 나왔다.
-머임? 오늘 뭐 특별한 거 있는 거야?
-축성부? 저 인원이 싹 다 그걸 쓴다고?
오늘은 왜 방송이 안 켜지는 거냐, 설마 예전처럼 실시간 방송 없어지는 거냐, 이벤트 기간 동안은 켜기로 한 거 아니냐 등등.
켜지지 않는 방송에 아우성치던 시청자들은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보이는 장면에 놀라는 한편 기대를 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 큰 게 올 거라는 기대.
그리고 도진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지금부터 진짜 월드 보스 레이드 시작하겠습니다.”
도진의 신호에 맞춰 탱커 라인을 필두로 200인 공격대가 일제히 앞으로 나아간다.
외곽을 돌면서 적당한 놈들을 골라서 사냥하던 평소와 전혀 다른 움직임.
마치 기병대가 적의 중심을 돌파하려는 듯이 일직선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은 도진이 말한 ‘진짜 월드 보스 레이드’의 의미를 깨달았다.
-미친! 운석 떨어진 데로 들어갈 건가 봐!
-……? 조금만 들어가도 몬스터 존나 세져서 들어가면 좆 된다고 했잖아?
-야, 지금 우리가 누구 방송 보고 있는지 잊었냐? 여기 도진 채널이야 ㅋㅋ
-역시 재미없게 약한 놈들만 있는 겉만 핥을 진이 아니지!
도진은 전방에 집중했다.
탱커 라인과 적 몬스터가 조우할 시점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접근을 느끼고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검붉은 슬라임.
오우거의 형상을 갖추려는 놈을 본 도진이 외쳤다.
“2공격대 사격!”
지난 며칠 동안 죽인 적의 숫자는 곧 데이터가 되어 쌓였다.
적의 형태와 크기에 따른 방어력과 생명력을 가늠한 도진은 넉넉하지만, 과하지 않은 화력을 투사했다.
도진의 명령에 따라 발사된 마법이 일제히 오우거의 모습을 한 슬라임에게 꽂혔다.
요란한 폭음이 겹치며 사방팔방으로 놈의 파편이 튀었다.
똘똘 뭉친 공격대는 그대로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시작한 이상 한순간도 멈추면 안 됩니다! 2, 3공격대는 앞만 뚫어요! 다른 방향은 다른 사람들이 봐 줄 겁니다!”
일점 돌파를 감행한 이상 멈춰선 안 된다.
멈추는 순간 사방에서 밀려드는 적에게 둘러싸일 테니.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도진은 공대 화력의 절반가량을 오직 공격대가 나아갈 길을 뚫는 데 할애했다.
도진이 이끄는 공격대는 자동 포탑을 얹고 달리는 전차처럼 사방으로 마법을 쏘아 대며 전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등장한 아르마딜로처럼 생긴 개체가 20명의 마법사가 쏜 마법에 적중당하고도 죽지 않고 접근해 왔다.
“스페어 탱커들 우측 틀어막아요! 근딜들 우측에 달라붙는 놈부터 처리합니다! 법사들 눈 돌리지 마! 화력 지원 내가 합니다!”
도진은 아껴 뒀던 룬의 힘을 사용했다.
「파멸 룬」으로 강화한 「뇌전의 창」이 탱커에 가로막힌 아르마딜로에게 적중했다.
탱커와 근딜들이 움직인 게 민망할 정도로 허망하게 아르마딜로가 무너져 내렸다.
「적야」로 마나의 응집이 불안정한 부분을 확인해 파멸의 힘을 실은 마법을 크리티컬로 꽂아 버리니 버틸 수가 없었던 것.
“정면 집중! 딜 밀려서 발목 잡히면 정말 답 없습니다!”
안으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검붉은 슬라임들의 덩치가 커졌다.
그에 비례해 놈들의 생명력이 끈질겨지는 건 당연한 일.
처음에는 탱커 라인이 맞붙을 새도 없이 펑펑 터져 나가던 몬스터들이 점차 공격대의 진격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도진은 자신 또한 적극적으로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으면 평범한 마법사 10명, 아니 20명 수준의 화력을 뿜을 수 있는 도진이다.
그가 마법을 뿜어내기 시작하자 조금 정체되었던 공격대의 진격이 다시 가속도가 붙었다.
“아네모네!”
도진은 내친김에 아네모네까지 소환했다.
“사람들을 도와줘!”
200명이나 뭉쳐 있지만, 정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빡빡한 전투다.
그런 와중에 고양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네모네 같은 인력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퍼어엉.
측면에서 대량의 액체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보자 거대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몇 마리의 보스 몬스터가 하나로 합쳐지고 있는 게 보였다.
“공격, 공격! 완성되기 전에 터뜨려!”
도진의 다급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마법이 날아가고 있었다.
놀란 마법사들이 시전하고 있던 마법을 일단 갈기고 본 거다.
합체 변신 중에 마법에 얻어맞은 놈은 질량의 30퍼센트가량의 질량을 잃었다.
그럼에도 결국 남은 슬라임 살점은 거대한 메뚜기의 형상을 갖췄다.
놈은 펄쩍 뛰어서 순식간에 엄청난 거리를 좁히며 공격대를 공격했다.
콰아앙.
생존기를 돌린 탱커 한 명이 튀어나가 공격을 막아 낸다.
그러지 않았다면 주변 근거리 딜러는 물론이고 힐러나 마법사 라인까지 휩쓸릴 뻔했다.
‘젠장… 너무 큰데? 저걸 처리하고 가려면 시간이…….’
아직 파멸 룬이 충전되지 않은 것도 있고.
저쪽에 공격을 집중하면 다른 방향에서 밀고 들어올 거다.
전방에 화력 공백이 생기면 전진 속도도 느려질 거고.
도진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가!”
튀어나가 메뚜기를 가로막은 탱커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전신에 빛의 힘이 폭발한다.
창 쥔 손으로 엄지를 들어 보이는 탱커는 로터스였다.
순간 도진은 흑인 청년이 빛나는 성자로 보였다.
실제로 성기사 스킬 때문에 빛나기도 하고 대머리기도 하고.
어쨌든.
“전진! 앞으로 계속 가요!”
도진은 앞으로 나아갈 것을 명령했다.
로터스가 얼마나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사이에 최대한 앞으로 전진해야 했다.
결국엔 뒤에서 메뚜기가 따라올 거라고?
그런 거 따지다간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한다.
도진은 전진을 명했고, 공격대는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렸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계속해서 피해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저희가 막을게요!”
그때마다 누군가가 희생하여 시간을 벌었다.
로터스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뽕을 주입한 것인지, 공대원들은 위기가 발생하면 서슴없이 적을 붙잡고 늘어지며 공격대가 앞으로 나갈 틈을 벌어 줬다.
‘원래 뻔한 전개가 더 가슴 떨리는 법이거든.’
현재 이곳은 집단 광기의 현장이 되어 있었다.
일심동체가 되어 몬스터로 가득한 전장 한복판을 뚫고 있는 상황.
정신없는 난전 속에 사람들은 아드레날린 과분비 상태에 빠졌고.
바로 옆에서 같이 싸우던 동료가 희생하는 모습에 감정 과잉까지 일어났다.
“으아아아! 마법 만세!”
그러다 정말 어떤 역치마저 넘어 버렸는지, 앞으로 달려 나가 자폭하는 마법사까지 나왔다.
도대체 저딴 마법은 어디서 배운 거야?
도진은 자신도 모르는 자폭 마법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공격대원들은 또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으아아아아! 돌격, 돌격! 개새끼들 다 죽여 버려!”
따로 말을 꺼낼 것도 없었다.
탱커고 딜러고 힐러고 눈이 돌아가서 앞만 보고 돌진하는데, 광전사들이 따로 없었다.
일점 돌파 같은 게 아니다.
이젠 진창에서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난투고 난전이었다.
탱커가 날아오는 공격을 막고, 온몸으로 밀어붙이면.
“죽어, 죽어, 죽어! 이 시발 새끼들!”근딜들은 거기 달라붙어서 어떻게든 칼질을 하고, 창질을 하고, 도끼질을 했다.
숨을 마시고 뱉는 일보다 적을 베고 패고 죽이는 게 더 중요한 일인 양.
마법사와 힐러들은 한계에 부딪히자 각자가 챙긴 도핑제를 빨아 대며 주문을 외웠다.
후에 찾아올 후폭풍보다 지금 이 순간의 전투를 위해.
공격대 전체가 생존을 도외시하고 혼신의 힘을 투사했다.
‘조금만 더……!’
도진의 눈에 보이는 불길한 마나의 기둥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지상에 떨어진 멸망의 조각을 육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공격대의 전열이 무너졌다.
상당수의 마법사가 마법회로 과부하로 마법을 쓰지 못해 발생한 문제였다.
“도진 님! 저희가 어떻게든 길 뚫겠습니다. 남은 사람 데리고서라도 앞으로 가세요!”
실시간으로 무너져 가면서도 사람들은 도진을 앞으로 보내고자 했다.
도진은 가슴이 울컥했다.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건지.
지금까지는 실감도 못 했고, 그리 신경 쓰지도 않았었다.
늘어가는 구독자 수는 그냥 수치로 다가왔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도진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만 같았다.
“저기 뭐가 있는지는 확인해야죠!”
“뭐가 있든 꼭 잡아 주세요!”
1공격대 인원은 로터스를 제외하면 손실이 없었다.
도진은 그들을 이끌고 마지막 몬스터의 장벽을 넘을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퍼엉.
후방에서 밀려들던 몬스터들의 진영이 우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나타난 건 도진 공격대와 마찬가지로 너덜너덜한 다른 공격대였다.
복장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나, 모두가 입고 있는 방어구 어딘가에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푸른 초승달 문양.
신라 길드였다.
도진 공격대가 뚫고 들어온 길을 그대로 따라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바리: 날로 먹으려고 따라온 거 아니니까 그렇게 볼 거 없어요. 말했잖아요? 언젠가 빚 갚겠다고. 길 뚫어 줄 테니까 하고 싶은 거 해요. 대신 우리 길드도 한 파티만 끼워 주는 조건으로.]
그건 빚을 갚는 게 아닌데?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저 더러운 슬라임 새끼들이 세운 장벽만 뚫을 수 있으면 악마한테 영혼도 팔고 싶은 심정이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먼 거리지만, 고레벨 궁수인 바리는 어렵지 않게 제스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