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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을 포함해, 이누스 초원에서 며칠을 보낸 모든 이들은 한 가지 문제점을 깨달았다.
‘이거 외곽은 좀 할 만해도 안쪽은 완전 노답인데?’
겉 부분을 갉아먹는 건 비교적 쉽다. LOST가 맞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난이도가 확 뛰었다.
몬스터 밀도가 높아지는 건 물론이고, 몬스터 하나하나의 강력함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난이도가 높잖아?’
이럴 거야 알고 있긴 했다.
낙하 지점에 가까워질수록 난이도가 오르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
하지만 문제는 그 정도다.
이건 상승폭이 너무 가파르다.
‘첫 번째 월드 보스 레이드에서 피해가 커진 건 난이도 문제보다는 유저 뻘짓 지분이 9할 이상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그런 뻘짓이 없음에도 밀고 들어가질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식이면 저번이랑 별로 달라질 게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계속해서 생성되는 보스 몬스터를 유저들이 학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진이 보기에 전체적인 전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사실상 현재 유저 손에 죽어 나가는 것들은 중심에서 밀려난 약한 개체들, 그리고 태어나길 바깥에서 태어나는 멸망의 힘에 영향을 덜 받는 개체들이다.
몬스터 진영에서 보자면 시간 벌이용에 지나지 않는 버림 말이자 소모품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 도진은 예전 ‘빛’과 조우했던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도전의 탑에서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 내면서 너희 리제니안은 더 강해질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런 만큼 너희가 감당해야 할 시련도 그 힘을 키웠지.」
「멸망은 포기하지 않아. 우리가 정해진 운명의 궤적을 바꾸려 들면, 멸망은 더 강한 힘으로 달라진 궤적을 원래의 모습으로 바꾸려 들지.」
이걸 한마디로 요악하면… ‘난이도가 오를 것이다’라는 말.
올라 봐야 얼마나 오르겠어.
뻘짓만 막아도 이번 월드 보스 레이드는 피해 없이 막을 수 있다.
들었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으나 직접 겪어 보니 아니었다.
‘이거 이대로 흘러가면…….’
좆 된다. 확실히 그럴 거란 감이 팍팍 왔다.
“공대장님! 힐러들 마나 간당간당 하답니다!”
사색 도중 들려온 외침에 도진의 불안은 조금 더 구체적인 형태를 갖췄다.
‘벌써부터 힐러들 마나가 바닥 났다고?’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1시간은 더 버틸 수 있었다.
이번에 유독 운이 안 좋았던 걸까?
정확한 판단을 내리려면 몇 번쯤 휴식과 전투 사이클을 굴려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었다.
‘나 혼자 판단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되지.’
도진은 일단 안전지대로의 후퇴를 지시했다.
며칠 손발을 맞춰 봤다고 더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된 공격대는 아주 깔끔하게 초원지대를 벗어났다.
그런 뒤 도진은 테레사에게 물었다.
“레사 누나, 이번에 어땠어요?”
“네? 뭐가요?”
“음, 난이도라고 해야 하나. 몬스터 뭐 달라진 거 없었어요?”
질문 받은 테레사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약간 더 아픈 느낌? 이번에 마주친 놈들이 좀 공격력 높은 애들이었던 거 같아요.”
“로터스 씨는 어땠어요?”
가까운 곳에서 쉬고 있는 로터스에게도 물었다.
그러자 민머리 흑인은 자신의 창대를 툭 치며 말했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이놈들 물리 내성이 장난이 아니에요. 내 파이크가 거의 안 들어간다니까요?”
“그거야 로터스 아저씨가 탱커형 성기사니까 그렇죠.”
듣고 있던 테레사가 말하자 로터스의 눈 크기가 확 하고 커졌다.
“아저씨? 뭔가 통역 프로그램이 고장 난 거죠? 저 아저씨 아닙니다. 난 이 세상에 태어난 지 22년밖에 안 된 신제품입니다.”
“에엑! 나보다 어리다고? 말도 안 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자연스러운 거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14살 중학생보다 어려 보이는 동양인이 이상한 겁니다!”
도진은 테레사와 로터스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바보들의 만담에 귀를 기울일 여유 따위 없다.
“저기…….”
그때 탄토가 말을 걸어왔다.
도진이 고개를 돌리자 탄토는 가면을 고쳐 썼다.
그런 그를 보며 도진은 생각했다.
‘얼굴에 흉터라도 있나?’
탄토는 얼굴은 물론 신상 일체가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에는 방송 활동도 접는다.
높은 랭킹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뭘 하는지 온통 비밀로 가득했던 게 탄토였다.
그래서 그런지 가면 안쪽의 얼굴이 궁금하긴 했다.
‘생각해 보면 컨셉일 수밖에 없구나. 흉터 같은 건 지우면 그만이니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과거 자신과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이라 약간 호기심이 들 뿐.
이쪽은 강제 솔플이었고, 탄토는 자발적 솔플이었다는 차이가 있긴 해도… 어차피 혼자였던 건 마찬가지니.
“말씀하세요.”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탄토가 왜 말을 걸었느냐지.
“몬스터 난이도 문제로 말씀 나누시는 거 같아서요.”
“혹시 탄토 님도 뭐 느낀 게 있나요?”
“이젠 몇 번 더 찔러야 겨우 죽던데요.”
자기 무기를 들어 올려 흔들며 말하는 탄토.
단검처럼 초근거리 무기를 쓰는 입장에서 자신의 공격력과 적의 생명력을 계산하는 능력은 매우 필수적이다.
이번 공격으로 적을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판단. 즉, 킬각을 보는 능력이 없으면 자칫 본인이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
그런 면에서 탄토 정도 되는 실력자의 계산 능력은 매우 정확한 편이라고 봐야 한다.
“탱커 쪽은 더 아파졌다고 하고, 딜러 쪽은 더 단단해졌다고 하고…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몬스터들이 강해졌다는 말이네요.”
“그렇… 게 봐야겠네요.”
마법사 비중이 높은 공격대 특성상 한 걸음 물러나 지시만 내리는 도진은 느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최소 수십 명의 마법사가 일제히 공격하는, 소위 죽창이라 불러야 할 일점사는 어차피 한 방에 적을 골로 보낸다.
적의 HP가 사소하게 늘어나 봐야 눈치를 챌 수가 없는 것.
‘역시 가장 먼저 변화를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한테 물어봐야 한다니까.’
현장 노동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대참사가 일어나는 건 비단 산업현장만이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필요한 정보를 모은 도진은 다른 길드장들에게도 메시지를 돌려 봤다.
그러자 대동소이한 답변이 돌아왔다.
‘미묘하게 전투가 어려워진 거 같다’는.
도진의 공격대처럼 ‘어차피 한 방’이라고 말할 수 있는 화력을 뿜어낼 수 없는 다른 공격대는 느끼는 갭이 훨씬 큰 듯했다.
‘적당히 갉아먹으면서 밀어 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끝낸다는 선택지는 이제 없다고 봐야겠네.’
원래는 몬스터의 영역을 조금씩 밀어 내면서 중심까지의 거리를 줄이려 했다.
한데 아무리 잡아 죽여 대도 몬스터의 영역을 축소시킬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는 언젠가 이쪽의 처리 능력보다 저쪽의 생산 능력이 더 커지는 순간이 올 텐데, 그러면 펑 하고 터져 나올 거다.
‘필사적으로 우리 접근을 막으려 드는 건 월드 보스를 완성할 때까지 버티려는 걸 테고.’
이런저런 생각 끝에 도진은 안정적으로 땅따먹기를 하려던 기존 계획을 엎기로 했다.
지금은 승부수를 띄울 때다.
‘원래는 돌파해야 할 거리를 최대한 줄인 뒤에 소수 정예로 특공을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아예 200명짜리 죽창으로 쭉 뚫고 나가는 수밖에.’
도진은 멸망의 조각을 상대로 강렬한 한타를 벌이기로 했다.
* * *
도진은 200명의 공격대 인원을 설득하기에 앞서 회사에 먼저 낙하 지점 타격 계획을 알렸다.
지금까지처럼 알아서 하면 될 걸 굳이 회사에 미리 계획을 알린 이유는 간단했다.
‘200명한테 축성부 돌리려면 그게 돈이 얼마야.’
안전하게 게임 해도 경험치 팍팍 오르지.
이미 누가 봐도 이벤트 기여도는 최고 수준이지.
이대로 이벤트 마무리하면 넉넉한 기여도 점수가 푸짐한 보상으로 정산될 거라 생각하고 있을 텐데.
거기다 대고 ‘우리 함께 저기 멸망의 기운으로 가득한 중심부로 돌격해요’ 하고 말을 해야 하는 거다.
인던이면 사망 페널티라도 적지. 아쉽게도 월드 보스 레이드는 필드 취급이라 죽으면 사망 페널티가 그대로 적용된다.
어디서 PK 열심히 하고 다닌 거 아니면 가치 있는 걸 잃을 걱정이야 별로 없다곤 해도 그 확률이 제로는 아닌 데다… 경험치 상실과 접속 제한 페널티는 치명적이었다.
그러니 사망 페널티를 상쇄해 줄 축성부 정도는 돌려 가면서 얘기를 꺼내야 했다.
문제는 고레벨 유저용 축성부 가격이 한화 500만 원 정도라는 건데.
‘500만 곱하기 200이면… 10억이네.’
그 정도는 충분히 부담할 수 있을 정도로 벌게 된 도진이었으나 심장 벌렁거리는 금액인 건 변함이 없었다.
해서, 도진은 공대원한테 돌릴 축성부값을 콘텐츠 제작비 명목으로 회사에서 타 낼 생각이었다.
[“운석이 떨어진 곳에 가 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대충 10억 정도를 공대원한테 돌려야 한다고요?”]
주강희에게 전화를 건 도진은 눈치가 보였다.
오랜만에 하는 통화인데 ‘잘 지냈어요?’ 다음에 바로 ‘10억이 필요한데요’를 박아 버렸으니 눈치를 안 보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치를 본 건 도진뿐.
정작 주강희는 도진의 제안이 매우 반가웠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많이 좋아할 느낌인데?’
최근 사전 준비 퀘스트 최초 클리어와 적극적으로 나서서 월드 보스 레이드를 준비하고, 또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는 도진의 인기 상승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사람들은 안전한 경험치 벌이에 신경 쓰고 있을 때 돌발적으로 낙하 지점 탐색 및 타격을 해 버린다?
이미 대규모 전투라는 자극에도 슬슬 질려 가고 있는 대중들이 환호할 수밖에 없는 콘텐츠가 될 것이었다.
‘이 사람은 이런 거까지 계산하고 이런 걸 계획한 건가?’
평소엔 하지도 않는 도진 채널 실시간 송출까지 하고 있는 상황에 이런 콘텐츠라니.
도진에게 따로 돈을 줘 가면서라도 부탁하고 싶은 수준이었다.
[“비용은 더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도진 씨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다만 도진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흔쾌한 수락이기도 했다.
* * *
10억을 받았습니다.
어느 광고 문구처럼 예산을 타 낸 도진은 어렵사리 공대원들에게 말을 꺼냈다.
“이대로 안전하게 게임 하는 게 더 좋은 분도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저기 운석이 떨어진 지점에 가고 싶습니다.”
200명의 인원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죽을 수도 있겠지만,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은 공격대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강제하고 싶지 않아요. 사실 강제할 수도 없는 일이고. 개인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참여하시는 분께는 축성부를 지원해 드립니다. 저와 함께해 주실 분들은 오른쪽으로 서 주세요.”
도진이 말을 마치자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전부가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절반쯤이면 선방했다 생각하려 했던 도진은 잠시 말을 잃고 멍한 얼굴이 됐다.
그 모습에 누군가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도진 님 무모한 거 모르고 모인 사람 한 명도 없어요! 대충 이럴 거 예상하고 모인 거지!”
맞아요, 맞아!
“도진 님이랑 게임 하는데 우리도 LOST 역사에 한 획 그어 봐야죠. 적당히 경험치랑 보상 챙기려고 모인 거 아니라고요.”
그렇게, 중심부 타격대 인원은 한 명의 누락 없이 공격대 전원으로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