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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37화 (13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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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제물이 아니어서일까.

첨탑의 마법진은 엄청난 양의 제물을 삼키고서야 활성화됐다.

제단의 바닥에 검붉은 빛이 퍼져나가며 보이지 않던 문양이 보일 때쯤 도진은 다른 첨탑을 향해 움직였다.

지하를 통해 이동하고, 주요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첨탐을 타격하고, 주변 괴물들을 소각하는 작업을 하며 도진은 마치 스스로가 테러리스트가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통로 구석 어딘가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움직였다. 그러다 네 번째 첨탑에서 도진은 새로운 강적을 조우했다.

쐐애애액- 콰앙!

“저 꼴로 쏘는 화살 위력이 뭐 이따위야!”

【멜리나가 쏘는 화살이 좀 맵긴 해. 활잡이 주제에 바람이 아니라 땅의 마력을 다루는 녀석이라 만들어 내는 화살이 엄청 묵직하거든.】

제단이 있는 방 안쪽에서 다리가 잘린 상태로 활을 쏘아 대는 용사의 옛 동료 멜리나였다.

‘하반신은 날아갔고 눈도 한쪽이 없고… 저런 상태면 저렇게 되기 전에 죽었어야 하는 거 아냐?’

고개만 내밀면 바로 귀신같이 날아오는 마력 화살에, 도진은 간담이 다 서늘해졌다.

레벨 보정이니, 능력 보정이니 하는 걸 믿고 맞아 보기엔 위력이 지나치게 살벌하다.

‘잠깐… 마력 화살이라고 해도 무한히 만들 수는 없을 거 아냐?’

저 고정포탑의 반응속도와 연사력을 볼 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여길 통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건 도진이 마법사여서가 아니라 탱커여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애초에 정공법은 막아 뒀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게끔 만들어진 구간이란 뜻.

도진은 몸을 두꺼운 벽 뒤에 숨긴 채 악령을 만들어 보내는 식으로 멜리나의 소모를 유도했다.

마나 포션을 마셔 가면서 마나통을 세 번 정도 비웠을 때쯤 멜리나가 활을 쏘는 동작을 취해도 화살이 만들어지지 않게 됐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돼.”

적으로 하여금 공격 능력을 상실하게끔 유도하는 데 성공한 도진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야, 너 진짜 머리 좋다. 원래 멜리나가 저 정도 쏜다고 저렇게 되진 않는데. 난 정면에서 화살 쳐내면서 접근하는 거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는데.】

정정한다.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한다.

충분히 압도적인 능력이 없으면 말이다.

‘먼치킨 새끼…….’

도진은 멜리나가 혹시라도 다시 화살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기 전에 그녀를 처리했다.

멜리나는 도진의 마법에 적중당해 이미 망가졌던 몸이 더 처참하게 부서지면서도, 계속해서 활을 쏘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저런 상태가 되기 전 각인된 사명을 이성 잃은 괴물이 되어서도 이어 가는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공격을 해야 하는 도진 입장에서는 썩 유쾌한 장면이 아니었다.

‘퀘스트 한번 거지 같네.’

여러모로 입맛이 쓴 퀘스트다.

설정부터 전개가 전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고맙다. 이제야 겨우 저 녀석도 쉬겠네.】

완전히 침묵한 멜리나를 보며 매튜가 말했다.

“…….”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럴 때 할 만한 대답을, 도진은 아직 찾지 못했다.

* * *

다행스럽다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머지 첨탑 마법진을 활성화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브라킨만큼 멀쩡한 상태로 남은 강적은 없었다.

궁수 멜리나가 하반신과 한쪽 눈이 없었듯이, 첨탑에서 최후의 접전을 치렀을 용사의 동료는 하나같이 심각한 부상을 안고 있었다.

다섯 번째 첨탑에서 만난 콜린이란 마법사는 머리가 없었다.

【원래는 멀쩡한 상태였거든. 근데 세상이 이 꼴이 되고 나서 자살을 시도하다, 시도하다가 안 되니까 아예 머리통을 없애 버리더라고. 다른 놈들처럼 미쳐 버리느니 그렇게 되기 전에 사라지겠다나. 뇌가 사라지면 자신도 사라지는 법이라고. 똑똑한 건지 무식한 건지.】

머리 없는 마법사는 뭔가가 접근만 하면 사방팔방으로 마력파를 쏘아 댔다.

주문을 욀 머리가 없으니 무식하게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공격만 가능했던 것.

콜린 쪽도 방전을 유도하는 걸로 비교적 쉽게 처리가 가능했다.

여섯 번째로 도착한 첨탑엔 특이사항이 없었다.

무난하게 그곳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도진은 1차적인 목표를 완수할 수 있었다.

우우웅.

마지막 첨탑이 활성화된 순간 묵직한 마력장이 퍼져 나갔다.

【이걸로 준비는 완료됐어. 이제 마법진의 중앙에서 발동만 시키면 된다.】

거대 마법진의 구성요소에 불과한 첨탑을 활성화한 것만으로 이미 미세하게 HP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간 끌다간 내가 산 제물로 삼켜지겠어. 시간 없으니 빨리 가자.”

【다른 건 몰라도 황성 비밀 통로는 내가 확실하게 조사해 뒀지.】

도진은 매튜의 안내에 따라 지하를 경유해 비밀 통로가 있는 장소까지 간 후 다시 황가의 비밀 통로로 황성에 진입했다.

【굵직한 놈들은 이미 내가 황성에 침입해서 황제랑 투닥거릴 때 싹 다 죽었어! 그때 안 죽고 남아서 죽음 없는 세계의 주민이 된 자들은 다 잔챙이니까 겁먹지 마!】

사태의 중심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아서인지 매튜가 잔챙이라 표현한 인간형 괴물들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도진은 착실히 좀비 변종쯤 되는 몰골을 한 자들을 몰고 다니며 열심히 처리했다.

그렇게 퀘스트가 완료되기 전에 황성을 불태운 방화범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재를 일으키고 다닌 끝에.

【여기다. 여기가 우리 최종 목적지야.】

화려함이 도를 넘은, 천장이 십수 미터는 될 거 같은 거대한 복도가 나왔다.

그리고 복도 끝에 장엄한 크기의 문이 형편없이 부서져 있고, 그 안으로 아마도 알현실이었을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알현실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서, 복도 일부까지 잠식하고 있는 꿈틀대는 살덩이들도 함께 눈에 들어왔다.

* * *

흡사 거대한 짐승의 위장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도진의 마안은 살덩이로 잠식된 공간 저편에 도사린 거대한 마력원을 발견했다.

먼 곳을 보는 마법을 쓰자 그것이 정확히 보인다.

어떤 여자가, 꿇어앉아 죽어 있는 매튜를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여자의 몸에선 계속해서 꿈틀대는 살덩이가 쏟아져 나온다.

‘저건… 힐이네.’

여자는 계속해서 죽은 매튜에게 힐을 쏟아붓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죽은 자에게 계속 힐을 쏟아붓는다고 살아나진 않는다.

그 결과 갈 곳 잃은 치유의 힘은 여자와 매튜의 육신에서 계속해서 살덩이만을 만들어 뱉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건 신성력에 기반을 둔 치유가 아니라 선천적인 재생력에 기반을 둔 치유 능력이 어떤 선을 넘으면 발생하는 종류의 부작용일 확률이 높다.

매튜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끔찍한 살덩이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경건하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사연을 묻기가 힘들 정도로.

【황제의 딸이다.】

그러나 도진이 묻지 않아도, 매튜는 스스로 입을 떼 말했다.

【황제가 불사의 꿈을 꾸게 만든, 불사의 운명을 타고난 황녀.】

매튜는 자신을, 아니 자신의 육신을 끌어안고 있는 황녀 르메인을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생각해도 바보 같았다.

제 아비의 폭주를 막기 위해 자신을 돕겠다고 나섰던 황녀의 다른 마음을, 죽은 뒤에야 알았으니 말이다.

【그녀의 이름은 르메인이다. 제 아비인 황제의 폭주를 막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내려놓고 사명을 다한 여자지.】

매튜는 이번에도 도진이 죽여야 할 자의 이름을 알려줬다.

‘마지막 가는 길에 이름 정도는 남기고 가야지.’

자신은 그들의 길동무가 되겠지만, 도진은 살아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거다.

그럼 그가 잊을 때까지는 그래도 이름 정도는 남아서 다른 세계 구경을 할 수 있겠지.

“후우…….”

도진은 한숨에 무거운 공기를 담아 뱉었다.

그런 뒤 매튜를 보며 말했다.

“어설픈 위로보다는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당신을 위하는 거겠지. 저런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진 않을 테니.”

매튜가 쓰게 웃는다.

긍정의 웃음이었다.

【르메인은 죽음이 사라지기 전에도 불사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죽음’을 지니고 온 너라 해도 그녀를 죽이는 건 힘들 거야. 그러니까 내 검을 써라. 불멸에 한없이 가까워졌던 황제를 베고, 마지막엔 한 세계에서 죽음이란 존재마저 베었던 검을 사용하면 그녀에게 안식을 줄 수 있을 거야.】

전투 시작 전 나눈 대화에서 마지막 싸움의 핵심적 공략이 주어졌다.

도진은 도핑을 하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미리 해 두는 작별 인사였다.

【고맙다.】

미래는 매양 불확실한 법이다.

그걸 알기에 매튜도 미리 인사를 해 뒀다.

‘딱 봐도 시간 끌어서 될 전투가 아니다. 길어야 1분. 아니, 30초 안에 마무리 짓는다.’

도진은 한계까지 「염동강화」를 끌어올렸다.

황금빛 마력이 진리의 서뿐만 아니라 전신에서 올올이 피어난다.

퍼엉.

금빛 가루 같은 입자를 뿌리며 가속하는 도진.

살덩이들이 도진을 감지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와 기세로 달려드는 살덩이들.

도진은 가장 위협적인 동선으로 다가오는 촉수를 향해 「화염구」를 쐈다.

폭발에 휘말려 몇 개의 촉수가 날아갔고, 도진은 그렇게 만든 공간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다 막으려고 하다간 집어삼켜진다. 전진할 공간만 확보해야 돼.’

알현실 입구를 지나 알현실 내부로 들어섰다.

바닥, 벽, 천장까지 전부 살덩이로 뒤덮인 알현실 내부는 일부만 덮여 있던 바깥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다.

촤차차차착!

사방팔방에서 도진을 노리며 날아드는 촉수. 아니, 촉수가 아니라 손이다.

마치 거인의 손처럼 생긴 살덩이가 솟아올라 도진을 찍으려 들었다.

‘이건 또 생각 못 한 전개인데!’

도진은 급히 「대지의 창」을 썼다.

바닥에서 살덩이를 뚫고 솟아오른 뾰족한 암석이 기둥처럼 살덩이 손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사이에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는 도진.

마법사답지 못한 재빠른 움직임과 마법사로서 가진 환경 통제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도진의 진격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매튜가 말한 검은 매튜의 손에 쥐여진 채 날 부분이 살덩이에 반쯤 묻혀 있는 상태였다.

‘앞으로 15미터 정도만 더 가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

【다가오지 마!】

강렬한 사념의 파동이 몰아치며 르메인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바닥의 살덩이가 불쑥 솟으며 도진의 다리를 휘감았다.

퍼벅.

잠시 멈춘 도진의 몸을 두드리는 살덩이들.

【이 정도 했으면 됐잖아! 나는… 나는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있을 거야. 나도 그도, 이 정도 행복은 누려도 되잖아……!】

사념파는 흐느낌과 절규가 뒤섞여 있었다.

‘진짜 퀘스트 거지 같네.’

몇 번이나 반복한 생각을 하면서 도진은 손을 뻗었다.

“아네모네, 저 검만 있으면 돼!”

【준비하고 있었어!】

도진의 손끝에서 나타난 아네모네가 검을 향해 달렸다.

붙잡은 도진을 뒤덮던 살덩이들이 멈칫했다.

마치 생각하지도 않았던 변수에 놀란 듯.

그 틈을 비집고 순식간에 달려간 아네모네가.

텁.

아네모네게 검을 물어서 뽑아냈다.

살덩이들이 아네모네도 뒤덮는다.

【진, 받아!】

움직임이 봉쇄된 아네모네는 목까지 살덩이에 뒤덮이기 직전 도진을 향해 검을 던졌다.

허공 위로 높게 솟은 검.

도진은 그것을 「염동」으로 끌어왔다.

턱.

결국 도진의 손에 죽음을 벤 검이 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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