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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를 본 도진은 빠르게 승부를 보기로 했다.
‘「착취의 쐐기」가 통하는 걸 봐선 분명 HP는 지속적으로 줄고 있는 게 맞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
말도 안 되게 피통이 크거나 실시간으로 HP가 회복되는 종류의 특성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양쪽 모두 1성 마법 짤짤이로는 승부를 보기 어려울 터였다.
‘어느 쪽이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딜로 밀어 버리는 것 말고는 없다.’
이런 상황에 「파멸 룬」이 충전됐다는 메시지는 도진에게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글귀였다.
‘한순간에 몰아쳐서 끝내자.’
실시간으로 날아드는 살벌한 공격을 피하면서, 도진은 한순간의 폭딜을 위한 설계를 시작했다.
《연화의 저주》
우락부락한 외모답게 물리 공격보다는 마법 공격에 더 취약한지 브라킨은 언제부터인지 도진만 공격하고 있었다.
이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으니, 자신에게 더 위협적인 공격을 하는 대상에게 어그로가 끌린 것일 터.
해서, 도진은 준비 시간을 벌기 위해 「연화의 저주」를 걸었다. 아네모네의 공격에 힘을 실어 주어서 브라킨이 그쪽을 신경 쓰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저주 거는 데 들어가는 마나를 봐선 마법 저항력이 그렇게까지 높진 않을 거 같군.’
저주를 포함한 대부분의 마법적 디버프는 상대의 마법 저항이 높으면 더 많은 마나를 소모하게 된다.
지금 브라킨의 마법 저항을 뚫고 「연화의 저주」를 거는 데 전체 마나의 15퍼센트가 증발했다.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압도적인 도진의 총 마나량을 생각하면 절대치로는 상당한 양이다.
다만 상대가 보스급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리 많은 마나를 소모한 게 아니었다.
‘평범한 법사들은 동레벨 보스한테 저주 한 번 걸어 보려면 마나통을 절반 넘게 날려 먹을 각오를 해야 할 정도니까.’
심지어 특출 나게 마법 내성이나 저주에 대한 내성을 지닌 보스한테 저주를 걸려고 하면 전체 마나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도진이 브라킨에게 저주를 건 것은 그만큼 뚫는 건 힘들어도 성공만 하면 효과 하나는 끝내주기 때문이었다.
‘저주는 걸렸고. 그럼 잠깐 동안 계속 피하기만 하면…….’
도진은 공격을 멈추고 브라킨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거 마법사는 이놈이랑 조우하고 10초 버티면 무슨 상이든 상 하나 만들어서라도 줘야겠는데.’
「염동체술」이 있는 자신마저도 이렇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데, 다른 마법사들은 정말 10초 안에 다진 고기가 될 게 뻔했다.
‘다른 클래스라고 이걸 어쩔 수 있을 거 같진 않지만.’
한참 브라킨의 공격을 피하고 있을 때였다.
“크웁!”
브라킨이 한껏 숨을 들이마시며 양손을 교차했다.
‘이건 위험하겠는데!’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도진은 전력을 다해 뒤로 뛰었다.
“피해, 아네모네!”
경고성을 뱉는 순간 피가 앞으로 쏠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계 직전까지 짜낸 각력에 「염동방출」이 더해지면서 붙은 순간 가속이 불러온 속도감 때문이었다.
그러한 속도가 도진을 살렸다.
콰드드드득!
브라킨이 양손에 든 창으로 찌르는 게 아닌 범위를 휩쓰는 공격을 한 것이다.
창극에 걸리는 모든 걸 갈아 버리려는 듯 빙글빙글 도는 브라킨 주위로 바닥이 형편없이 부서졌다.
-흐아아악!
“저 미친놈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브라킨이 포효를 내지르며 기파를 발산해 바닥을 부숴 만들어 낸 파편을 사방으로 쏘아 냈다.
도진은 염동력을 방출해 피해를 줄이려 했으나.
“아네모네!”
아네모네가 그보다 먼저 도진 앞을 가로막았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마! 날아오는 돌멩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이번 공격으로 아네모네는 정령력이란 보호막을 잃고도 상당한 생명력이 줄어들었다.
‘젠장…….’
아네모네의 몸이 조금 떨리는 게 보였다.
충격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정령력만이 아니라 육체에 타격이 있었으니, 그만큼 통증도 있었을 테고.
그러나 걱정된다고 달려가 살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어느새 브라킨이 다시금 공격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노리는 대상은 아네모네였다.
‘일단 어그로는 넘어갔다.’
도진은 아네모네에게 자신의 마나를 넘겨줬다.
아네모네는 도진에게서 흘러들어 오는 마나를 정령력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브라킨에게 달려들었다.
‘진처럼 이렇게 들어갔다가-’
브라킨은 달려드는 아네모네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네모네는 브라킨의 공격 범위 끝자락에 들어갔다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 공격을 흘렸다.
‘이렇게 휘두르면 그때 들어가기!’
큰 공격을 유도한 뒤에 생긴 틈을 비집고 들어간 아네모네가 양발로 빠르게 브라킨을 터덩 하고 후려쳤다.
‘한 번 공격했으면 미련 없이 빠져야 돼!’
도진의 움직임을 보고서 배운 전술과 기술이었다.
얄밉게 치고 빠지고, 빠른 이동속도를 이용해 브라킨을 도진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도하는 아네모네.
‘미안, 아네모네. 최대한 빨리 끝낼게……!’
아네모네가 필사의 노력으로 벌어 주는 시간을, 도진은 0.1초의 낭비 없이 쪼개어 사용했다.
입에 마력초 연초를 물고서 환경을 만든다.
《진흙지대》
지형을 바꾸는 5성 마법.
시전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지형이 바뀌는 동안 계속해서 주문을 유지해야 하기에 실전에서 써먹는 게 거의 불가능한 마법.
하지만 도진은 꿋꿋하게 마나를 퍼부어 가며 충분한 범위를 진흙 구덩이로 만들었다. 그런 뒤 마나 포션을 마신 도진은 새로운 마법을 장전했다.
《마나의 저주》
아네모네에게 창을 던지는 브라킨에게 새로운 저주를 걸었다.
마나 운용을 방해하는 저주로, 결과적으로 마력장을 축소하여 마법에 대한 방어력을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는 저주다.
마나와 마력에 개입하는 저주인 만큼 도진이 소모한 마나도 엄청났지만, 이번 몰아치기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투자였다.
‘추가적인 도핑까지 해 버리면 이후 퀘스트 진행이 후유증 때문에 더 힘들어진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준비를 마친 도진은 아네모네에게 신호했다.
“아네모네!”
세부적인 지시는 강한 의지로 대신했다.
【뭐? 말도 안 돼!】
열심히 뛰던 아네모네가 기겁했다.
이유는, 도진에게서 전해져 오는 의지가 이렇게 말하고 있어서였다.
「나한테 정면으로 달려와.」
브라킨의 어그로를 잔뜩 머금고 있는 자신이 도진에게 정면으로 달려간다?
그건 곧 브라킨도 그 뒤를 따른다는 얘기.
아네모네는 불안했다.
하지만.
‘…진을 믿자.’
도진을, 전해져 오는 그의 감정과 의지를 믿기로 했다.
아네모네는 크게 선회하며 브라킨을 유도했다.
도진, 자신 그리고 브라킨이 직선상에 위치할 수 있게끔.
그런 뒤 도진의 뜻대로 그를 향해 최고 속도로 질주했다.
도진을 달려오는 아네모네와 그 뒤로 비치는 브라킨을 주시했다.
찰박.
아네모네의 발이 도진이 만든 진흙지대에 닿았다.
그러나 빠지진 않는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아네모네는 저 정도 진흙 늪에는 빠지지 않는다.
-쿠억?
하지만 브라킨은 달랐다.
촤아악- 하며 진흙지대에 들어선 놈은 도진이 길게 직선으로 만들어 놓은 늪에 거의 처박히듯이 빠져 버렸다.
-크아아악!
브라킨은 분노에 차서 허우적거렸다.
창을 이용해 단단한 곳을 찍어 보려고 여기저기 푹푹 쑤셔댄다.
워낙 힘이 좋은 놈이니 탈출이 어렵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진이 그렇게 둘 리 없었다.
도진은 「불의 고리」 술식을 짜 올린 뒤 「파멸 룬」을 발동했다.
떠오른 마법진을 검은색 룬문자로 이루어진 끈 여러 가닥이 둘러쌌다.
충전된 피해량 전부를 파멸의 힘으로 전환하여 마법진에 고스란히 전달한다.
《불의 고리》
파멸의 힘으로 강화된 마법이 발동됐다.
하체가 가라앉아 상체만 보이는 브라킨 주위로 생겨난 커다란 화륜(火輪).
도진이 손을 펼쳤다, 강하게 움켜쥐었다.
화르륵!
그러자 불타는 고리가 줄어들며 브라킨을 압박했다.
-크아아아!
드디어 브라킨이 고통에 찬 괴성을 질렀다.
그럴수록 「불의 고리」는 더욱 두껍게 불타오르고, 더욱 강력하게 브라킨을 옭아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도진은 손을 확 꺾어 화륜을 맹렬히 회전시켰다.
이런 거 하나하나가 추가적인 마나를 요구하는 일이었지만, 도진은 이번 「불의 고리」 하나에 모든 마나를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이왕 강화했으니 끝까지 뽑아먹는 게 이득이지.’
「불의 고리」는 「불기둥」과 마찬가지로 채널링 마법이었다.
즉, 시전자의 마법회로와 마나가 버티는 한도 내에서는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다.
그게 도진이 파멸의 힘을 부여할 마법으로 이걸 고른 이유였다.
단발 마법은 뻥 쏘고 끝이지만, 이건 강화된 버전으로 마나가 텅텅 비어 버릴 때까지 적을 지질 수 있는 것이다.
-크으으윽……!
그런데 「파멸 룬」까지 부여한 마법에 지져지고 있음에도 브라킨은 꾸역꾸역 앞으로 전진해 왔다.
“제발 곱게 좀 죽어라……!”
도진은 적당히 조절하던 출력을 아예 한계까지 높였다.
회로가 비명을 지르긴 하지만 어쩌겠나.
여기서 실패하면 진짜 답이 없는 상황인데.
퍼걱.
그래도 다행히 한계는 도진의 마법회로보다 브라킨 쪽이 먼저 찾아왔다.
화륜으로부터 목을 보호하던 놈의 팔뚝이 마치 석고상처럼 부서진 것이다.
자연히 회전하는 화륜은 바로 브라킨의 목을 맹렬히 갉아 댔고.
-그르르… 극…….
콰직!
외피를 뚫고 들어간다 싶더니 순식간에 목을 베어 버렸다.
열과 마찰로 이루어진 절삭력으로 결국 브라킨의 방어를 뚫어 버린 것이다.
“크으윽……!”
브라킨이 쓰러진 걸 확인한 도진은 바로 채널링을 끊었다.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과열로 회로가 녹든 파열되든 할 뻔했다.
‘이딴 게 레벨 보정……?’
양심이 뒤지셨나, 진짜.
저건 파티로 들어와서 잡아야 할 몬스터지, 솔로 플레이로 잡을 놈이 아니다.
근데 이건 혼자서만 진행 가능한 퀘스트다.
그래, 이게 LOST다.
어이란 말도 아깝다. 이건 얼탱이가 없는 수준이다.
고생스러웠던 전투를 끝낸 도진이 과했던 난이도에 대한 억울함을 삭히는 사이.
【…더렵게 질겨서는. 보기 안쓰럽게 말이야.】
언제 내려왔는지 목이 잘려 죽은 브라킨 앞에 유령 매튜가 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매우 씁쓸해 보였다.
‘마왕군 간부 죽은 걸 보는 얼굴이 아닌데.’
순간 스쳐 가는 하나의 생각.
죽지도 못하고 괴물이 되어 떠도는 동료에게 안식을… 같은 건가?
도진은 전직 용사의 표정을 보니 꽤 개연성 있는 추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당신 동료였나?”
【동료?】
매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되묻더니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왜? 죽지도 못하고 떠도는 동료들한테 안식을 주기 위해서 널 부른 걸까 봐?】
“…….”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야. 네가 죽여야 할 놈들 중엔 내 동료였던 녀석도 포함되어 있긴 하니까 말이지. 그런데 그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거나… 아니면 목적을 이룬 결과로써 그렇게 될 거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말했지? 거슬리는 걸 죽이고 싶으니, 내가 죽여 달라는 걸 죽여 달라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말이야. 브라킨 녀석을 쓰러뜨려 가능성을 보여 줬으니 말해 줄게. 내가 살해를 청부할 대상은.】
고개를 돌려 도진을 바라본 매튜가 ‘대상’을 언급했다.
【죽다 만 이 세계. 이곳에 남아 있는 반만 죽은 생명 전체다. 그러니 내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결과적으로 네 생각도 맞게 되는 거지.】
모두가 죽으면 모두가 공평하게 안식을 찾을 테니.
덧붙이는 매튜의 말을, 도진은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