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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암전됐다 돌아오는 것을 기점으로 퀘스트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반투명한 젊은 남자였다.
나 유령이오, 하는 비주얼을 자랑하는 전형적인 기사 차림의 젊은 남자가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도진은 사내새끼 면상이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상대가 유령이든 뭐든 사내새끼가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 존재하는 거 자체가 도진 입장에선 생리적 거부감을 부르는 일이었다.
【어, 왔네?】
태연히 말하는 유령을, 도진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살폈다.
‘뭐지? 적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마법부터 장전해 두려는데.
[‘못다 한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죽은 용사의 유령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를 도와 그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메시지가 떴다.
“용사 유령……?”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유령 본인이 반응했다.
【오오, 알아보는구나? 아니지, 이미 듣고 온 건가.】
음음. 고개를 끄덕인 용사 유령은 도진에게 손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했다.
【반갑다, 다른 세계의 인간. 난 이 세계의 용사였던 매튜다.】
그러더니 내밀었던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런, 생각해 보니까 난 유령이잖아! 산 사람 입장에선 찜찜할지도 모르는데 실례를 할 뻔했군. 하핫.】
유령치곤 너무 밝은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도진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말하는 걸로 봐선 날 기다린 거처럼 보이는데… 맞나?”
【이미 듣고 온 거 아니었어?】
들었다기보다는 방금 ‘본’ 거긴 한데…….
“용사 유… 아니, 용사를 도와서 뭘 하라는 것 정도만 들었다.”
【제대로 듣고 왔네. 그게 내 거래 조건이었거든.】
거래라. 아마 흐름상 거래 대상은… 자신을 도우미라 부르는 ‘빛’이겠지.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지금 중요한 건 도와줘야 하는 게 무엇인가다.
그게 곧 이번 퀘스트의 목표일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난 도우러 온 입장이고, 그쪽은 도와 줄 사람을 불렀단 뜻이네. 그럼 시간 낭비할 거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지. 내가 해야 할 게 뭐야?”
【음…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인간미 없는 녀석이 왔네.】
유령이 고개를 돌리고 투덜댔으나 도진은 그 투덜거림을 무시했다.
마법사치고 자신 정도면 상위 0.0001퍼센트의 정상인이란 믿음이 있는 도진에게 저런 말쯤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음해일 뿐이었다.
【쯧. 표정 변화도 없는 거 봐. 그래, 좋아.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니 네 말대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좋아.”
【죽여야만 할 녀석들이 있다.】
“죽여야만 할 녀석들이라고? 설마 죽은 용사 대신 마왕을 쓰러뜨려라 뭐 이런…….”
【걱정 마. 이 세계엔 마왕 따위 남아 있지 않으니까. 진작에 멸망한 세계에 마왕 같은 게 남아 있을 리가 없잖아? 여긴 마왕은 물론이고 죽음이란 개념마저 사라져 버린 완전히 끝장 난 세상이야.】
죽은 용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부르고자 한 것. 그건 이 세계에서 사라진 ‘죽음’이란 개념을 지닌 다른 세상의 존재. 거슬리는 걸 죽여 줄 수 있는 사람이었어. 일종의 사신님을 원한 셈이지. 그러니까 사신님, 내가 지정하는 걸 죽여 달라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말이지.】
“복수인가?”
【…그럴지도.】
태도를 보아 매튜는 뭔가 더 말을 할 거 같지 않았다.
‘뭐, 대상이 뭔지는 직접 보면 알게 되겠지.’
다른 선택지가 주어진 거면 몰라도 이런 상황에 고민하는 건 시간 낭비다.
“그래서, 내가 죽여야 하는 건 어디 있지?”
【내 무덤에 있지! 따라 오라고.】
다시 밝아진 태도로 유령은 휙 나고 날아갔다.
“잠깐 그렇게 빨리 가 버리면……!”
도진은 매튜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는 이미 저 멀리 날아가서 빨리 오라며 손을 휘젓고 있었다.
죽은 지 오래돼서 인간의 평균적인 이동속도를 가늠을 못 하는 건가?
혀를 찬 도진은 오랜만에 아네모네를 깨웠다.
“아네모네.”
깊은 잠에서 깬 아네모네가 나타났다.
반가움을 표하며 꼬리를 흔드는 아네모네.
도진은 저 멀리 상공에 떠 있는 반투명 용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네모네, 저 유령 쫓아가야 되거든?”
【그냥 따라서 뛰면 되는 거야?】
“응.”
아네모네가 눈짓으로 말했다. ‘타’ 하고.
도진은 평소처럼 아네모네의 등에 탑승했다.
【꽉 잡아.】
넵.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네모네가 바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빨라 봐야 유령의 비행 속도를 이길 수는 없었다.
매튜는 계속해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마치 도발하듯 손짓을 해 댔고, 그때마다 아네모네는 승부욕을 발하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 덕에 일행은 평범히 걸었다면 며칠은 걸렸을 거리를 4시간 만에 주파했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건…….”
매튜가 안내한 곳은 폐허가 되어 버린 커다란 도시였다.
【저기 저 검은색 성 보이지?】
어느새 바로 옆으로 이동해 온 매튜가 도시 가운에 솟아 있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내가 마지막을 맞이한 나의 무덤이야.】
죽은 장소가 마왕성쯤 되는 건가.
폐허가 돼서 그렇게 보이는지는 모르겠는데 딱 분위기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
【진.】
그때 아네모네가 귀를 쫑긋하며 도진을 불렀다.
【감이 좋은 정령이네. 온다. 이세계 사신님의 첫 번째 상대가.】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지 마.”
안 그래도 방금 전부터 들린다.
콰앙, 콰앙, 콰앙, 하는 소리가.
그리고 보이기도 했다.
저 아래쪽에서 이미 부서진 건물들을 완전히 붕괴시키며 달려오는 무언가가.
《원시》
도진은 멀리 보는 마법을 썼다.
그렇게 확인한 적은 터질 듯한 근육을 자랑하는, 양손에 한 자루씩 창을 들고, 등에도 창을 주렁주렁 매단 괴물이었다.
‘이 위로 올라오는 걸 노려서 선공을 해야겠어.’
아직 거리가 상당하니 유효 사거리 내로 들어오면 요격으로 전투를 열어야겠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조심해. 저 녀석, 창기사 브라킨은 내가 싸웠던 녀석들 중에서 가장 터프한 놈이니까.】
매튜의 경고와 동시에 괴물, 브라킨이 몸을 웅크리더니.
엄청난 기세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달려오던 놈이 거의 메뚜기처럼 튀어 오르며 거리를 무서운 기세로 좁혀온다.
“뭐 저런……!”
적이 관측된 순간 이미 마법은 준비해 뒀다.
하지만 너무나 불규칙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다가오는 적을 맞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확실히 맞출 수 있는 순간까지 아낀다.’
후웅- 쾅! 후웅- 쾅!
반복해서 울리는 굉음이 거리를 삭제한다.
도약 한 번이면 도진과의 거리가 완전히 사라질 시점에 브라킨이 창을 치켜들었다.
《다중 화염탄》
브라킨이 공격을 위해 뻔히 눈에 보이는 점프를 한 순간을 노려, 도진이 마법을 발사했다.
그와 동시에 브라킨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의 힘을 폭발시킨 투창 공격을 감행했다.
쐐애액-!
소름 돋는 소리를 내며 도진에게 날아드는 창.
하지만 창은 도진을 맞추지 못했다.
도진이 마법을 발사하는 순간 아네모네가 그를 태운 채 회피 동작에 들어간 덕이었다.
퍼퍼퍼퍼펑.
반대로 도진이 만든 다수의 화염탄은 깔끔하게 브라킨에게 적중했다.
-크라라라라!
하나 매튜의 말대로 브라킨은 터프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었다.
‘5성 마법을 맞고도 움찔하지도 않는다고?’
추락하듯 도진이 있던 자리에 착지한 브라킨은 전혀 피해를 입거나 고통을 느끼는 기색이 아니었다.
‘…확실히 미친 듯이 단단한 놈인가 보네.’
그래도 잡을 수는 있을 거다.
플레이어 레벨에 맞춰서 보정된다고 했으니.
“아네모네, 따로 움직이자.”
【괜찮겠어?】
“물론이지. 딱 봐도 공격력은 더럽게 센 주제에 몸빵까지 좋은 놈 같으니까 최대한 갉아먹는 식으로 접근하자.”
콰앙!
말을 끝맺기 무섭게 브라킨이 다시 창을 던졌다.
발구름에 바닥이 박살 날 정도로 강력한 투창.
도진은 「염동방출」을 활용한 급가속으로 아네모네의 등을 벗어났다.
아네모네도 반대쪽으로 도약해 창을 피했다.
콰지직.
바닥을 박살 내며 박힌 창은 자루가 안 보일 정도로 깊게 박혔다.
【브라킨이 던지는 창에 꿰이면 그대로 황천길이니까 꼭 피해야 해!】
상공을 빙빙 돌며 매튜가 하는 경고를 들은 도진은 생각했다.
‘저딴 걸 맞으면 즉사한다는 거 정도는 두꺼비 정도 지능이면 아는 거잖아!’
아무리 봐도 이 근육 괴물. 전직 마왕군 간부쯤 돼 보인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브라킨이 이성이 아예 없는 거 같다는 것이었다.
광전사랑은 또 다른… 그래, 적의만 가득한 좀비 같은 느낌이다.
그런 만큼 브라킨의 움직임은 매우 단순했다.
-크아악!
괴성을 지르며, 자기 주변을 알짱거리며 도발하는 아네모네에게 창을 연속해서 찌르기만 한다.
‘잡는 건 어렵지 않겠어.’
도진은 브라킨의 신경이 아네모네 쪽으로 쏠린 틈을 타 마법을 시전했다.
《뇌전의 창》
화염 마법은 써 봤으니 이번에는 번개다.
파지지직.
푸른 전광이 브라킨을 강타했다.
휙.
브라킨의 고개가 도진을 향했다.
쾅!
브라킨이 예의 그 강력한 발구름으로 급가속을 하더니, 도진에게 달려들었다.
【진!】
깜짝 놀란 아네모네가 브라킨의 허벅지를 물었으나 브라킨은 아네모네를 매단 채로 도진에게 창격을 날렸다.
훙.
“크-”
신음을 삼킬 틈도 뱉을 틈도 없었다.
쾅! 휭! 후웅!
브라킨은 쌍창으로 찌르고 휘두르고 찍어 가며 도진을 노렸다.
도진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일 브라킨의 공격을 「염동체술」로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너무 빨라!’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게 아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도,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 해도 본능을 앞세운 브라킨을 따돌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젠장, 이러면 근접전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겠어!’
《바람 화살》
창격을 한 번 피하고, 1성 마법 하나를 쐈다.
다시 한번 창격을 피하고 「얼음 화살」 한 발.
‘뭘 맞아도 꿈쩍을 안 하니까 무슨 속성이 약점인지도 파악을 못 하겠잖아.’
아네모네도 필사적으로 물고 할퀴고 치고 있지만, 브라킨은 그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다는 건 마법 피해 쪽이 훨씬 더 위협적이어서 어그로가 이쪽으로 끌렸다는 건데.
‘그래, 어디 해 보자. 더럽게 단단하면 깨질 때까지 패면 그만이지.’
장기전을 각오한 도진은 브라킨의 연속 공격을 리드미컬하며 피하면서 마법을 캐스팅했다.
「착취의 쐐기」로 브라킨의 생명력을 조금씩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서 「염동체술」과 1성 공격 마법을 활용한 근접전이 펼쳐졌다.
【브라킨 놈 약점은 지구력이야! 조금만 더 버티면… 음, 그건 저렇게 되기 전 이야기인가? 그러고 보니까 벌써 지쳤어야 하는데 숨도 헐떡이질 않네?】
넌 좀 닥치고 있어!
정신 사납게 추임새를 넣는 쓸모없는 유령에게 속으로 악을 쓰는 순간.
[룬 건틀렛 피해 충전량이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파멸 룬」 사용에 필요한 피해량이 가득 찼다는 메시지가 출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