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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로 막든 몸으로 막든 탱커 플레이의 핵심은 요령껏 덜 아프게 막고 맞는 기술이다.
그래서 테레사는 주야장천 몬스터의 공격을 막고 맞는 연습을 했다.
양손 망치를 휘두르던 낭만 전사의 길을 접고 든든 탱커가 되기 위해 노력하길 며칠.
도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진: 탱커 연습은 잘돼 가요?]
테레사는 열심히 하고 있고, 방패 쓰는 데 조금은 익숙해진 거 같다는 대답을 돌려줬다.
[도진: 그럼 본격적으로 폐관 수련 하러 가죠.]
도진과 파티를 해 본 적 있는 테레사는 단단히 각오를 했다.
‘힘들어도 이 악물고 버티는 거야.’
하지만 각오를 했음에도 도진과 함께하는 파티 사냥은 눈물 나게 힘들었다.
사냥터를 가든 던전을 가든 언제나 테레사는 극한 상황에 내몰려야 했다.
정확히는, 도진이 정하는 행선지가 하나같이 탱커에게 혹독한 장소였던 게 컸다.
가뜩이나 급조된 인스턴트 탱커라 부족한 부분이 넘치는데, 다짜고짜 극한 상황에 던져 놓고 극복하게 만드니 죽을 맛일 수밖에.
「방패로 막으려고만 하지 말고 방패 스킬을 활용해요. 방패 치기로 상대 공격 타이밍을 뺏으면 되잖아요!」
「몬스터들이 마법사랑 힐러 보고 달려오는데 앞에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해요? 몬스터한테 발목을 잡혔다고요? 그러니까 언제든 파티원 보호가 가능한 포지션을 잡아야죠.」
「잘하고 있어요. 잘하고 있는데… 방금 보스 공격에 날아간 건 왜 그런 거예요? 그럴 땐 방어 태세 굳히고 빗각으로 막았어야 했어요. 정직하게 정면으로 받으니까 붕 떠서 날아가죠.」
「돌진, 돌진, 돌진! 적들 방에서 튀어나오기 전에 입구를 탱커가 틀어막아야 전투가 쉬워져요!」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피드백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었다.
다만 그걸 실행하기 위해선 뼈와 살이 녹을 정도로 노력하고 굴러야 하는 게 문제였다.
반쪽짜리 탱커의 출렁거리는 불안한 피통을 채워야 하는 소소도 상당히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탱커인 테레사가 실수를 해도, 힐러인 소소가 한계에 부딪혀도 파티 자체가 위험에 처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테레사의 피통과 힐러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하며, 정말 이건 안 되겠다 싶은 순간에는 도진이 압도적 화력으로 상황을 정리해 주었던 것.
그렇게, 테레사가 도진에게 끌려다니며 안전하지만 위태롭고, 유익하지만 정신 건강에는 유해한 훈련을 받으며 1월의 막바지가 다가왔을 때.
[멸망의 별 라베스의 조각이 로스타니아에 떨어질 것입니다.
정해진 운명을 집행할 재앙의 대행자가 나타나 필연의 칼날을 휘두를 때가 다가왔습니다.]
[다가오는 태평양 시 2월 1일 00시 00분. 첫 번째 ‘월드 보스 레이드’를 대비하기 위해 마련된 사전 준비 퀘스트 ‘못다 한 일’이 열립니다.
해당 퀘스트는 모든 유저분들이 참여하실 수 있게끔 플레이어 레벨이 보정됩니다.]
[‘못다 한 일’ 퀘스트 공략 진행도에 따라 차후 진행될 월드 보스 레이드의 난이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못다 한 일’ 퀘스트 최초 공략자에게는 이번 월드 보스 레이드에서 사용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집니다.]
새로운 공지사항이 떴다.
* * *
도진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공지사항을 읽었다.
‘전생에는 이런 게 없었을 텐데.’
월드 보스 레이드에 선행하여 어떤 퀘스트가 진행되는 건 특별할 게 없다.
이벤트 시작 전 떡밥을 까는 사전 퀘스트가 진행되는 월드 이벤트도 많았으니.
하지만 이번은 아니다.
‘첫 번째 월드 보스 레이드는 멸망성의 조각이 로스타니아에 낙하하면서 시작됐다. 전조 없이 갑자기 시작돼서 공지사항도 이벤트가 시작되고도 며칠이나 지난 뒤에 통보하는 식으로 올라왔다, 가 내가 알고 있는 건데.’
때문에 유저들이 준비할 틈도 없이 월드 보스를 맞이해야 했고, 큰 피해가 발생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걸 막기 위해서 본격적인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월드 보스가 무사히 공략될 수 있게끔 미리미리 손을 쓰려고 했는데…….
‘3월보다 한 달 이상 빠른 시기에 미리 공지가 올라오고, 거기다 존재조차 없었던 사전 준비 퀘스트까지 생겼다.’
어떤 이유로 이런 변화가 생긴 걸까.
전생과 다른 변수가 생겼다면, 그건 자신으로 인한 변화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회귀자이고,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었으니까.
‘가장 개연성 있는 추측은 직전 월드 이벤트인 도전의 탑 결과가 달라진 영향 때문이다, 정도인데.’
도진은 도전의 탑 마지막 층을 개방했다.
그로 인해 전 월드에 상당 기간 창세성 벨라의 축복이 유지됐고, 유저 전체 평균 레벨은 최소한 5, 높게는 10 정도가 상승했을 터였다.
‘월드 이벤트 주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유저 성장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면…….’
한 달 이상 빨라진 월드 이벤트 시기가 납득이 간다.
‘그런데 사전 준비 퀘스트 쪽은 잘 모르겠네. 퀘스트 내용이 뭔지도 모르니 짐작도 안 가.’
도진은 답답함에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한 달은 더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전 준비 퀘스트가 생긴 만큼 그로 인한 이득이 한 달이란 시간을 상쇄할 수 있을까?
이건 결국 뚜껑을 열어 봐야 아는 거긴 했다.
다만 이거 하난 확실했다.
‘사전 퀘스트 진행 조지면 그대로 헬 모드 시작이겠지.’
LOST를 플레이하면서 언제나 명심할 것.
그건 바로 절대 뫼비우스를 믿으면 안 된다는 거다.
진행도에 따른 난이도 조정이 있을 거라고?
이건 ‘퀘스트 진행 열심히 하시면 난이도 내려드릴게요~’가 아니다.
‘어디 한번 퀘스트 조져 봐. 지옥이 뭔지 보여 줄게 ^^’지.
삐빅, 삐빅, 삐빅.
경험적으로 습득한 뫼비우스의 악독함을 곱씹고 있을 때 알람이 울렸다.
2월 1일을 3분 앞두고 있음을 알리는 알람이었다.
“뭐가 달라졌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면 알겠지.”
도진은 달라진 점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캡슐로 걸어갔다.
* * *
[특별 퀘스트 ‘못다 한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못다 한 일’은 2월 1일부터 2월 10일까지 입장 가능하며 입장 횟수는 1회입니다.]
[해당 기간 중 언제든 퀘스트 진행을 위한 인스턴스 던전에 입장하여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접속과 동시에 메시지가 팝업됐다.
‘레벨 보정에다 모든 유저 어쩌고 하길래 별도로 인던처럼 진행되겠다 예상했더니 딱 그대로 진행되네.’
퀘스트 진행 방식이 예상과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한 도진은 바로 퀘스트 인던을 생성했다.
한 번 생성하고 입장하면 재도전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몇 번이나 반복해 뜨고서야 인던 입장 포탈이 열렸다.
‘한 번 뒤지면 끝장이란 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걸 보니까 더 불안하네.’
아무래도 이 퀘스트, 월드 보스 잡는 데 엄청난 영향을 끼칠 거 같았다.
회귀자 버프를 써 먹기 힘들게 변수가 생긴 건 아쉽지만, 어쩌겠나.
‘그런 만큼 더 잘해 봐야지.’
도진은 각오를 다지며 포탈을 통과했다.
그러자 나타난 공간은.
“여긴…….”
끝없이 새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는 무한한 공간.
도전의 탑 10층에서 보았던 장소였다.
그곳과 닮은, 비슷하지만 다른 곳일까?
그보다 이런 곳에서 무슨 퀘스트를 한다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안녕, 무모한 인간. 오랜만이야. 이번에는 준비할 시간이 넉넉한 편이어서 잊지 않고 소리도 미리 만들어 뒀어.”
예의 그 도전의 탑에서 마주쳤던 ‘빛’이 나타났다.
빛은 셀 수 없이 다양한 색으로 일렁이는 손을 만들어 흔들었다.
방정맞은 움직임에선 진짜로 반가운 기색이 풀풀 풍겼다.
“역시…….”
다시 마주한 빛을 본 도진은 생각했다.
자신의 예상이 정확했다고.
‘도전의 탑 결과가 달라진 게 변화의 원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도진에게 빛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역시? 뭐가 역시라는 거야?”
도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대충 둘러댔다.
“익숙한 공간이 나오길래 네가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자신이 회귀자여서 모르는 변수가 발생한 원인에 대해 생각했다고 떠들 수는 없는 일이니.
어쨌든 구면인 빛은 도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가 말했었잖아. 네 덕분에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거 같다고.”
“넌 탑지기라고 했었던 거 같은데.”
빛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그때 맡은 역할. 내 본질은 그때 소개했던 탑지기와 도우미 중 후자에 더 가까워. 너희 리제니안이 역경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존재니까.”
“도우미라… 네 존재의의는 그렇다 치고. 내 덕분에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는 건 그때 도전의 탑 10층을 개방하지 않았으면…….”
“내가 다시 찾아오는 건 물론이고,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겠지. 물론 나와 직접 대면하는 리제니안은 너 하나긴 해.”
“정체 모를 도우미랑 독대할 수 있는 기회라니, 이거 참 영광인데. 그럼 이런 영광스런 자리를 굳이 마련한 이유를 좀 들어볼까?”
빛이 도진을 조용히 응시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참 신기한 빛이다.
표정과 제스처가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느껴지는 빛 덩어리라니.
“영광 이외에도 추가로 도움을 주고 싶지만, 그건 어려워. 내가 이렇게 온 건 당부를 하기 위함이야.”
“당부?”
“그래. 당부.”
빛은 천천히 도진에게 다가왔다.
“네가 도전의 탑에서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 내면서 너희 리제니안은 더 강해질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런 만큼 너희가 감당해야 할 시련도 그 힘을 키웠지.”
한마디로 내가 아는 난이도보다 더 지랄 맞아졌다는 거네. 속으로 이를 가는 도진에게 빛이 계속해서 말했다.
“멸망은 포기하지 않아. 우리가 정해진 운명의 궤적을 바꾸려 들면, 멸망은 더 강한 힘으로 달라진 궤적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하지.”
운명을 바꾸려는 힘과 틀어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힘의 대립.
“그래도 이미 작게나마 궤적은 틀어졌어. 틀어진 흐름을 원래의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선 저쪽도 그만한 무리를 해야 해. 그 무리만큼 우리에겐 자원이 생긴 거야. 그 자원으로 만든 게 이번 퀘스트고.”
말을 마친 빛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빠르게 희미해져 갔다.
“이런. 시간이 다 된 모양이야.”
“가기 전에 남길 조언 같은 거 없어?”
“아쉽지만 직접적인 조언은 불가능해. 너희 리제니안에겐 공평하게 기회를 줘야 하거든.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빛의 말소리가 멀어진다.
“이번 이야기는 이미 완결된 이야기. 실패한 세상에서 안타까운 결말을 맞은 이야기야. 그 결…….”
멀어지던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차피 핵심적인 정보가 담긴 조언은 아니었겠지만, 다 듣지 못한 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쉬움을 길게 가져갈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못다 한 일’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자신이 모르는 퀘스트, 모르는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