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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 표면이 아닌 혈관과 뼈에 고르게 새겨진 각인은 겉으로 보면 티가 나지 않았다.
도진은 뼈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각인을 발동해 봤다.
「염동」을 운용할 필요 없이, 각인에 마나를 공급하는 것만으로 알아서 오른손에 염동력이 깃들었다.
우우웅.
미세한 진동이 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오른손.
효과는 어느 정도일까.
‘뭐 적당한 거 없나?’
힘을 실험할 적당한 대상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피는 도진의 눈에 은괴가 띄었다.
작업도 하고, 각인도 새겨야 해서 무기 슬롯의 건틀렛은 벗은 상태.
맨손으로는 아무리 꽉 쥐어 봐야 은괴에 자국을 남기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상태라면 어떨지 한번 볼까.’
도진은 염동강화를 풀고서 은괴를 꽉 쥐었다.
역시나 은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괜찮아졌던 욱신거림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다.
도진은 각인을 발동했다.
그러자 다시금 우웅 하는 진동감과 함께 「염동강화」가 일어난다.
꾸욱…….
은괴에 변화가 생겼다.
드라마틱하게 뭉개지거나 하진 않아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정도로 변형된 것.
‘오른손에만 새긴 각인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인가.’
출력을 올리면 더 강해지긴 하겠지만, 각인의 크기가 작은 만큼 안정화 능력도 떨어질 터.
괜히 무리해서 힘을 끌어올리다가 오른손이 박살 나는 수가 있었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벌써부터 다치면 안 되지.’
도진은 미련 없이 은괴를 내려놨다.
“신체 강화 계열 각인인가 보네요……?”
숨죽이고 지켜보던 시살라가 은괴에 남은 선명한 손도장을 유심히 살피다가, 도진의 오른손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음… 이 정도까지 신체 강화 출력을 높여 버리면 부작용이 꽤 심하지 않아요?”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계통의 각인은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동반한다.
그걸 알기에 그녀의 목소리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요. 부작용을 최대한 억제한 각인이니까.”
도진의 말에 시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석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걸 보고 이상하다 싶었어. 각인 면적이 겨우 오른손 정도밖에 안 되는 거치곤 회로 집적도가 지나치게 높아. 거기서 발생하는 잉여 연산능력을 안정화에 쓰는 거겠지?’
그래도 강화 정도가 지나친 거 같은데. 리제니안이라고 몸을 너무 막 쓰는 거 아냐?
사색의 마지막은 결국 도진에 대한 걱정으로 마무리하는 시살라.
그런 시살라의 마음도 모르고, 도진은 벌써부터 다음 각인을 새기기 위해 활성화 작업에 들어간 상태였다.
‘안정성 검증은 됐으니까 빨리 다 새겨야지.’
지금 도진의 머릿속에는 어서 전신에 각인을 다 새겨서 성능을 테스트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 *
도진의 작업은 오랜 시간 이어졌다.
실버문의 각인이 총 24부위에 걸쳐 세밀하게 분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4개의 강화, 제어, 안정 등 별도의 기능과 효과를 지닌 각인을 새겨 넣는 일은 총 14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그렇게 마지막 부위인 머리에 각인을 새기자 이미 새겨 두었던 것을 포함해 24개의 각인이 유기적으로 이어졌다.
완성되기 직전까진 각인 하나하나를 따로 발동해야 했지만, 「염동강화술식」의 마침표이자 제어탑 역할을 하는 두부(頭部) 각인이 새겨짐으로써 완전해진 것이었다.
‘이제 스킬만 배우면 끝이다.’
각인 작업을 완료한 도진은 실버문이 남긴 「고유 마법 체계 - 염동체술 편」의 다른 파트인 스킬 파트를 꺼내어 펼쳤다.
[새로운 마법 체계 「염동체술」이 기록되었습니다.]
끝났다.
“하아…….”
힘든 작업 끝에 몰려온 탈력감은 기분 좋은 안도감을 동반했다.
온몸에 진이 빠진 도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옆을 봤다.
“…….”
시살라는 언제 잠들었는지 곤하게 자는 중이었다.
맡은 업무를 처리해야 할 시간이라며, 꼭 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던 그녀는 하루의 휴가를 받아 나타났다.
멍한 표정으로 비에고의 조수 중 한 명이 대신 일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한 시살라는 어느 순간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잘 시간이 부족한 모양이네.’
이러고 있는 걸 보니 제작 의뢰를 한 입장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법과 관련된 물품을 제작해야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마법사이니 어쩔 수 없겠지.’
아무리 <악에 잠식된 마법공방>에서 제작에 필요한 각종 기구를 얻었다 해도 지속적으로 소모될 재료값만 해도 어마어마했을 터.
그걸 충당하기 위해 잠을 줄여 왔을 테니 항상 피곤에 찌들어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도진이 보기에 시살라는 그런 노력으로 정말 많이 성장한 것처럼 보였다.
‘청성초같이 최고급으로 분류되는 재료를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가공할 수 있는 건 웬만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니까.’
한 번의 실패도 없이 각인이 새겨질 수 있던 것도 염료의 품질이 한몫했다.
그 덕에 염료는 아직도 절반이 조금 넘게 남아 있었다.
유저들이 레벨 100을 넘기고, 본격적으로 각인이란 골드 먹는 하마 콘텐츠에 진입할 시기라는 걸 감안하면, 이 정도만 해도 5만 골드는 넘게 챙길 수 있는 양이었다.
‘재료가 워낙 귀한 거라 가격이 비싼 거야 당연하지만, 같은 재료라도 더 높은 품질에 더 많은 양을 뽑아내는 건 결국 실력이랑 재능이니까.’
톡톡톡. 원목으로 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시살라의 잠든 얼굴을 구경하던 도진은 생각을 마무리했다.
“좋아.”
도진은 결정했다.
시살라가 개인 마법공방을 차릴 수 있게끔 지원하기로.
“시살라.”
잠깐 동안 좀 더 자게 둘까 고민하던 도진은 그냥 시살라를 깨우기로 했다.
오랜만의 휴식 시간을 이런 불편한 자세로 있게 하긴 딱했다.
시살라는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힘겹게 눈을 떴다.
“헉!”
그러고는 자신이 잠들었단 사실에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미,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요? 남는 시간에 잠 좀 잘 수 있는 거지. 그보다, 할 말이 있어요.”
“……?”
평소와 약간 다른 도진의 태도에 시살라가 긴장했다.
그런 그녀에게 도진은 바로 본론을 박아 버렸다.
“마법공방 해 볼 생각 없어요?”
시살라가 ‘이게 뭔 소리래?’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놀랄 거 없어요. 시살라가 만든 염료의 완성도를 보고 하는 말이니까. 다른 재료도 아니고 청성초를 이렇게 다룰 수준이면 마법공방을 열어도 적자는 나지 않을 거예요.”
시살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뭐… 만드는 분야를 걷기로 정한 마법사의 꿈 같은 거긴 하죠. 그런데 그것도 다 능력이 돼야 하는 거예요.”
만드는 것에 재미를 붙인 후로 가끔 상상하긴 했었다.
자신만의 공방을 만들어 보는 것.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나 꿈꿀 수 있는 일이었다.
씁쓸한 현실을 곱씹는 시살라에게 도진이 말했다.
“부족한 거 없어요. 재능은 충분하고, 노력도 충분히 하고 있고, 그런 만큼 실력은 앞으로도 빨리 성장하겠죠.”
“저한테 그것들이 충분한지도 의문이지만, 어차피 그것만 가지고는…….”
“남는 부분은 제가 채우죠. 10만 골드면 어떻게든 시작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지금 농담… 하는 거죠……?”
“아닌데요. 물론 공짜는 당연히 아닙니다. 마법공방 지분은 5:5로 하는 걸로 하죠.”
“미친 소리 말아요! 제가 홀랑 말아먹으면 어쩌려고 그런 큰돈을……!”
10만 골드. 한화로 1억 원 조금 넘기는 돈이다.
골드로 보나 현금으로 보나 적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오멘 마법공방’의 지분 절반을 확보해 둘 금액으로 본다면 한없이 헐값에 가까운 금액이기도 했다.
“부담 가지지 말고 말아먹어요. 그땐 더 투자할 테니까. 대신 제 지분이 더 커지겠죠.”
시살라는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건지.
도진은 미래의 시살라를 알기에 하는 안전한 투자였지만, 그녀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큰 호의로 느껴지는 투자였다.
“시살라, 당신 재능은 진짜예요. 난 그 재능이 좀 더 빨리 꽃피길 바라고, 그걸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도 날 못 믿는데…….”
당신은 절 믿어요? 하는 물음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부적인 계약서는 나중에 작성하기로 하죠. 일단 이것부터 받아요.”
도진은 시살라에게 1만 골드와 남은 청성초 염료를 넘겼다.
“아, 아직 하겠다고 안 했는데요?”
“나 시간 낭비하는 거 싫어합니다. 안 하겠다고 하면 그냥 선물로 줘 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요.”
시살라는 거절 못 한다. 왜냐면 지금 호감도가 무섭게 오르는 중이거든.
모든 경우에 그러하진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호감도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돈에다 말빨, 거기다 감정선까지 깔아 주면? 게임 끝이다.
“나머지 금액은 모험가 길드 통해서 보낼 테니까 찾아가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하는 게 어딨어요!”
어디 있긴? 여기 있지.
일방적으로 제안과 돈을 떠넘긴 도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럼 할 일은 다 끝냈으니 이만 가 볼게요.”
“이러고 간다고요? 그냥?”
“그래야 시살라가 쉬죠. 오랜만에 얻은 휴식이잖아요? 친절한 비에고 씨 덕분에.”
“…진짜 싫다.”
자신을 놀리는 도진을 시살라가 매섭게 노려봤다.
그러나 도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호감도가 마구마구 올라서 60을 찍었는데 저렇게 노려본다고 겁이 날 리가 있나.
매서운 눈빛에 맑은 웃음을 돌려준 도진은 시살라를 강제로 방에 들여보낸 뒤에 엘토마기아를 나섰다.
목적도 달성했고, 내친김에 미래를 위한 투자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했으니, 이제 새롭게 얻은 각인을 실험할 차례였다.
* * *
테스트를 위해 도진이 찾은 곳은 80레벨대 인스턴스 던전 <카포네의 시체 처리장>이었다.
과거 살인범이 시체를 은밀히 처리하던 지하 공간으로, 지금은 좀비와 스켈레톤이 등장하는 던전이 된 곳이었다.
100레벨을 넘어 110을 바라보는 도진이 80레벨 중후반 몬스터가 등장하는 던전을 테스트 장소로 고른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어디 한번 볼까. 다른 마법을 봉인하고도 클리어가 되는지.”
새로 얻은 능력으로만 던전 클리어가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던전 입장과 동시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몰려들었다.
4마리의 스켈레톤들이 달려든다.
도진은 각인 「염동강화술식」을 활성화했다.
24개의 각인이 유기적으로 연동하며, 움직임에 따라 필요한 부위에 딱 필요한 만큼의 강화가 걸린다.
가장 앞서 달려드는 스켈레톤의 턱에 도진의 깔끔한 숏 어퍼가 꽂혔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스켈레톤의 턱이 박살 난다.
아무리 레벨 차이가 난다 해도 마법사의 주먹이 지닐 위력이 아니다.
적의 턱이 작살 나는 손맛에, 도진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역시 강화를 염동력으로 하니까 마공 쪽 계수가 적용되는구나.’
진정한 의미의 마법 펀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