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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29화 (12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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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사흘에 걸친 창고 정리를 마친 시살라는 침대에 누웠다.

‘으윽… 이러다 죽겠어.’

녹색위 마법사가 됐음에도 시살라는 여전히 바빴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바빠졌다.

더 많은 연구 지원을 받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도맡아 초과근무를 자처하다 보니 쉴 시간이 아예 없다.

“하아… 그래도 이번 달엔 120시간 정도 추가로 채웠으니까 이번 지원비는 거의 두 배는 들어오겠네.”

사실 엘토마기아의 마법사로서 받는 돈만으로도 사는 데 지장은 전혀 없었다.

여기에 만족하고 사는 걸 택하면, 마탑 밖에 집을 구해서 풍족한 생활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살라는 마법사로서 더 성장하고 싶었다.

더 많이 실험하고, 더 많이 연구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돈과 지원이 필요했다.

“음… 3시간만 자고 일어나서 공부해야지.”

눈을 감으니 눈꺼풀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만큼 피로가 쌓였다는 뜻이다.

그래도 잠깐이라도 자고 일어나면 훨씬 나아질…….

삐빅- 삐빅- 삐빅-

막 잠들 뻔한 시살라는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평소 같았으면 잠들기 직전에 울리는 통신 팔찌 소리는 저주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살라는 불평 한마디 없이 바로 발신자를 확인했다.

얼마 전 귀한 재료와 편지를 함께 보낸 도진이 그걸 찾으러 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비에고 님……?”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살라의 기대는 최악의 방향으로 박살 났다.

통신용 팔찌에 달린 작은 수정구에 떠 있는 발신자는 비에고 가르뎀.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는 자였다.

황색위 시절 어떻게든 성장할 기회를 얻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던 그녀를 비에고는 벌레 보듯 하곤 했었다.

‘그런 비에고 님이 왜…….’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졸음과 피로가 싹 날아갔다.

녹색위가 된 뒤로 마주칠 일이 없어 잊고 지냈던, 차가운 눈빛과 경멸 어린 목소리가 떠오른 시살라는 긴장한 손길로 통신 팔찌를 쥐었다.

“에, 엘토마기아 녹색위 시살라 오멘입니다.”

시살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이면 ‘엘토마기아’를 입 밖에 내면서 말을 절다니.

용건이 뭔지는 몰라도 그 용건을 듣기 전에 경멸이 가득 담긴 불호령부터 듣게 생겼다.

[“시살라 군, 비에고일세. 지금 로비로 내려올 수 있겠나?”]

시살라는 생각했다.

너무 잠을 줄여서 자신이 돌아 버린 게 분명하다고.

그게 아니면 비에고 가르뎀이란 인간이 자신에게 이렇듯 친절한 말투와 목소리로 말을 할 리 없었다.

[“시살라 군?”]

정신적 충격에 빠진 시살라가 잠시 침묵하자 비에고는 여전히 친절한 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시살라는 급히 대답했다.

“네, 넷!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시살라는 대답과 동시에 침대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방을 나섰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아무리 떠올려도 비에고가 자신을 찾을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호출을 받았으니 빨리 가야 했다.

당혹 반 불안 반으로 이동 마법진에 도착한 시살라는 바로 목적지를 로비로 설정하는 코드를 입력했다.

순간적으로 빛이 사라지듯 시야가 암전됐다 다시 복구됐다.

그런 그녀의 눈에.

“정말 다시 생각해도 제 불찰이 부끄럽기 짝이 없군요.”

매우 정중한 태도로 도진에게 사과하는 비에고와.

“그만하면 됐다니까요? 아까 학회인지 뭔지로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귀찮아하는 도진과.

“…….”

죽은 생선 같은 눈을 하고 구석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르네가 들어왔다.

“……?”

시살라는 당황했다.

일단 도진이 로비에 있는 것도 그랬고, 비에고가 정중한 태도로 사과하고 있는 것도 어울리지 않고, 르네 쟤는… 모르겠다.

‘진짜…….’

저 인간은 어떻게 볼 때마다 상상을 초월하고 있는 건지.

가뜩이나 피로에 지쳐 있던 시살라의 뇌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 * *

겨우겨우 비에고를 떼 놓고 시살라와 단둘이 된 도진은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진짜 피곤한 새끼네…….”

비에고를 떠올리며 한 말에 시살라가 정말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비에고 님이 그렇게 사과한 것도 모자라서 자기 실험실까지 사용하라고 내줘요?”

도진은 조용히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뭐겠어요. 검은 고양이가 다녀간 거지. 처음엔 날 잡아먹으려고 하더니, 검은 고양이랑 마주치고는 태도가 싹 바뀌던데요.”

“…….”

시살라는 바로 납득했다.

비에고가 그런 것도, 르네가 죽어가는 시체 몰골을 하고 있던 것도.

도진 이 인간에다 그분까지 등장하셨다면 그곳은 분명 혼돈과 파괴의 현장이었겠지.

“여기예요.”

생각하며, 시살라는 숙소 문을 열었다.

비에고의 실험실로 가기 전, 만들어 둔 마법 염료를 챙기러 잠깐 숙소에 들른 것이었다.

도진은 시살라의 방을 살피더니 한마디 했다.

“여기… 사람 사는 방 맞아요?”

말 그대로 사람 사는 냄새가 전혀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침대와 침구.

옷가지 몇 벌.

그걸 제외하면 전부 마법과 관련된 물품들뿐이었다.

숙소라기보다는 연구실 옆에 딸린 쪽방 느낌이다.

하지만 시살라 본인은 별 감흥이 없는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도 잠만 잘 자고 공부도 하고 작업도 하고 실험도 하고 다 해요.”

말하면서 서랍을 연 시살라는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마법 염료가 담긴 유리병들을 챙겼다.

“한번 살펴봐요.”

도진은 시살라가 건넨 유리병을 들어 빛에 비춰 보았다.

“깨끗하네요.”

푸른색 염료는 투명하고 맑았다.

불순물 따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적야」로 보아도.

“하아… 다행이다. 진짜 귀한 재료 낭비하는 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긴장한 눈으로 도진을 살피던 시살라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심 엄청 걱정을 한 모양.

“이렇게 잘 만들어 놓고서 뭘 걱정을 해요.”

“재료가 청성초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진짜 갈아서 가루로 만들면서도 심장이 얼마나 떨렸는지 알아요?”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죠?”

“…네.”

시살라 오멘의 마법적 성장의 키워드는 ‘만듦’이다.

단순히 마법 염료를 만드는 일이지만, 청성초같이 최고급 재료로 정밀 작업을 해 볼 수 있는 건 그녀에게 있어 정말 좋은 기회였다.

“고마워요. 도진이 아니었으면 이런 귀한 재료를 다뤄 볼 기회가 없었을 거예요.”

“부탁한 사람은 전데요? 제가 고맙죠.”

서로 훈훈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교환한 도진과 시살라는 이동 마법진을 통해 실험실 층으로 이동했다.

“아, 오셨군요.”

이동하자마자 마법진 앞에는 마법사 한 명이 있었다.

연락 받고 대기하고 있던 비에고의 조수였다.

비에고에게 신신당부를 받은 마법사는 도진을 실험실로 안내해 줬다.

“이곳이 비에고 님의 개인 실험실입니다. 비에고 님께서 안에 있는 자재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사용하셔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마법사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바로 물러났다.

본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마법사끼리 서로의 마법적 실험 현장을 보는 건 금기였다.

이 금기를 아주 잘도 저지르는 게 마법사란 것들이지만, 시온과 관련된 인물에게 그런 짓을 저지를 정도로 비에고의 간은 크지 않았다.

비에고는 조수에게 제대로 엄포를 해 놓았고, 비에고가 두려운 조수는 안내를 마치자마자 바로 물러난 것이었다.

“각인을 만들 거라고 했죠?”

실험실에 들어서자마자 시살라는 익숙한 움직임으로 필요한 것들을 찾아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그녀가 황색위 시절 자주 드나들며 실험 준비‘만’ 했던 곳이었다.

“저울은 이거면 될 거고, 그릇은 이 정도면 되고…….”

그런 기억이 스쳐서, 시살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여기서 제대로 된 걸 해 보네요. 전에는 노예처럼 잡일만 했었는데.”

“비에고인가 그놈이랑 별로 사이가 안 좋았나 보네요.”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비에고 님한테 있어서 전 길가의 돌멩이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특별히 괴롭힌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그냥 철저히 무시하는 쪽이었지.”

잡일도 제가 하고 싶다고 나서서 한 거니까요. 그땐 그거라도 해야 길이 열릴 줄 알았거든요. 다소 씁쓸한 과거를 언급한 시살라는 성숙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도진 덕분에 오랜 슬럼프도 극복했고. 제대로 된 길도 찾은 거 같고. 다 예전 일이죠.”

“뭐, 이젠 비에고 그놈이 이것저것 챙겨 주려고 들 테니까 잘 이용해 먹어요.”

“…그건 진심으로 무서운데요.”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각인 제작에 필요한 준비가 완료됐다.

“역시 엘토마기아. 아주 마석을 산처럼 쌓아 놓고 쓰네.”

도진은 실험실 구석에 놓인 상자에서 마석을 잔뜩 꺼냈다.

남의 것이라 아낄 필요가 없으니 막 쓸 생각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봐도 돼요?”

“보라고 데려온 거예요.”

“그냥 마법사 사이에 예의상 물어본 거죠.”

픽 웃은 도진은 인벤토리에서 실버문이 남긴 책에서 분리한, 각인 파트를 꺼냈다.

각인 파트는 각각의 낱장이 전부 각인 도면이었다.

도진은 제작대에 각인 도면 한 장을 올려 두고, 주변으로 마법진을 그렸다.

그런 뒤 마법진의 방점에 해당하는 지점 지점에 마석을 배치했다.

탁.

마지막 지점에 마석을 내려놓자 마법진이 빛나며 마석에서 마나가 추출되어 종이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마석에 담긴 마나가 다 추출되면 새로운 마석을 올리는 방식으로 한계까지 마나를 충전한 도진은 다음 작업에 돌입했다.

마석을 곱게 갈고, 이미 준비해 둔 각종 금속의 가루를 섞은 뒤 최종적으로 청성초로 만든 마법 염료와 그것들을 섞었다.

완성된 것은 수은처럼 금속 광택이 나는 무거운 액체였다. 수은과의 차이라면 이쪽은 검은빛이라는 것 정도였다.

“후우.”

한차례 한숨을 내쉬는 도진.

옆에서 보고 있던 시살라가 조용히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하지만 집중한 도진은 그것도 느끼지 못하고 최종 단계인 각인 제작에 들어갔다.

마나를 잔뜩 충전한 각인 도면에 염료를 붓는다.

그러자 검은빛 염료가 방울방울 쇠구슬처럼 구르며 마법적 처리가 완료되어 있는 도면에 흡수됐다.

점점 선명해지는 특수한 문양과 회로.

[각인 「염동강화술식」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메시지가 뜨자마자 도진은 각인 도면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 손등에 올려놓았다.

“큭.”

그러자 살을 넘어 뼈에 작열감이 생겨났다.

가상현실임에도 참기 힘들 만큼 불쾌한 통증이 이어진다.

여기서 실패하면 이걸 계속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진절머리가 날 때쯤.

[오른손에 「염동강화술식」을 각인하였습니다.]

[각인 시술에 성공하여 각인 도면 「염동강화술식-오른손」이 소멸했습니다.]

성공 메시지가 떴다.

다행이다. 오른손은 다시 안 해도 된다.

성공하면 소멸하게끔 만들어져 있는지 도면은 재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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